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우리 집안은 그렇다 쳐도 도대체 마탑은 어떻게 된 건지.”
푸념에 정신이 없었던 힐데가르트는 막시밀리언의 표정이 차가워진 것까지는 눈치채지 못했다.
“공작가야 레온 오빠 탓이라지만 마탑은 왜 무너진 건지 모르겠어. 혹시 플람 소식 아는 거 없어?”
“……글쎄요.”
막시밀리언이 태연히 답했다.
“자세한 것은 잘 모릅니다. 다만 플람 형이 마탑주 자리를 빠르게 다른 사람에게 넘긴 걸로 압니다.”
“뭐? 왜?!”
“스승님.”
막시밀리언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스승님이 죽고 난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레온 오빠가 광산 팔아서 집안 말아먹고, 마탑 무너지고. 다른 게 더 있단 말이야?”
“그 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
“뭐?”
“스승님께선 마지막 전투에서 플람 형을 구하고 대신 실종되시지 않았습니까.”
막시밀리언의 말투는 평이했으나 이상하게 꾸짖는 것처럼 들리는 소리였다.
“스승님의 죽음은 그냥 거기서 끝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 플람이 날 따라 죽기라도 하겠대?”
“예.”
“뭐라고?!”
힐데가르트는 자기가 물어봐 놓고 더욱 놀랐다.
“플람 형은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스승님이 떠나셨으니까.”
“그건…….”
“도무지 마탑 같은 걸 돌볼 수 있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어요.”
“같은 거, 라니. 너무하잖아.”
그녀가 살짝 서운하다는 듯 말했다.
“마탑은 그나마 내가 플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거였는데.”
“플람 형에게 스승님이 어떤 사람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말까지 들으니 힐데가르트로서도 할 말이 없었다.
‘플람.’
길게 기른 짙은 보라색 머리카락을 질끈 묶고, 언제나 마법에 몰두하던 첫 번째 제자.
제자로 들여서 자식처럼 키운 아이다.
집요함으로는 따라갈 사람이 없어서 무슨 일을 맡겨도 성과가 뛰어난 수재였다.
막시밀리언이 투덜거리고 뺀질거리는 제자였다면, 플람은 쓰러질 때까지 수련에 몰두하는 아이였다.
살짝 신경질적인 구석도 있었지만, 시키면 죽는시늉도 했을 정도로 내 말을 유독 잘 따랐다.
황족이라 토벌전에 나갈 수 없었던 막시밀리언과 달리, 플람은 나와 함께 전장에 나섰다.
그럴 만한 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릴 적 검은 별 교단에 부모를 잃은 플람의 복수심이 내가 짐작했던 것보다 위험했단 점이다.
‘그 정도일 줄은 몰랐었지…….’
그래서 뭐.
어쩌다 보니까, 그 애를 지키다가 내가 대신 휘말려 들었다.
어찌어찌 성검의 힘을 빌려서 봉인에는 성공했지만, 이미 치명상을 입은 터라 그대로 목숨을 잃었고…….
그 뒤는 무덤가에서 눈을 떴다는 이야기다.
‘플람. 막스를 잘 부탁한다.’
‘안 됩니다, 스승님! 가시면 안 됩니다!!’
플람이 황급히 내게 손을 뻗었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게 마지막일 줄은 몰랐는데.
그렇게 허무한 끝을 누가 짐작했을까.
‘나도 몰랐으니 플람은 더더욱 몰랐겠지.’
방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소식을 모른다니 아쉽네. 그냥 궁금했어. 너도 살아 있으니까 혹시 그 애도 살아 있나 싶었지.”
“예.”
힐데가르트가 애써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말을 돌렸다.
“깨어난 지 얼마 안 됐을 땐 그냥 다 원망스럽더라. 집도 망했는데 마탑까지 무너졌다잖아. 무작정 분통이 터지는 거야.”
“……제국 최초의 마탑이었으니까요.”
“내가 아직 전생에 미련이 많은가 봐.”
그녀가 애써 밝게 웃었지만, 막시밀리언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죄송합니다. 스승님의 소중한 가문이며 마탑이 망가져 가는데, 제가 전부 지키지 못해서.”
“무슨 그런 사과를 해.”
힐데가르트가 손을 저었다.
“황제인 네가 어느 한 가문을 특별하게 취급할 수 없었겠지. 널 원망하지 않아.”
누군가가 지켜주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가문이고 마탑이라면, 언젠가는 기어코 무너지는 법이다.
힐데가르트가 씁쓸하게 말했다.
“그냥, 자꾸 아쉬워서 그래. 플람도 그렇고 마탑도 그렇고…….”
천공탑. 그녀가 세웠던 마탑.
힐데가르트는 마법사였던 그녀의 어머니를 떠올릴 때면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꼭 저를 두고 갔어야만 했는지.
그러한 원망이 첫 번째로 생겨나곤 했다.
하지만 두 번째는 그리움이었고, 세 번째는 연민이었다.
마법사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만 더 다정했더라면 그녀는 떠나지 않았을까?
깊은 숲과 드넓은 초원, 그런 장소가 아니라면 마법사들이 살 수 있는 곳은 없는 걸까.
마법사가 제국에 녹아들 만한 기회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세웠던 마탑이었다.
그녀의 그나마 얼마 안 되는 자랑거리였다.
하지만 플람이 겪었을 상실감이나 슬픔을 생각해 본다면 다른 사람에게 마탑주 자리를 넘겼다 해도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 특히나 플람이라면…… 정말 크게 상심했겠지.’
무엇이 얼마만큼 소중한지는, 그 무게는 사람마다 다른 법이다.
한참 뒤 막시밀리언이 말했다.
“……죽었을 겁니다. 살아 있었다면 스승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아카락시아 공작가에서 기다렸을 겁니다. 아시잖아요. 형의 성격.”
막시밀리언의 미소는 사뭇 씁쓸해 보였다.
힐데가르트도 다 안다는 듯 웃고 싶었지만, 잘 안 됐다.
“마탑주는 그간 여러 번 바뀌었던 걸로 압니다. 마지막으로 연락받았을 때는 몬테를로 공작가 쪽 사람이 물려받았다고 들었고요.”
“몬테를로라니. 어쩌다 거기까지 간 건지.”
힐데가르트가 애써 밝게 말했다.
“알겠어. 나머지는 나중에 내가 알아봐야지 뭐.”
아쉽지만 현재로서는 플람의 흔적을 찾는 건 포기해야 할 듯싶었다.
힐데가르트가 체념하자, 막시밀리언은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앞으로는 어떻게 지내실 생각이십니까?”
“잘 모르겠어. 예전이랑 다를 건 없을 것 같은데.”
“그 말씀은…….”
“가문이랑 제자나 돌보면서 살아야지.”
“…….”
“내가 잘하는 건 그것밖에 없으니까.”
이번 생이라고 다를 게 있을까.
‘그것밖엔 없어.’
할 일은 턱 끝까지 쌓여 있다.
코앞에 닥친 일이 가장 중요하며, 뒤돌아볼 시간은 없다.
미하일의 작위 계승식을 생각하면 하루라도 빨리 아카락시아 공작가의 옛 영화를 되찾아야 했다.
로열 가드가 되고 싶다는 레디스도 마저 돌봐주어야 하고.
레온하르트 오빠와 미카엘리스의 무덤도 제대로 못 가봤다.
성검도 어떻게 됐는지 신경 쓰이니 좀 알아보고, 마성신은……. 뭐, 거기까진 내가 신경 안 써도 되겠지?
플람이 어떻게 살았는지도 알아보고, 막시밀리언을 어느 발칙한 녀석이 저주했는지도 챙겨야 하고.
“물론 그것도 중요하겠습니다만.”
막시밀리언이 사뭇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스승님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은 잊으시면 안 됩니다.”
“뭐?”
“가문이나 제자보다 스승님 자신을 돌보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힐데가르트가 피식 웃었다.
“내가 남부터 챙기고 볼 위인이라고 생각하니? 나는 충분히 나를 잘 돌보고 있다.”
“지금 제 눈앞에는 80년 만에 만나자마자 제자 때문에 마력 고갈로 앓고 계신 스승님이 계십니다.”
무지개의 아카락시아, 아름다운 힐데가르트.
눈부신 공녀의 삶은 언제나 환한 촛불처럼 공작가를 위해 타올랐다.
그러나 불꽃이 환할수록 촛불은 빠르게 녹는 법.
그녀도, 그녀의 삶도 순식간에 흐무러지며 사라져 버렸다.
막시밀리언은 조금 서글픈 눈으로, 여전히 스물네 살 때의 삶을 이어서 살겠다는 듯 말하는 스승을 보았다.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가문이나 제자보다도 스승님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렇게 살지 않으셔도 됩니다.”
“막스.”
“저도, 레온하르트 공작도…… 그 사실을 빨리 깨달았어야 했다고 후회했던 80년이었습니다.”
그리고 플람 형도 말입니다.
마지막 한마디는 끝내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 * *
힐데가르트는 차분한 걸음으로 궁에서 나왔다.
막시밀리언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한 사람에게 쓸 수 있는 황제의 시간이란 한정된 법이었다.
시답잖은 소리 하지 말고 또다시 저주에 당하지 않도록 예비하라며 잔소리를 하고 난 뒤에는 다음에 이야기하자며 우선 자리를 파했다.
‘왜 그런 소릴 하고 그래. 괜히 신경 쓰이게.’
애초에 플람 이야기를 꺼낸 게 잘못이었나?
살짝 한숨이 새어 나왔다.
‘슬슬 돌아가자. 너무 지체했어.’
마차를 불러 달라고 말한 뒤 저택으로 돌아가려던 채비를 할 때였다.
“힐데가르트 공녀님.”
“노바, 키스케.”
바깥에서 마차를 기다리고 있었던 그녀에게 두 사람이 다가왔다.
“알현은 무사히 끝나셨습니까?”
“응. 이제 돌아가려고.”
“벌써요?”
“벌써가 아니지. 가족한테 말도 없이 사흘 넘게 외박했는걸.”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아쉽습니다. 벌써 돌아가시다니.”
노바의 눈꼬리가 축 처졌다.
“너무 실망하지 마. 조만간 다시 볼 수 있을 거야.”
키스케가 할아버지의 말을 무시하지 않는다면야, 다시 볼 수밖에 없겠지.
힐데가르트는 친히 제자 예정 1호에게 미소 지었다.
“마중 나와줘서 고마워, 키스케.”
“……딱히. 마중 나온 거 아닌데.”
키스케는 고개를 까딱이기만 했다.
“알현이 엄청나게 길어지길래 궁금해서 와본 것뿐이야.”
“좀 오래 걸리긴 했지? 마침 잘됐다. 이거 돌려줄게.”
그녀가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빌려줘서 고마웠어. 또 여러 가지로 신세 지고 가네.”
“…….”
키스케는 손수건을 받아 들었다.
상대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그로서는 이게 마지막 만남처럼 느껴져서 섭섭한 기분도 들었다.
“……이대로 아카락시아 공작령으로 돌아가는 건가?”
“응? 아니, 당분간은 수도에 있을 거야. 오빠가 스칼렛 스워드에 참가하거든.”
“아! 검술 대회 때문에 올라오셨던 거군요?”
“맞아.”
“그럼 다시 뵐 수 있을까요?”
노바가 기대감 섞인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물론이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와, 진심으로 환영할게.”
“어디서 머무시고 계세요?”
“랑베르 거리의 오브론 대공가 저택이야. 지금은 그쪽에서 신세를 지고 있어.”
“찾아갈 일 없으니 나는 미리 인사하지.”
키스케가 차갑게 대답했다.
힐데가르트의 눈에 심술이 스친 건 그때였다.
“찾아올 일, 있을 것 같은데? 폐하께서 네게 마법을 가르치고 싶다고 하셨거든.”
“뭐?”
“예?!”
두 사람이 눈을 크게 떴다.
“폐하께서? 너한테 마법을?”
“그것 때문에 알현이 길어지셨던 거군요?”
“으음, 그렇다고 해둘게.”
황궁 마차가 도착했다. 슬슬 떠날 시간이었다.
“자세한 건 폐하께 여쭤봐. 그럼 또 만나자?”
폭탄 발언을 던진 그녀가 마차에 올랐다.
“아, 잠깐……!”
혼란에 빠져 있던 키스케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힐데가르트를 태운 마차가 천천히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