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키스케는 힐데가르트가 탄 마차가 까만 점으로 변해서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레스 공자님이 보시면 섭섭해하시겠네요.”
“갑자기 무슨 소리야?”
“세상에 키스케 전하의 친구는 나 하나뿐이라고 자랑스럽게 떵떵거리시던 분이잖아요.”
“난 단순무식한 바보랑 친구가 된 기억은 없는데.”
하지만 노바는 그게 진심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레스 공자가 방문할 때면 투덜거리면서도 같이 사냥에 나서는 키스케였으니까.
“저는 찬성입니다, 전하.”
“뭐가.”
“마법을 배우시는 거 말입니다.”
“……생각 없다니까.”
“그런 것치곤 곧바로 싫다는 말이 없으셨잖아요.”
“그냥 놀랐을 뿐이야.”
“정말이요?”
좋고 싫음을 확실하게 나타내는 키스케가 이렇게 모호하게 굴고 있다는 건 이미 어느 정도 마음이 있다는 소리였다.
노바가 키스케를 흘끔 보았다.
‘정말 예상 못 한 일이지만…….’
이런 식으로 독특한 인연이 생길 줄은 몰랐다.
‘어쩌면…….’
노바는 키스케가 그녀를 안아 든 채 황궁으로 뛰어왔던 광경을 다시 떠올렸다.
키스케는 이성에게 관심을 보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애초에 거리낌 없이 남과 친해지는 성격이 아닌 데다, 본인의 위치를 어느 정도 자각하고 있어서였다.
하지만 힐데가르트 공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키스케는 제법 경계심이 누그러들어서, 그 나이대 소년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키스케가 그보다 두 살이나 어린 공녀에게 마법을 배우는 광경을 상상하면 무심코 웃음이 나왔다.
‘좋은 기회일지도 몰라. 계속 이곳에서 로바르네 2황자비와 얼굴을 마주하는 것보다는…….’
노바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좋은 기회가 아닐까요? 제 생각에도 황궁에서 계속 답답하게 지내시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습니다.”
키스케는 이렇다 할 대답 없이 얼굴을 휙 돌려버렸다.
노바는 제 말이 무시당하는 순간조차 웃을 뿐이었다.
* * *
힐데가르트가 떠난 황궁.
막시밀리언은 차가운 시선으로 로바르네를 보고 있었다.
“내가 널 이곳으로 부른 이유를 알고 있느냐?”
“폐하, 아니, 아버님.”
로바르네는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막시밀리언은 평소처럼 인자하게 웃지 않았다.
그는 이미 힐데가르트를 통해, 저주의 매개체와 제물이 황자비궁에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묻겠다. 내게 저주를 건 사람이 너였느냐?”
그녀가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그러곤 울부짖듯 외쳤다.
“절대 아닙니다!”
“그러면 네 정원에서 발견된 저주의 흔적은 무엇이냐?”
“저는 모릅니다, 제가 한 게 아니에요!”
“계속 잡아뗀다면 너는 물론이고 카라딘에게도 좋지 않을 게다.”
로바르네의 얼굴은 아들의 이름이 나오자 하늘이 무너진 사람처럼 일그러졌다.
“사특한 흑마법을 이용해 황제를 해하려 든 일이다.”
“…….”
“만일 이 사건에 네가 얽혀 있다는 게 밝혀진다면, 너는 황제 시해의 죄로 모든 지위를 잃고 사형을 선고받을 수도 있어.”
“폐하…….”
“그런데도 계속 입을 다물겠느냐?”
“…….”
“다시 물으마. 왜 너의 정원에서 저주의 흔적이 발견되었느냐?”
로바르네는 묵묵했다.
“말하지 못하는 건, 지켜야 하는 비밀이 있어서 그러는 게냐?”
황자비의 고운 눈에서는 당장에라도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그러나 막시밀리언은 그 눈빛에 휘둘리지 않았다. 황자비의 무릎과 눈물에는 더 이상 그럴 가치가 없어서였다.
“키스케에게 염산을 던졌던 시녀가 붙잡혀서 자진했을 때도, 너는 무관하다 주장했지.”
“폐하, 그건…….”
“그때에는 너를 믿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구나.”
막시밀리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로바르네 랑케르트 드롯셀마이어. 당분간 랑케르트 공작령으로 돌아갈 것을 명하겠다.”
“폐하!”
“여행을 떠나는 걸로 둘러대도 좋다. 그러나 내가 명하기 전까지는 황궁으로 돌아오지 말아라.”
로바르네의 얼굴이 공포에 질렸다.
그녀가 현실을 부정하듯 마구 고개를 저었다.
“모든 조사가 끝나고 명확해지면 그때 다시 부르겠다. 물론 너에게 죄가 없어야 할 테지.”
“안, 안 됩니다! 폐하, 제발…… 제발 재고해 주세요! 억울합니다! 전 이번 일과 무관합니다, 폐하!”
막시밀리언은 문득, 둘째 아들과 결혼하던 당시의 로바르네를 떠올렸다.
태어난 가문을 지독하게 싫어했던 로바르네였다.
신혼여행조차 랑케르트 공작령이 아니라면 어디든 좋다고 말할 정도였다.
황실의 일원으로서 부족하지 않은 사람이 되겠다며 웃었던 소녀는 어딜 가고, 세월이 흐른 지금은 탐욕에 찬 여인이 서 있었다.
“물러가라.”
“폐하!”
“카라딘을 생각해 이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다!”
그는 축객령을 내렸고, 로바르네는 끝까지 반항했으나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얼마 후, 혼자가 된 방 안에서 막시밀리언은 시종장에게 찾아오라 했던 상자를 조심스레 열었다.
“…….”
상자에는 푸른색 액체가 담긴 유리병이 들어있었다.
키르릇!
막시밀리언의 곁으로 카멜레온이 다가왔다.
“그래, 비비. 이게 무엇인지 너는 알아보겠느냐? 응?”
그가 카멜레온을 쓰다듬었다.
“맞다. 이게 바로 널 살렸던 생명의 엘릭서란다.”
웃음도 잠시뿐.
막시밀리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생명의 엘릭서.
강인한 생명력을 선사하며 수명을 연장해 주는 연금술의 결정체.
이걸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세상을 다 뒤져보아도 연금술사였던 부모를 둔 플람뿐이었다.
막시밀리언은 이 상자를 건네받았던 때를 아직도 기억한다.
별빛 하나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 무슨 수를 쓴 건지 경비병의 눈을 피해 플람이 찾아왔던 그 날을.
‘플람 형? 형! 돌아온 거야?!’
‘오랜만이구나, 막스.’
막시밀리언은 정말 본인이 맞냐며 뛸 듯이 기뻐했다.
하지만.
‘작별 인사를 하러 왔어. 네게 이걸 건네줄 겸.’
플람은 막시밀리언에게 엘릭서가 담긴 상자를 내밀었다.
그의 노란 눈동자는 몰라보게 건조하고 차가운 빛을 띠고 있었다.
‘엘릭서? 갑자기 이건 왜……?’
스승이 죽자 마탑까지 내팽개치더니 흔적을 지우고 사라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재회하자마자 그가 꺼내는 말이란, 기묘하기 짝이 없었다.
‘이건 네게 주마. 스승님이 돌아올 때를 대비하는 거다. 네 수명을 삼십 년 정도 거뜬히 늘려줄 거야.’
‘형, 설마 아직도…….’
‘뒷일은 네게 맡길게. 너라면 믿을 수 있으니까.’
‘형! 스승님은 죽었어. 벌써 삼십 년이 지났다고!’
‘아니, 넌 아무것도 몰라.’
플람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기쁨마저 깃들어 있었다.
막시밀리언은 그런 그를 보며 영문 모를 오싹함을 느꼈다.
‘스승님은 반드시 돌아오실 거다. 직접 맞이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힘들 것 같아.’
그러니 네가 나 대신.
필요하다면 그 엘릭서를 써서라도.
‘꼭 전해다오.’
내가 그분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랐다고.
그렇기에 그 마지막을 후회하고 있노라고.
“…….”
키르릇!
막시밀리언은 카멜레온의 울음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때는 플람이 실성이라도 한 줄 알았다.
하지만 누가 알았겠는가. 아흔일곱이 된 그의 눈앞에 정말로 스승이 돌아올 줄은.
막시밀리언은 아직 어린 키스케와, 스승의 얼굴을 번갈아 떠올리며 한숨 쉬었다.
‘이런 일을 겪을 줄 알았다면, 좀 더 일찍 마셔둘 걸 그랬군.’
그가 유리병의 마개를 뽑았다. 그러곤 망설임 없이 엘릭서를 들이켰다.
효과는 금세 나타났다.
엘릭서를 마시기 무섭게, 온몸에서 열기가 끓어 넘치며 활력이 돌았다.
그가 유리병을 내려놓자 카멜레온이 걱정하듯 울었다.
“괜찮다. 조금 더 오래 살 이유가 생겼으니 말이다.”
막시밀리언이 한참 동안 비비를 쓰다듬었다.
플람은 어떻게 스승의 환생을 알고 있었던 걸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막시밀리언은 작별 인사와 함께 사라진 사람을 떠올렸으나, 새벽은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았다.
* * *
랑베르 거리의 저택으로 돌아온 힐데가르트는 곧 제 머리 위에 벼락이 치리라 예상했다.
그리고 슬픈 예감은 빗나가지 않는다.
“다녀왔어…….”
“힐데.”
“힐데가르트, 너어!”
아니나 다를까, 기다렸다는 듯 미하일과 레디스가 다가왔다.
“힐데. 잠시 할 말이 있으니 여기 와서 앉으렴.”
아이고, 내 팔자야.
이런 반응이 돌아올 거라는 건 예상했지만, 막상 겪게 되니 이마를 세게 치고 싶은 마음뿐이다.
‘안 그래도 가출했던 전적 때문에 마음대로 나돌아다니지 말라고 했으니. 어쩔 수 없나…….’
진상을 모르는 두 사람 눈에는 로베소 거리의 오브론 대공저로 놀러 갔던 여동생이 그대로 드러누워 며칠이나 묵고 온 모습일 터였다.
힐데가르트는 하는 수 없이 소파에 앉았다.
“힐데.”
“으응.”
“오빠 화났어.”
아이구우, 그랬어요?
우리 미하일이가 화가 났어요?
‘그래봤자 화난 강아지 같은 표정이라고 말하면 더 혼내겠지?’
힐데가르트는 미하일의 먹구름 낀 얼굴을 심각한 척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의 집에서 그렇게 오래 자고 오는 거 아니야.”
넵. 그건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아무리 대공 각하께서 허락하셨다지만 무작정 말도 안 하고 외박하면 어떡해. 오빠가 걱정할 건 생각 안 해?”
미하일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화가 나서 외출 금지라고 고함을 치지도 않았다.
“무작정 다른 사람의 호의에 기대는 건 무서운 일이야. 오빠 말 이해하지?”
와, 세상에.
힐데가르트는 상황도 잊고 제 조카손자를 흐뭇하게 볼 뻔했다.
‘우리 미하일이 달라졌어!’
솔베르 백작 부인 사건으로 미하일이 제법 단단해졌다는 게 확실히 느껴졌다.
“힐데?”
“미안해. 잘못했어. 다신 안 그럴게.”
힐데가르트는 감탄하던 것을 그만두고 일단 사과부터 했다.
“사정이 좀 있었어.”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레디스가 뾰족한 말로 그녀를 찔렀다.
“대체 무슨 사정이길래 염치도 잊고 오냐?”
잠깐 잊고 있었다.
레디스가 걱정되면 화부터 내고 보는 사람이라는 거.
“카유크가 괜찮다고 하면 다 괜찮은 거냐? 나서서 사양할 줄도 알았어야지. 놀고먹으니까 몸이 편하고 좋더냐!”
“이의 있소! 놀고먹고 왔다니? 오빠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나는 더 있소! 그러면 네가 수발이라도 들고 왔단 소리야? 대공 각하가 너한테 마루 걸레질을 시키든?”
“두 사람 다 그만.”
미하일이 황소를 떼어놓듯 두 명을 갈라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