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오빠, 내일 나랑 나가자. 응? 내가 선물 사 줄게. 진짜! 비싼 걸로 사줄게!”
“됐다, 나 돈 많다. 상처받은 마음 돈으로 달래줄 정도로 많아.”
그 돈 내가 준 거다, 얘들아!
물론 힐데가르트는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다.
그녀는 레디스의 허리를 붙잡고 미안하다 사랑한다, 열심히 외쳤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막스한테 뭐라도 뜯어왔을 텐데!’
물론 뜯어온 게 없지는 않다.
하지만 레디스의 본선 진출 축하 선물로 수도 저택 집문서를 쥐여줄 수는 없잖아.
“내일 사줄게. 응?”
“내일 또 가출할까 봐 겁나니까 괜찮다.”
“너무하네!”
힐데가르트는 레디스를 퍽퍽 쳤다.
레디스는 그녀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목에 헤드록을 건 채 낄낄 웃었다.
물론 팔에는 힘이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왼손으로는 머리카락을 개털 흐트러뜨리듯 마구 헝클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던 카유크는 힐데가르트가 통사정하는 모습이 어지간히도 재미있는지, 말리는 시늉조차 없었다.
미하일과 로빈도 티격태격하는 우리의 모습을 즐겁게 구경 중이었다.
“뭐 가지고 싶은 거 없어? 원래 선물은 받고 싶은 거 주는 거랬어.”
“이미 형이랑 로빈이 준비한 거 같은데.”
“……하나도 없어?”
“아. 생각해 보니 있긴 해.”
“뭔데? 말해봐!”
힐데가르트는 레디스의 팔을 양손으로 꽉 안았다.
“네가 마법 쓰는 게 보고 싶어.”
“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법 말이야. 난 네가 마법을 쓰는 걸 한 번도 본 기억이 없어. 대체 어떻게 쓰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단 말이야.”
“그게 무슨 선물이야?”
“싫으면 말고?”
“아니, 싫은 건 아닌데……. 진짜 그런 걸로 괜찮단 말야?”
“응.”
힐데가르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레디스를 응시했다.
하지만 레디스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와, 힐데가 마법을 쓰는 거야? 나도 보고 싶었는데.”
“저도요, 아가씨!”
“아니, 왜 두 사람까지…….”
미하일과 로빈이 눈을 반짝반짝하게 빛냈다.
일이 이렇게 되니 못 한다며 뒤로 뺄 수는 없었다.
“알겠어. 그럼…….”
힐데가르트는 잠시만 시간을 달라고 한 뒤 어떤 마법이 좋을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레디스는 그동안 미하일과 로빈에게 건네받은 선물을 풀어보았다.
“어, 이거!”
“로빈이랑 같이 고른 예복이야. 네가 예전에 입던 걸 마음에 안 들어 하길래.”
“당연하지. 그땐 백작 부인 때문에 억지로 싫어하는 색을 입었으니까.”
미하일과 로빈의 선물은 은색 실로 박음질이 촘촘하게 들어 있는 하얀 예복과 푸른색 케이프였다.
“본선 진출 축하해, 레디스.”
“노력하셨던 만큼 좋은 결과가 있을 거예요.”
“고마워. 꼭 우승해서 입어야겠네.”
“옷은 마음에 드세요?”
“응. 전에 입던 갈색보다 훨씬 나은데?”
레디스는 선물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는지 옷을 자기 몸에 대보았다.
카유크는 수도에서 유행하는 검집 장식을 선물했다.
정말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하고 빈손인 건 힐데가르트뿐이었다.
힐데가르트는 예복을 곱게 접어 상자에 다시 집어넣는 레디스를 빤히 보았다.
그러자 조용히 카유크가 다가왔다.
“너 정말로 마법 쓸 거야?”
“응.”
“몸 안 좋다며?”
“괜찮아.”
사실 아직도 몸이 좀 안 좋지만, 이런저런 핑계로 레디스에게 빈손 축하만 해주려니 힐데가르트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그까짓 마력 고갈, 며칠 더 앓으면 될 일이지.
힐데가르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본선에 나간 거 축하해, 레디스 오빠. 이건 우승 예행연습이야.”
“응?”
레디스가 힐데가르트를 보던 것도 잠시.
한 송이, 또 한 송이.
하얀 눈이 실내에서 바람도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비현실적인 광경에 미하일과 로빈이 놀라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눈?”
“어? 정말 눈이 내리네요!”
아무것도 없는 천장에서 눈이 폴폴 내리고 있었다.
간단한 환영 마법이었다.
“차갑진…… 않네?”
“마법이니까.”
놀란 레디스가 손바닥을 내밀어서 눈송이를 쥐었다.
그러자 피부에 닿은 눈송이는 하얀 싸리꽃으로 변했다.
레디스는 자기 손바닥과 하늘하늘 떨어지는 눈송이가 신기하다는 듯 번갈아 보았다.
“우승했을 때 꽃가루 때문에 허우적거리면 멋없잖아.”
힐데가르트는 일부러 에흠, 하고 기침 소리를 냈다.
“미리 예행 연습한다고 생각해.”
실내에서 내리던 눈은 레디스의 어깨와 머리에 닿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놀란 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미하일과 로빈도 눈송이를 찔러보거나 쥐어보려 했고, 카유크는 혀를 내밀기도 했다.
“……진짜 근사하네.”
“마음에 들어?”
“응. 너 진짜 멋진 마법을 쓰는구나.”
“…….”
힐데가르트는 조금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마법을 쓴 걸로 이렇게 기뻐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렇게 웃는 모습을 위해서라면 두통쯤이야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우승하면 한 번 더 보여줄 수 있어?”
힐데가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까짓거 그쯤이야. 어려울 거 하나도 없지.
“고마워.”
마침내 레디스의 입가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걸렸다.
* * *
힐데가르트의 마력 고갈이 낫는 데는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으, 두 번 걸리면 정말 죽겠네.’
며칠 동안 힐데가르트는 침대에서 일어나며 두통을 느꼈다.
팔다리에 납덩이가 붙어 있는 기분이었다.
마력 고갈은 병이라기보다는 중독 상태에 걸린 것과 비슷하다.
해독제는 따로 없지만 마력을 체내에 충분히 쌓으면 자연스럽게 나을 일이다.
문제는 이곳이 아카락시아 공작저가 아니라는 점이다.
‘주변에 식물이라도 많으면 좋을 텐데…….’
온실이라도 있다면 이렇게 오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시 마법을 수련하고 마력을 채우기 위해선 공기 좋고 녹색 식물로 가득한 본 저택이 최고였다.
반면 레디스는 힐데가르트가 골골거리던 일주일 동안 세상 무서울 게 없는 사람처럼 승승장구했다.
이쯤 되니 힐데가르트도 진심으로 그의 우승을 바라게 될 정도였다.
“어느 집 호랑이 새끼인가 했는데 우리 집 호랑이일 줄은 몰랐지.”
“응?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야. 계속해.”
힐데가르트는 안뜰에서 카유크와 대련 중인 레디스에게 손사래를 쳤다.
벌써 네 번째 대련이었다.
수도에 올라온 뒤, 카유크와 몇 차례 검을 섞어본 레디스는 이제 제법 자신감이 붙은 모습이었다.
레디스는 단순히 베고 찌르는 동작을 반복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어떤 공격이 날아올지 스스로 생각하며 검을 움직이고 있었다.
‘경험 부족으로 낭패 볼 줄 알았는데, 단번에 준결승전까지 올라갈 정도면 피는 못 속이지.’
힐데가르트가 흐뭇하게 웃었다.
하긴. 우리 집안이 어떤 곳인데. 검술 대회 우승 정도는 당연히 해줘야지!
‘그래도 기특하네.’
그간 레디스는 검술의 기교보다 기초에 무게를 두고 수련을 거듭했다.
빠르게 베고, 정확하게 찌르고, 확실하게 피하는 것.
지루한 과정이었으나 레디스는 도망치지 않고 착실히 자신과의 싸움에 임했다.
하지만 흐뭇한 한편으로 저렇게까지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왜냐하면 레디스는 아카락시아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저렇게 애쓰지 않아도 그녀가 반드시 행복하게 해주리라 다짐한 가족이었다.
힐데가르트는 불현듯 깨달았다.
막스가 한 말이 이런 뜻이었나?
‘가문이나 제자보다도 스승님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렇게 살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때는 힐데가르트 또한 무던히 애를 쓰며 수련을 거듭했다.
정식으로 레온하르트의 여동생으로 입적되었을 때, 아카락시아 공작가에 커다란 빚을 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오빠를 위해서, 가문을 위해서 쓸모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마음의 빚을 갚을 방법이 그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레온하르트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목검을 들고 새벽같이 수련장으로 향했던 건 그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나를 동생으로 삼아줘서 고마워.
나는 오빠가 날 동정해 주어서 정말 기뻐.
그렇게 말하면 혼을 낼 테니까 다른 방식으로라도 돌려주고 싶었다.
저를 거두어준 레온하르트와 아카락시아 공작가가 위명을 떨치길 바랐다.
저렇게 대단한 마검사를, 불세출의 천재를 받아들인 공작이라며.
세상에 둘도 없는 인격자라며 모두가 입을 모아 찬탄하길 바랐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레온하르트도 그걸 원했었을까.
레디스가 수련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빠가 그런 걸 바란 적이 있었던가?
“…….”
황실 직속 기사인 로열 가드는 황족을 수호하는 열두 명의 기사다. 그들은 존재만으로도 선망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레디스의 꿈이 그것이라 들었을 때, 힐데가르트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굳이?’였다.
황족을 수호하는 기사로 사는 게 꿈이라고 말할 만큼 대단한 건가?
굳이 그런 걸 꿈으로 삼을 필요가 있나?
로열 가드가 된다는 건 본인과 가문에게 굉장한 영광이다.
하지만 약자를 돌보며 따라오는 귀족의 명예란 아무리 대단해 봤자 촛불이나 마찬가지다.
가장 환한 촛불은 제일 먼저 꺼지는 법이니까. 꼭 그녀가 그랬듯이.
레디스. 가문은 가문이고 너는 너야. 그런 부질없는 것을 꿈으로 삼을 필요는 없어.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하긴. 아직도 가문에 집착하는 내가 할 말은 아닌가.’
인생을 가문에 바쳤음에도 이 꼴을 보고 있는 힐데가르트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그녀는 마성신 토벌을 만류하던 레온하르트의 경고를 귀담아듣지 않았기에 죽었다.
레온하르트는 죽은 사람 때문에 광산을 가져다 팔았고, 결과적으로는 집안을 말아먹을 뻔했다.
그럴 필요는 없었다.
레온하르트가 저를 그렇게까지 아껴줄 필요는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힐데가르트에게는 자기 자신보다 가문이 먼저였다.
꿈은 없다.
미하일과 레디스가 잘 자라면, 공작가가 다시 옛 영화를 되찾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 이상의 미래는 상상하기 피곤했다.
이 좁은 우주에서 무언가를 바라기에는 그녀가 너무 낡고 보잘것없었다.
그래서 레온하르트를 떠올릴 때마다 힐데가르트는 그가 저를 많이 아껴주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다.
‘그렇게까지 아껴줄 필요는 없었는데.’
레온 오빠.
오빠는 나에게 잘 어울릴 거라며 레인보우 글로우를 내밀었지만.
사실 그때의 나는 오빠에게 돌려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초조했던 열여섯 살이었어.
‘이 마음의 빚은 평생 내려놓을 수 없겠구나.’
힐데가르트의 입가에 쓴웃음이 머물다가 사라졌다.
그렇게 얼마나 미동 없이 앉아 있었을까.
찻잔 손잡이를 매만지던 그녀가 자신의 뺨을 짝 소리 나게 쳤다.
‘정신 차리자.’
이미 오빠는 이 세상에 없다.
그러니 마음의 빚을 갚을 방법이라고 해봐야 하나뿐이다.
가문 재건!
‘방법을 생각해 내. 나만이 가능한 방법으로.’
힐데가르트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환생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그녀는 가문을 재건할 만한 방법 세 가지를 고안해 냈다.
첫째는 가문의 남은 재산을 찾아 가계에 보태는 것.
둘째는 사업을 시작하는 것.
셋째는 제자를 가르치는 것이다.
‘나름 수월하게 풀려 왔어.’
백작 부인을 쫓아내서 가문의 재산을 찾아냈고, 아이의 후견인으로 든든한 사람을 꽂아 넣었다.
막시밀리언과 재회한 덕분에 키스케가 그녀의 제자로 들어오는 건 시간문제였다.
‘뭔가 좋은 사업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