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공녀님 (50)화 (50/166)

49화

힐데가르트는 귀를 의심했다.

‘뭘 반납해?’

공회의 의석을 넘긴다는 건, 국정에 참여할 의결권 또한 없어진다는 말이다.

건국 이래로 그런 수치를 겪은 공작가는 단 한 곳도 없다.

‘누구 마음대로?’

이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던 좌중의 낯빛도 한 번에 변했다.

어떤 이는 경악으로, 어떤 이는 즐거움으로.

“마우제네 님.”

안색이 달라진 미하일이 다시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다음 공회에는 제가 직접 출석하겠습니다. 작위를 이은 뒤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건 당연한 겁니다.”

“제 생각이 짧아 공회에 제대로 참석할 수 없다고 말씀드리는 걸 잊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의석을 반납하다니…….”

마우제네의 말은 터무니없는 억지였다.

동시에 모처럼 경사가 찾아온 아카락시아 가문을 향해 찬물을 뿌리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일부러 이 순간을 노린 거야.’

타이를 생각이었다면 미하일을 불러서 단둘이 이야기했을 테지.

정말 의석을 박탈시킬 작정이었다면 공회에서 의견을 냈을 테고.

하필 이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한다는 건…….

‘남들이 보는 곳에서 찍어 누르겠단 속셈.’

너희가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랑케르트 공작가만 못하다.

악랄한 적의는 유화 물감처럼 선명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카락시아 가문은 공회를 아예 잊고 있었다는 소리 아닙니까.”

마우제네의 아니꼬워하는 반응에 미하일이 당황했다.

똑같은 맏이라 해도 족히 열 살은 넘게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이다.

서로가 공작가를 대표하는 인물이라 해도, 미하일은 아직 그녀의 기백을 쉽게 감당하지 못했다.

“아카락시아가 공회를 내팽개친 탓에 작년에 있었던 산사태와 도로 복구 피해는 온전히 남은 공작가에서 떠맡았습니다.”

“아…….”

“그 덕을 누가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미하일은 수도로 올라오며 이용했던 도로를 떠올렸다.

“하지만 공작가의 의석 반납은 지나친 주장…….”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로렌조 님.”

벌써 세 번째로 미하일의 말을 싹둑 자른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이베르타의 수해 때도 아카락시아에서 연락이 있었던가요?”

“이런, 하하하! 마우제네는 항상 기운이 넘치는구려!”

어느새 근처에 와 있었던 건지, 로렌조는 커다란 목소리로 웃었다.

“요 몇 년 동안 아카락시아 공작가가 제구실을 못 하기는 했지!”

그는 레디스의 등을 두드려줄 때처럼 활기찼지만, 말속에는 가시가 있었다.

물론 로렌조는 적당히 가시를 숨겼다.

“그래도 이 자리에서 말하기엔 그렇군. 나머지는 공회에서 이야기하는 게 어떤가?”

로렌조가 중립적인 태도로 이야기를 뭉개는 척하자 미하일과 레디스는 다소나마 안도했다.

그러나 힐데가르트의 표정은 더욱 차갑게 굳었다.

‘제구실을 못 해? 공회에서 이야기?’

그건 마우제네의 말에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과 다름없었다.

“그럼 결정 났군요.”

서슬 퍼런 시선이 세 남매를 훑었다.

“미하일 소공작께서는 아직도 또렷한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고 계시니, 이 건은 다음 공회에서 이야기하도록 하죠.”

“실망입니다, 마우제네 님. 황제의 사냥개는 아무나 물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우승 연회에서 이렇게 몰아세우시다뇨.”

마우제네의 눈썹이 움직였다.

설마 이 순간, 가장 어린 힐데가르트가 입을 열 거라곤 생각하지 못해서였다.

고요하게 타오르는 소녀의 눈빛이 푸른 불꽃 같았다.

“히, 힐데?”

미하일이 그녀를 말리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힐데가르트는 그 손을 단호히 뿌리쳤다.

지금은 얌전히 물러날 수 없다.

랑케르트나 다른 가문 측 불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간, 다른 귀족들에게 아카락시아 공작가가 어떻게 비칠지는 뻔한 일이다.

“마우제네 님. 최소한 대화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끝까지 들으셔야죠.”

“듣는다고 달라질 건 없을 것 같은데.”

“처음부터 이유를 들을 생각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셨잖아요? 그건 대화가 아니라 통보입니다.”

“…….”

“개국 공신인 아카락시아 공작가가 의석을 내놓는 일이 그렇게 쉽게 결정될 일인가요?”

마우제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건 오롯이 폐하의 권한입니다. 공회에 불참했는데도 내버려 두신 것도 뜻이 있으시기 때문이고요.”

한마디로 황제인 막시밀리언이 내버려 두는 걸, 네가 왜 따지고 드냐는 소리였다.

힐데가르트의 청보랏빛 눈이 한 치의 양보 없이 선명하게 날카로워진 그때였다.

예상 못 한 사람이 그녀의 말을 거들었다.

“그 말이 맞네, 마우제네. 같은 다섯 별 사이에 왜 그리 박하게 구는가?”

“……오브론 대공 각하.”

“오랜만이군.”

마우제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자네도 잘 지낸 모양이로군. 한데 어째서 칼란도가 아닌 자네가 출석했지?”

“아버지께서는 몸이 좋지 않으셔서 제가 대리로 참석하였습니다.”

“그랬나? 그런 거라면 이해가 가는군.”

“……예?”

“하마터면 자네의 발언이 랑케르트의 뜻인 줄 알았지 뭔가.”

힐데가르트의 곁으로 다가온 대공의 걸음은 우아하고 여유로웠다.

“공회에 결석하는 모습에 실망이 컸던 건 알겠지만, 가주 대리로서 할 말은 아니지.”

과연 오브론의 수장. 지고하신 핏줄답게 능란한 언변이라고 해야 할까.

“자네의 마음도 이해는 하네만 언사를 조심해야지.”

“각하, 제 말은…….”

“개인적인 감정은 내려놓게.”

오브론 대공은 순식간에 마우제네의 말을 사적인 분노로 뒤바꿔놓았다.

“힐데가르트 공녀의 말이 옳아. 폐하께서 내버려 두신 일을 자네가 무슨 권한으로 왈가왈부하는가?”

힐데가르트는 마우제네가 조용히 주먹을 쥐는 걸 분명히 보았다.

까마귀 모양의 문신이 찍힌 손등 위로 푸른 핏줄이 돋아났다.

“대공 각하. 아시다시피 아카락시아 가문의 위세는 예전 같지 않습니다.”

마우제네는 한마디씩 씹어 뱉었다.

“욕보이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지금의 아카락시아 가문에게는 의석이 버겁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의 짐을 덜어주기 위함이다?”

“미하일 소공작은 아직 어리기도 하고요. 여러모로 힘들지 않겠습니까?”

“힘들다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낭랑한 목소리로 대답한 건 힐데가르트였다.

“……힐데가르트 공녀. 어른들의 대화에 끼어드는 걸 즐기는 버릇이 있나 보군요?”

“1년 반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마우제네가 일그러진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내년 가을 승계식부터 아카락시아 공작가는 상상도 못 할 방법으로 제국을 이끌어나갈 거예요.”

“상상도 못 할 방법? 그게 뭡니까?”

“때가 되면 자연스레 알게 되실 겁니다.”

“……하.”

마우제네는 실소를 터뜨렸다.

어린애 농담이나 다름없는 말을 진지하게 들은 자신이 바보였다는 듯.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우제네 님. 아카락시아 공작가는 앞으로 변할 겁니다.”

하지만 오브론 대공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절대, 지금 같은 모습이 아닐 겁니다.”

힐데가르트는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생각이 없었다.

다섯 가문 중에서도 떨거지, 라는 말을 듣는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작위까지 빼앗아서 내치겠다고?

‘누구 마음대로?’

전생을 다 바쳐 제국과 가문에 헌신했던 그녀가 느끼는 분노는 상당했다.

“어린 공녀의 꿈과 자존심을 짓밟는 건 어른의 도리가 아니죠.”

마우제네는 차가운 눈으로 힐데가르트와 미하일을 쏘아보았다.

“그러니 오늘은 이쯤 하겠습니다. 하지만 다음에도 이렇게 넘어갈 거라는 기대는 하지 마세요, 미하일 소공작.”

랑케르트의 젊은 사냥개는 미하일을 물어뜯을 것처럼 노려본 뒤, 자리를 떠났다.

* * *

사람들은 랑케르트와 아카락시아 공작가 사이에서 벌어진 마찰이 재미있다는 듯 수군거렸다.

덕분에 힐데가르트의 기분은 심히 좋지 못했다.

랑케르트에게 보석 광산을 가져다 판 문제만 하더라도 화가 상당하건만, 의석 반납이라니.

‘랑케르트가 예전에는 저 정도로 성질을 긁지는 않았는데.’

현재 힐데가르트에게 랑케르트의 평가는 더는 나빠질 수 없을 정도로 최악이었다.

그럴 만한 게 의석과 의결권이 없는 공작가라니, 가죽만 남겨놓은 박제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마우제네는 그녀의 면전에 대고 ‘망해라’라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힐데가르트는 애써 표정을 폈지만, 억지웃음에는 한계가 있었다.

때마침 막시밀리언 황제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조용히 자리를 피할 뻔했다.

“황제 폐하 드십니다!”

연회 참석자의 관심이 한꺼번에 황제에게 쏠렸다.

“모두 오랜만이로군.”

“무탈하신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입니다.”

“폐하! 이렇게 뵙게 되어 기쁠 따름입니다!”

오브론 대공과 로렌조가 황제에게 다가갔다.

황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문에서 건강 이상설이 나돌던 사람이었다.

세월과 나이는 속일 수 없으니 곧 양위하지 않겠냐는 말도 공공연히 나돌았건만.

그는 보란 듯이 건강했다.

활기가 흘러넘쳤으며, 정신도 흐리터분한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오늘은 우승자를 위한 날이니 지나치지 않도록 행동하는 게 좋겠네, 마우제네.”

“……죄송합니다. 유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좀전의 소란을 전해 들었던 모양이다.

힐데가르트와 막시밀리언의 시선이 맞닿았다. 그가 히쭉 웃었다.

“레디스 공자. 피를 못 속이는 모양이다. 어릴 적, 짐에게 검술을 가르쳤던 아카락시아 공작가의 스승 또한 검술의 재능이 대단했는데, 그대도 훌륭하구나.”

“아, 아닙……. 아니, 영광입니다, 폐하.”

“어린 형제가 함께 가문을 지탱하느라 고생이 많을 텐데 이렇게 훌륭한 결과를 냈으니 바람직하다.”

그 직후 깜짝 놀랄 일이 일어났다. 황제가 레디스에게 저택을 하사한 것이다.

“수도 발프람에서도 가장 목이 좋은 곳에 있는 저택이다. 그대의 마음에 들면 좋겠구나.”

“폐, 폐하……!”

“앞으로도 정진하라. 기대하겠다. 그대도, 아카락시아의 변화도.”

그건 랑케르트가 어떻게 짖든, 황제는 아카락시아 공작가를 내치지 않는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로바르네 황자비 곁에 서 있던 마우제네의 얼굴이 크게 구겨졌다.

‘타이밍이 좋다고 해야 할지…….’

덕분에 쓸데없는 소문 걱정은 한결 덜었다. 힐데가르트는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막스 녀석. 은근히 뻔뻔함이 늘었구나.’

새로운 저택은 자기만 믿으라더니만, 이렇게 나올 줄이야.

공평한 척 대놓고 챙겨주는 연회의 한가운데에서 힐데가르트는 겨우 웃을 수 있었다.

막시밀리언은 준우승자에게도 황실에서만 기르는 명마를 하사한 뒤, 간단하게 축배를 들었다.

그 속에서 힐데가르트는 80년 전과 확연히 달라진 현재를 느낄 수 있었다.

모두가 기대에 찬 눈으로 황제를 보았다.

눈빛 속에 담긴 감정은 제각기 다른 온도였으며, 복잡하며 오묘했다.

날 것 그대로 드러나는 욕망.

한없이 어리던 제자 막시밀리언은 그늘이 없는 자리에서 그 시선을 한 몸에 받아내고 있었다.

그녀는 가슴께가 묘하게 답답하고 뻐근해지는 걸 느꼈다.

“하마터면 기막힌 꼴을 당할 뻔했군.”

“……대공 각하.”

오브론 대공은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나름대로 충고를 건넬 생각이었는지,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우제네는 랑케르트에서도 상당한 추종자를 거느린 사람이지.”

“그런 것 같네요.”

“가주인 칼란도 다음으로 성가신 자라네.”

“…….”

“조심하게.”

“그 말은 제가 아닌 미하일에게 필요한 말일 텐데요.”

“내 눈에는 공녀가 실질적인 가주처럼 보였네만.”

이래서 연륜 있는 사람의 안목은 우습게 보기 힘들다. 힐데가르트가 실소를 흘렸다.

“그런데 공녀. 아카락시아의 ‘상상도 못 할 방법’이라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건가? 생각해 둔 게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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