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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공녀님 (51)화 (51/166)

50화

손녀가 건강을 되찾자 본래의 여유가 돌아온 모양이다. 그가 느긋하게 말했다.

“공녀가 정식으로 키스케 전하의 스승을 맡게 되었다는 소식 들었네.”

“부족한 실력이지만 그렇게 되었답니다.”

“겸손도 지나치면 오만일세. 하여간 그걸 의미했던 말인가?”

“글쎄요…….”

힐데가르트는 대답 대신 웃으며 말을 아꼈다.

그러자 대공의 푸른 눈이 반짝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꼭 듣고 싶군.”

엄청난 일이랍니다.

대륙 각지에 게이트를 박아서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게 하는 획기적인 사업이죠.

대륙의 판도를 순식간에 바꿀 거예요.

“생각하고 있는 사업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각하께 말씀드릴 만한 단계는 아니라서요.”

힐데가르트는 일부러 그의 궁금증을 돋운 뒤 한발 물러났다.

“때가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동 게이트 사업은 제대로만 진행되면 대박이 터질 건수다.

그러니 대공에게 함부로 아이디어를 공유할 수는 없다.

사업 주도권을 조금이라도 양보할 생각은 없으니까.

혹시 몰라 운은 띄워놨으니 도움이 필요하면 그때 이야기해도 늦지 않으리라.

“언젠간 꼭 들려주리라 믿지.”

대공은 ‘꼭’이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힐데가르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뻐근해지는 무릎에 힘을 주었다.

‘으, 이젠 진짜 쉬고 싶은데…….’

그런 그녀의 시야에 키스케가 들어왔다.

사람에게 꽤 시달렸던 건지, 키스케는 피곤하고 짜증스러운 얼굴로 슬그머니 발코니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사람을 피하기 좋아 보이는 장소였다. 힐데가르트의 눈이 반짝 빛났다.

“대공 각하! 모처럼이니 이쪽에서 함께 건배하시지요!”

“……로렌조.”

“각하를 기다리는 이가 많습니다! 하하하하!”

오브론 대공이 눈살을 찌푸렸다.

대화를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은근한 의사 표시였으나, 로렌조는 계속 눈치 없이 말을 걸었다.

힐데가르트는 이때다 싶어 다소곳하게 인사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각하. 저는 쉬러 가볼게요.”

“그렇군. 편히 쉬게.”

대공은 아쉬운 눈치였으나 별수 없이 끄덕였다.

힐데가르트는 휴게실로 향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사람이 있었다.

‘혼자 쉬고 싶은데.’

그녀는 별수 없이 혼자 있을 만한 장소를 찾다가 발코니로 나갔다.

힐데가르트가 무거운 어깨를 풀고 있을 때였다.

‘응? 뭐지?’

힐데가르트는 오른쪽 대각선 방향으로 고개를 들었다. 조금 떨어진 위층 발코니에 젊은 여성이 있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키스케랑…… 로바르네 2황자비?’

떨어진 거리였기에 두 사람은 힐데가르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황자비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 궁에, 그것도 정원에 허락도 없이 발을 들였더군요?”

“……급한 사정이었습니다.”

“언제부터 황자비의 궁이 급한 사정으로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곳이 되었죠?”

빈정거리는 목소리는 뾰족하게 키스케를 찔렀다.

“할아버지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확히는 저주를 푸는 과정에서…….”

“황태자의 자리가 그렇게 탐이 나던가요?”

“…….”

엿듣고 있던 힐데가르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저게 무슨 소리야?’

왜 랑케르트 가문 인간들은 다 저렇게 억지부터 부리는 거지?

‘자식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야?’

황자비는 분노가 서린 목소리로 원망을 퍼붓고 있었다.

“폐하께서 내게 당분간 랑케르트 공작령으로 떠날 것을 명하셨습니다.”

“…….”

“그대가 일러바쳤지요? 그렇지 않으면 저토록 완고하실 리 없는데.”

“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지금이라도 가서 말하세요! 황자비에게 내린 명령을 거두어 달라고!”

날카로운 외침이 밤공기를 찢었다.

“기어코 이 숙모가 눈앞에서 사라져야 만족하나요?”

힐데가르트는 그제야 상황을 이해했다.

막시밀리언이 황자비를 궁에서 내보내기로 마음먹은 듯한데, 그 불똥이 애먼 키스케에게 튄 것이다.

‘아니…… 그걸 왜 키스케한테 뭐라고 하는 건데!’

황자비의 궁에서 제물과 저주의 매개체가 나왔다고 전한 건 힐데가르트였다.

전혀 상관없는 키스케를 몰아붙이는 목소리에 그녀의 속이 탔다.

무덤덤한 키스케의 대답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저는 숙모님이 궁에서 나가기를 바란 적은 없습니다.”

“……하.”

“알고 계실 텐데요. 이번 일이 문제가 된 건 숙모님의 정원에서 발견된 저주의 흔적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셨기 때문입니다.”

“시끄러워요!”

“저야말로 묻고 싶습니다.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겁니까? 폐하께서 병이 아닌 저주에 걸렸다는 걸…….”

철썩!

뺨을 후려치는 소리가 선명했다.

힐데가르트는 깜짝 놀랐다.

쥐 죽은 듯이 고요한 침묵이 일었다.

“네 할아버지께선 부모 잃은 손주가 안타까워서 가슴이 미어지시는 듯하구나.”

“…….”

“언제나 네게만 각별하시지. 언제나. 내 아들도, 카라딘도 있는데.”

키스케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두고 보렴. 반드시 네가 아닌 카라딘이 황위에 적합하다는 걸 그분께서도 아시게 될 거다.”

“…….”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쾅!

찰나의 순간 본색을 드러낸 황자비가 곧바로 발코니의 문을 닫고 나갔다.

힐데가르트는 제가 본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미친 거 아니야?’

어떻게 새파랗게 어린아이의 뺨을 때릴 수가 있지?

‘사람이 뵈는 게 없으면 무슨 짓이든 한다지만…….’

차라리 키스케가 울거나 화를 냈다면 좋았을 텐데.

소금기둥처럼 굳어 있는 키스케는 모든 감정을 눌러 참고만 있었다.

‘키스케.’

힐데가르트는 태어나서 한 번도 누군가에게 뺨을 맞아본 적 없었다.

하지만 만약 그런 일을 직접 겪는다면…… 모멸감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을 것 같았다.

키스케가 내내 저런 사람과 황궁에서 얼굴을 맞대고 살아왔던 걸까.

‘이건 아니야.’

공간에는 상처받은 마음을 담아놓는 힘이 있다.

이 순간, 키스케의 마음속에서는 발코니가 로바르네 황자비에게 뺨을 맞은 장소로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어떻게 하지?’

못 본 척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나서서 화를 낼 수도 없는데.

고민하던 힐데가르트는 문득 마법을 보며 환히 웃던 레디스를 떠올렸다.

‘……좋아. 차라리…….’

그녀의 손끝에서 마법으로 만든 푸른 나비가 키스케를 향해 날아갔다.

힐데가르트는 곧바로 발코니를 빠져나왔다.

그러곤 곧바로 키스케가 있던 2층으로 올라가려다, 발길을 돌려 티푸드 테이블로 향했다.

힐데가르트는 오렌지 셔벗이 담긴 유리잔 두 개를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달칵.

그녀가 발코니 문을 열었다.

“사람 있…….”

“키스케, 찾았다!”

힐데가르트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활짝 웃었다.

키스케는 예상대로 난데없이 날아와 제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푸른 나비를 보며 당황하고 있었다.

그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힐데가르트?”

“여기 혼자 쓰기엔 너무 넓지 않아?”

그는 발코니로 찾아온 힐데가르트를 떨떠름하게 보았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긴, 우리 같이 셔벗 먹자!”

그녀가 키스케를 향해 유리잔을 내밀었다.

엉겁결에 유리잔을 받아 들인 키스케의 표정은 묘했다.

“어른들이 말 거는데 피곤해서 혼났다니깐. 먹고 싶은 셔벗도 못 먹고!”

“……정말 먹을 작정이었어? 이 날씨에?”

“물론이지!”

힐데가르트는 보란 듯이 셔벗을 제 입으로 쏙 집어넣었다.

“키스케 너도 먹어. 단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

“…….”

“안 먹을 거야? 일부러 너랑 같이 먹고 싶어서 찾았는데?”

힐데가르트가 기대에 찬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곧 키스케도 한숨을 쉬며 스푼을 들었다.

한동안 테라스에서는 유리 스푼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뺨이 부었네.’

저 잘생긴 얼굴을 보고도 때릴 마음이 드는 걸까?

힐데가르트는 울컥하는 감정을 다스렸다.

마음 같아서는 아프지 않냐며 뺨을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다행히 키스케는 별말 없이 잠자코 셔벗을 입으로 옮겼다.

그녀의 팔에 닭살이 오소소 돋아났을 무렵.

마찬가지로 셔벗을 다 먹은 힐데가르트는 그릇을 내려놓기 무섭게 재채기를 했다.

“그럴 줄 알았어.”

키스케는 기다렸다는 듯 쓴소리를 했다.

“바보냐? 아직 저녁엔 추운 것도 몰라?”

“어차피 추울 거면 맛있는 걸 먹고 추운 게 낫지.”

“그러면 여기로 나오지 말았어야지.”

키스케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잔소리는 잠깐이었다. 키스케는 걸치고 있던 망토를 벗어 힐데가르트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두툼한 망토는 키스케의 체온이 담긴 덕분인지 따끈했다.

힐데가르트가 눈을 끔뻑였다.

“……어, 이걸 바란 건 아니었는데?”

“그럼 다시 주든가.”

말투는 퉁명스러웠지만, 키스케는 망토를 빼앗아 가지는 않았다.

부르르 떨던 힐데가르트는 슬며시 망토를 여몄다.

‘으이구, 이 고슴도치 같은 녀석.’

힐데가르트는 슬슬 키스케가 어떤 애인지 감이 잡혔다.

가시를 세워도 완전히 뾰족해질 수 없는 게 바로 키스케였다. 아직 말랑한 부분이 남아 있어서 상처를 받는 것이다.

‘안쓰러운 녀석.’

그녀는 애틋한 눈으로 키스케를 바라보던 것도 잠시.

달빛조차 오페라 무대 위의 조명으로 만드는 소년을 향해 웃었다.

“왕자님 같네, 키스케.”

“……갑자기 뭐라는 거야.”

“왜? 착하고 멋진 왕자님이란 말 남들한텐 못 들어봤어?”

“…….”

“표정이 그게 뭐야.”

힐데가르트는 무심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키스케가 뭘 잘못 먹었냐는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얼굴 좀 펴, 키스케. 잘생긴 미모가 아까워.”

“까불지 마. 나보다 한참 어린 게.”

부끄러워하긴.

“왜? 전부터 그렇게 생각했어. 키스케는 진짜 멋진 사람이야.”

“…….”

“황궁에서 만난 수상한 마법사를 끝까지 숨겨주는 의리도 있고, 할아버지의 저주를 풀기 위해 움직이는 행동력도 있고.”

“그만 놀리라고…….”

“그래서 난 네가 좋아, 키스케. 널 잘 아는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걸?”

키스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가…… 좋다고?”

“응.”

힐데가르트는 활짝 웃었다.

사람들은 모를 거다.

영문 모를 악의와 맞설 때 너를 좋아한다는 말 하나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곁에 있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거 하나만으로, 어두웠던 마음이 얼마나 환해지는지.

힐데가르트는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귀 끝이 발갛게 변할 때까지 시선을 피하지 않고 쭉 바라보았다.

결국 부끄러움을 못 참고 고개를 먼저 돌린 건 키스케었다.

“너…… 그런 말 아무한테나 하지 마. 아니, 농담으로라도 하지 마.”

“왜?”

“오해할 뻔했잖아!”

키스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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