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사람한테 삿대질하는 거 아냐. 힐데, 무슨 사정이었길래 그래?”
“그게…….”
어떻게 할까.
힐데가르트는 잠시 고민했다.
이대로 대충 혼나는 걸 한 귀로 듣고 흘리거나 둘러대는 건 쉬웠다.
하지만 마차를 타고 오는 내내 생각했다.
이건 역으로 좋은 기회가 아닐까?
‘언제까지나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걸 숨길 수는 없어.’
오브론 대공가와 황가에 마법사라는 걸 밝힌 이상, 언젠가는 두 사람에게도 알려주어야 할 사실이다.
특히 키스케를 제자도 들일 거라면 슬슬 이야기를 흘려두어야 했다.
힐데가르트는 빠르게 판단을 마쳤다.
“실은 말이야…….”
힐데가르트는 진실과 거짓을 적당히 섞어서 자신이 마법을 쓸 수 있게 되었다는 걸 밝혔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면박을 주던 레디스가 또 한 번 삿대질하려던 것도 잠시.
“야, 너 손바닥 위에 그거……!”
눈앞에서 직접 마법을 보이자 식겁하며 안색을 달리했다.
미하일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놀라지 말고 들어.”
힐데가르트는 저주에 관한 이야기를 쏙 빼고 하나씩 설명했다.
어느 날부턴가 마법을 쓸 수 있게 되어서 마도학 지식을 수소문하다가, 대공가와 인연이 닿았다고.
그리고 수도에 올라온 김에 대공의 중개로 황태자의 수업을 도와주고 왔다고.
“뭐?”
“황태자 전하?!”
“아, 정확히는 황태손 전하. 키스케 전하를 돕느라 늦었어. 그래서 연락이 좀 늦어진 거야. 미안.”
두 사람이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힐데가르트는 슬그머니 눈을 돌렸다.
혼나는 게 싫어서가 아니라, 거짓말을 하는 데서 오는 양심의 가책이 컸기 때문이다.
‘사실대로 말하면 난리가 나겠지.’
저주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일리야 공녀와 황제의 저주를 푼 이야기는 비밀이었다.
“키, 키스케 전하를 만나 뵙고 왔단 말이야?”
“야 너, 너…… 너 실례되는 행동으로 어디 갇혀 있다 온 건…….”
“내 이미지가 그것밖에 안 돼?!”
힐데가르트는 잠깐 억울해졌다.
정신을 차린 미하일이 심호흡을 한 다음 차분히 물었다.
“그러니까, 힐데 네 말은…… 마법에 대해 알아보느라 대공가에 갔다가, 거기서…… 키, 키…….”
“키스케 전하를 만나서 궁으로 초대받았어. 나랑 마찬가지로 마력을 다룰 줄 알길래 조금 도와주고 오는 길이야.”
그리고 앞으로도 도와줄 예정이고.
“마음대로 뛰쳐나오기가 좀 어려워서 연락이 늦었지만, 대공 각하가 잘 돌봐주셨으니 걱정하지 마.”
“카유크는 네가 대공가에서 놀고 온다는 말밖에는 안 했는데…….”
“내가 나중에 직접 말하는 게 나을 거 같아서, 그렇게만 전해달라 한 거야. 미안.”
황제를 알현했다는 사실까지 밝혔다간 두 사람이 기절할지도 모른다.
힐데가르트는 적당히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이 정도로 설명해 두었으면, 나중에 키스케의 수업을 맡을 때 두 사람 다 별말 없겠지.
“그럼 네가 마법사라는 걸 대공 각하도 알고 계시겠구나?”
“응. 어쩌다 보니까 카유크도.”
“언제부터?”
“얼마 안 됐어. 애초에 내가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것도 최근인걸.”
힐데가르트의 말에 미하일의 이마 속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생각보다 미하일에게서 딱딱한 반응이 날아오자, 힐데가르트는 긴장했다.
혹시 마법사라는 말에 겁먹었나?
무작정, 이해해 주겠거니 생각했는데 애들을 너무 만만히 본 건가.
“저기…… 숨겨서 미안. 화난 거 아니지?”
“화 안 났어.”
미하일은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런 일이었다면 더더욱 오빠에게 먼저 말했어야지. 너무 놀랐잖아.”
미하일의 뒤편에 서 있던 레디스가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몹시 상식적인 잔소리라 어깃장을 놓을 수도 없었다.
힐데가르트는 잠자코 혼이 났다.
“너 기다리는 사람 생각은 안 하냐? 한마디 정도는 남겼어야지.”
“진짜 미안. 다음엔 절대 이런 일 없을 거야.”
“말은 잘하지.”
“진짜야. 또 가출 같은 거 안 한다니까?”
힐데가르트가 얌전히 사과했다.
이럴 때는 빠르게 사과하고 분위기를 푸는 게 제일이다.
그녀의 마음이 전해졌는지, 미하일은 솜사탕처럼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를 쓰다듬었다.
“다음부턴 꼭 이야기해 줘야 해?”
“형 좀 적당히 걱정시켜. 저러다 흰머리 생기겠다.”
“어차피 은발이라 티도 안 나니까 괜찮지 않을까?”
“야.”
“농담으로 해본 소리야.”
잔소리는 그렇게 일단락됐다.
다음 날 카유크가 저택으로 찾아올 때까지, 힐데가르트는 늦잠을 잤다.
“그래서? 황제 폐하를 저주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아냈어?”
“…….”
이 녀석은 정말 오자마자 아픈 곳부터 찌르네.
졸고 있던 힐데가르트는 황급히 침을 닦았다.
“너는 아픈 사람 얼굴 보고 하는 소리가 그거야?”
“궁금하잖아. 대체 어느 간 큰 녀석이 오브론도 모자라서 황제 폐하를 저주했는지.”
“목소리 낮춰. 그거 함부로 떠들고 다닐 수 있는 말 아니니까.”
“그래서 알아? 몰라?”
“……몰라.”
힐데가르트는 눈을 비비며 대답했다.
“알았으면 이렇게 가만히 있지는 않지.”
당장 대공과 이야기해서 대비책을 세우든가, 막시밀리언을 앞세워서 한바탕 뒤집어엎었을 테다.
힐데가르트의 대답에 카유크가 실망스러운 얼굴을 했다.
“전혀 몰라? 알아낼 방법이 하나도 없어?”
“지금으로선 그래.”
소년은 낙담한 얼굴로 땅이 꺼지라고 한숨 쉬었다.
소파에 앉은 카유크는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얼마 전 주치의가 실종되었다느니, 이베르타에서 맡긴 수주 건을 확인하느라 허리가 휘겠다느니.
힐데가르트는 그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척 대충 넘겼다. 일일이 맞장구쳐 주자니 한도 끝도 없어서였다.
오브론 대공가를 상대로 저주의 위력을 시험해 본 범인은 대담하게 곧장 황제를 노렸다.
‘로바르네 2황자비가 범인이라고 하기엔, 황궁에 흑마법사의 흔적이나 마력이 전혀 없었지.’
그렇다면 로바르네 2황자비궁 정원에 저주의 제물을 가져다 둘 수 있었던 사람.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본다면, 정원에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을 포섭하거나 매수할 수 있는 사람이 저주를 건 범인이다.
‘범위가 너무 넓어서 문제야. 조금 더 좁혀지면 좋을 텐데.’
사실 딱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긴 했다.
“카유크. 혹시 다른 사람이 저주에 걸렸다는 말은 들어본 적 있어?”
“아니? 그런 소식은 한 번도 못 들어봤는데?”
카유크가 고개를 저었다.
“들었다면 당연히 너한테 먼저 말했지.”
“으음. 실은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기는 해. 그거라도 괜찮으면 알려줄까?”
“뭔데?”
카유크는 바짝 긴장했다.
“황제 폐하와 일리야 공녀는 같은 저주에 걸렸지만, 한 가지 차이점이 있어. 저주 상대를 명확히 지정한 것과 아닌 것. 이 차이거든?”
막시밀리언의 이름이 빼곡하게 쓰여 있던 뱀의 사체.
[나는 막시밀리언 쥬브네스 드롯셀마이어의 완전한 죽음과 필멸을 바란다.]
사체에 쓰여 있는 언어는 완벽한 저주의 문구였다. 일리야 때와는 달리.
“상대를 명확하게 지정한 저주는 실패하면 그만큼 페널티가 생겨.”
“페널티?”
“응. 쉽게 말하자면 저주가 되돌아간달까.”
카유크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혹시 저주를 건 사람이 막 죽거나 그래? 알아서 죽어주려나?”
“그건 아니고.”
“쳇.”
대놓고 실망스러워하긴.
“간단히 말하면 며칠 동안 저주를 받았을 때와 비슷한 증상을 겪게 되는 거야.”
하지만 ‘실패한 저주’를 되돌려 받은 거니 죽음에 이르지는 않는다.
비슷한 증상을 직접 겪을 뿐이다.
“쳇. 쳇. 쳇. 그래서 저주에 걸린 사람 소식을 물어본 거야?”
“응. 만약 비슷한 증상을 겪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그 사람이 범인일 수도 있는데…….”
힐데가르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신문을 흘끗 보았다.
“이미 저주의 시전자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 거야. 그리고 최대한 숨기겠지. 신문에 나지 않도록.”
애초에 사람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이번 일을 꾸몄을지도 모른다.
‘몸을 피하고 있을 수도 있고.’
카유크는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불공평해. 페널티라며? 왜 저주가 되돌아가도 시전자를 죽이지는 못하는 거지?”
“공평하면 그게 저주겠어?”
“그래도!”
“어쨌거나 피부가 검게 물들었거나 며칠 동안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을 찾아봐. 그러면 범인을 찾을지도 몰라.”
운이 좋으면 그 두 가지 증상을 모두 겪고 있는 사람이 있을 터.
“어? 그런데 그런 사람이면 저주에 걸린 피해자랑 어떻게 구별하는데?”
“그건 간단해. 저주를 건 사람이라면 몸에 막시밀리언 황제 폐하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을 거야.”
“아……. 그럼 정말 바로 알아낼 수 있겠네.”
“그렇지. 그래도 쉽진 않을 거야. 분명 몇 겹이나 옷을 껴입은 채 숨기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기를 쓰고 숨기는 이상 찾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단 말이지……. 으흠.”
카유크는 만족할 만큼 정보를 캐냈다고 생각한 건지 히쭉해쭉 웃었다.
뭐 그러라고 알려준 정보기는 했다.
지금쯤 오브론 대공이 나를 대신해서 범인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을 테니까.
일리야 공녀의 저주만으로는 힌트가 턱없이 부족했는데, 잘됐다고 해야 하는 건지…….
“어쨌든 그만 가. 나 피곤해.”
“아직도 몸이 안 좋아?”
“당연하지. 마력도 쓰는 만큼 온몸이 쥐어짜는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지는 거 몰라?”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카유크가 심드렁한 얼굴로 핀잔을 주었다.
“그래도 안색은 많이 좋아졌는데?”
“너 마력 고갈이 뭔지 모르는구나.”
“글쎄,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니깐?”
“고갈된 마력이 다 차기 전까지 보름 내내 설사, 두통, 복통, 치통, 편도염, 중이염, 만성피로, 기관지염, 생리불순, 기타 스물일곱 가지 증상이 일어나는 거야.”
“편히 쉬세요.”
“오냐.”
좀 과장해서 말한 건데 겁부터 집어먹기는.
힐데가르트는 카유크가 안겨준 쿠션을 꼭 껴안은 채 허리를 기댔다.
“아쉽네. 오늘 축하 파티라도 하려 했는데. 몸이 그렇게 안 좋으면 어쩔 수 없이 쉬어야겠네.”
“축하 파티? 무슨 파티?”
“응?”
자리에서 일어나던 카유크가 눈을 끔뻑였다.
“무슨 파티긴. 레디스의 검술 대회 본선 진출 기념 파티지!”
“……아하?”
* * *
“진짜 너무하는 거 아니냐? 어떻게 내가 본선에 진출한 것도 모를 수가 있어?”
“미안. 진짜 미안.”
“수도 구경 핑계로 검술 대회 말할 때부터 알아봤다. 정작 오빠가 나가는 대회는 관심도 없었던 거지?”
“미안해, 정말 미안하다니깐!”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잊고 싶어서 잊은 게 아니다.
진짜 바빴던 건데!
노느라 그런 것도 아니고 바빠서 깜빡했던 건데!
하지만 힐데가르트가 억울해도 별수 없었다.
로빈에 미하일도 모자라 카유크까지 축하 선물을 챙겨왔는데 그녀 혼자 빈손이었기 때문이다.
“수도에 오니까 좋아 죽겠지? 맨날 집에만 있어서 답답했는데 오빠들은 생각도 안 나지?”
레디스는 이때다 싶었는지 힐데가르트의 머리카락을 돌돌 꼬며 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