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Chapter 05. 우주가 넓은 자는 외롭지 않다
“아직도 이야기가 안 끝나셨단 말이야?”
키스케는 황당하다는 듯 시종장을 바라보았다.
점심 식사를 마칠 때까지도 알현이 끝나지 않았다고 해서 노바와 검술 수련을 하고 온 터였다.
그런데 아직도 이야기를 나누고 계신다고?
“아직 병상에서 일어나신 지도 얼마 안 되었는데, 너무 무리하시지 말라고 전했어야지.”
“저희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방해하지 말라는 꾸짖음만 돌아온 터라, 더는 시종장도 안쪽을 살필 수 없었다.
“아무래도 폐하께서는 공녀님과 할 이야기가 많으신 듯합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시지요.”
그런 말까지 들으니 하는 수 없었다.
키스케는 굳게 닫힌 문을 복잡한 눈으로 바라본 뒤 한숨 쉬었다.
* * *
그 시각, 힐데가르트와 막시밀리언은 그간의 회포를 푸느라 정신이 없었다.
힐데가르트는 눈물의 사제 상봉 이후 자신이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설명했다.
중간중간 시종장이나 다른 이들이 들어오는 바람에 하려던 말을 한 번씩 멈춰야 했다.
아무도 듣지 못하게 내실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할 이야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세상일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네가 황제라니.”
“저도 그렇게 생각했지요.”
“대체 어쩌다 그렇게 된 거야? 선대께서 네게 황위를 물려주셨을 린 없고. 너 반역했니?”
“너무하십니다. 제가 얼마나 건전하게 살아왔는데요?”
막시밀리언이 투덜거렸다.
“말하자면 깁니다. 둘째 누님께선 산욕열을 앓다가 돌아가셨고, 셋째 형님께서는 승마 중에 변고를 당하셨습니다.”
“세상에. 황태자 전하께서는?”
“치정 싸움으로 칼을 맞아서…….”
“못 들은 걸로 할게.”
힐데가르트는 질려버린 얼굴로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네가 고생이 많았겠구나.”
“이제는 괜찮습니다.”
감히 일국의 황제에게 노고를 위로하는 말이라니. 그녀가 아니라면 누구도 못 할 말이었다.
“한때는 검은 별 교단의 저주라는 말로 떠들썩했지요. 덕분에 신전이 얼마나 망신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수도로 올라올 때 봤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콧대 높더니, 꼴이 말이 아니던데.”
“스승님께서 마성신을 봉인하면 검은 별 교단도 맥을 못 출 거라고 떠벌리지 않았습니까. 큰코다쳤죠.”
“쯧쯧쯧, 그러니까 허풍도 적당히 칠 것이지. 교단 핑계로 세력을 불리니 역풍을 맞는 거 아니겠어.”
“그래도 아직 신교의 역할은 다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수도원에서 신전 사제들이 하던 일을 나눠 받고 있지요.”
“이베르타가 앓는 소리깨나 했겠구나. 거기 물난리는 여전하다니?”
“여전합니다.”
한번 이야기가 시작되니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그 후로도 막시밀리언은 그간의 세월을 어떻게 보냈는지 이야기하다가 감정이 복받쳐 올랐는지, 그렁그렁해진 눈물을 닦아냈다.
“이렇게 다시 뵙다니. 꿈을 꾸는 것 같네요.”
“울지 마라. 너 나이 먹으니까 눈물만 늘어났구나.”
“스승님도 늙어보시면 압니다.”
“그게 죽었다 살아난 사람한테 할 말이니? 어서 눈물 그쳐.”
힐데가르트가 웃으며 손수건을 건넸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손수건 키스케 거였지. 돌려주는 걸 잊었네.’
막시밀리언이 가볍게 사양하자, 그녀가 다시 품속으로 손수건을 집어넣었다.
“그러고 보니 네 손자를 만났어.”
“키스케를요?”
“응. 널 할아버지로 둔 것치고는 너무 잘 컸던데?”
힐데가르트가 농을 걸자, 막시밀리언이 뿌듯한 얼굴을 했다.
“그렇지요? 강퍅한 구석도 있지만 기특한 녀석입니다. 재주가 뛰어나서 무엇이든 배우면 금방 익혀요. 그래서 너무 빨리 그만두는 게 흠이긴 하지만요.”
나이를 먹으면 자식 자랑하는 재미가 있다더니.
막시밀리언은 그야말로 속사포로 ‘우리 애가 착하고 착한 다음 착합니다’라는 말을 다섯쯤 반복했다.
“한 번도 속을 썩인 적은 없습니다. 요전에는…….”
“그러고 보니 막스.”
“네?”
“그 착한 손자가 마력을 지니고 태어났더라.”
“키스케가 말입니까?!”
“응.”
힐데가르트가 소리 없이 웃었다.
“네 저주를 풀 때 알게 된 건데, 마법에 재능이 있어.”
힐데가르트는 막시밀리언의 저주를 풀었던 당시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손주가 마력을 타고났다는 말에 막시밀리언이 입을 떡 벌렸다.
“그럼 키스케에게 마법을 가르쳐 주시지요!”
“응?”
키스케의 매몰찬 대답을 생각해 보면 이건 살짝 의외다.
“괜찮은 거야? 요즘은 전보다 더 심하게 마법사를 꺼리던데?”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마법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나 그걸 꺼리는 거지요.”
막시밀리언이 딱 잘라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카라딘도 부탁드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카라딘? 그건 누구니?”
“제 둘째 손주입니다.”
“그래? 다음에 한 번 소개 줘.”
“예, 반드시 그러겠습니다. 세상에, 키스케가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니!”
막시밀리언이 실실 웃었다.
“안 그래도 무얼 가르쳐도 재미있다, 없다, 말을 안 하는 녀석이라. 얼마나 속이 썩는지…….”
“아까 전엔 속 썩이는 일 없다며.”
“스승님도 자식 낳고 손주 생겨보십시오. 눈에 넣어도 안 아픈데 가끔은 아파집니다.”
“어휴. 뭐라는 거야.”
힐데가르트는 무심코 웃고 말았다.
자식은 없지만, 비슷한 아이들은 있으니,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 것 같았다.
“괜찮으시면 키스케를 공작령으로 데리고 가주시지 않겠습니까?”
“그건 상관없다만……. 왜? 옆에 끼고 살지 않고.”
“키스케가 너무 황궁에서만 답답하게 지내고 있어서 말입니다. 꼭 예전의 저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안 좋습니다.”
막시밀리언이 웃으며 말했다.
“아들 녀석이 살아 있다면 달랐을 텐데…….”
“아들놈? 그러고 보니 키스케가 벌써 황위 계승자로 여겨지던데.”
“제 아들이 사고로 일찍 죽은 탓입니다.”
힐데가르트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막시밀리언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이젠 괜찮습니다. 키스케만 남겨진 게…… 마음 아픈 일이지요.”
“미안해. 내가 안 좋은 이야기를 꺼내서.”
힐데가르트는 설마 그런 속사정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모르셨을 만한 일이니까요.”
“그치만…… 그러면 더더욱 옆에서 데리고 있는 게 낫지 않니?”
막시밀리언이 고개를 저었다.
“황궁에서만 지내는 게 무조건 좋은 일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어째서?”
“몇 년 전 키스케가 납치될 뻔한 적이 있어서요.”
“납치? 황궁에서?”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시녀 한 명이 염산을 뿌리겠다며 협박해서 마차에 태웠는데, 가까스로 탈출했지요.”
힐데가르트는 하마터면 찻잔을 엎을 뻔했다.
“미쳤어? 그 어린애한테 염산?”
“지금은 호위 기사를 데리고 다닙니다만……. 한동안 사람을 향한 경계심이 말도 못 하게 심했습니다.”
그럴 만도 했다.
‘그러고 보니 온실에서도 내게 다짜고짜 칼부터 들이댔지.’
어릴 적부터 그런 일을 겪으면 제대로 된 교우 관계를 맺기 힘들 것이다.
애초에 다른 사람과 진실한 마음을 나누기 어려운 신분으로 태어났으니.
“그런 사정이 있는 줄은 몰랐어. 너도 이래저래 걱정이 많았겠구나.”
막시밀리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바쁘다 보니 키스케를 만사 제치고 돌보아주기가 어려웠는데, 스승님께서 키스케를 가르쳐 주신다면 제 마음이 편안할 것 같습니다.”
“너 편하라고 가르치겠다는 거 아니다?”
“압니다. 다만.”
황제의 한숨은 짧았다.
“높은 산 정상에는 따가운 햇볕을 막아줄 그림자가 없더군요.”
“…….”
“외롭다는 겁니다. 황제의 자리라는 게.”
“막스.”
처음이었다. 막시밀리언이 꼭 그 나이대의 노인처럼 노쇠해 보인 건.
“그 아이를 계속 이런 곳에서 지내게 한다면 평생 외롭게 살게 하는 건 아닐까 싶어 걱정입니다.”
키스케는 너무 일찍부터 황위에 대한 압박을 받아, 마음을 터놓을 친구가 별로 없었다.
황궁도 답답해하니 차라리 공작령에서라도 마음 편히 지내기를 바랄 뿐이었다.
인생은 길다.
따라오는 외로움 또한 짧지 않다.
좋은 황제가 되는 것만큼이나,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 한 명을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어느새 힐데가르트보다도 훨씬 오랫동안 살게 된 막시밀리언이기에 할 수 있는 걱정이었다.
힐데가르트는 조금 지친 안색을 한 제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것 말고도 여러모로 걱정되는 게 많아서…… 잠깐, 황제를 강아지처럼 쓰다듬으시면 어떡합니까.”
“뭐 어떠니? 너나 키스케나 내겐 다 귀여운 강아지 같은데.”
힐데가르트는 일부러 싱글벙글 웃었다.
“무슨 소리인지 알겠어. 우리 막스는 손자가 걱정이라 엉엉 울고 싶다 그거지.”
“엉엉 울고 싶은 수준까진 아닌데…….”
막시밀리언이 히죽 웃었다.
“황제니까요. 항상 그 아이를 최우선으로 하지 못하는 게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녀가 막시밀리언을 마구 쓰다듬었다.
“내가 조금 더 일찍 돌아왔다면 네가 힘들 때 도움이 될 수 있었을 텐데. 미안하구나.”
“예? 그걸 왜 스승님께서 미안해하십니까?”
막시밀리언이 허겁지겁 고개를 젓더니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는 스승님이 돌아오신 것만으로도 정말 기쁩니다.”
막시밀리언은 그렇게 들뜬 나머지 기어코 해서는 안 될 말까지 입에 담고 말았다.
“키스케 녀석을 꼭 좀 데려가서 아주 호되게 가르쳐 주시지요!”
“진심이니?”
“그럼요!”
“그렇게 말한다면야, 나도 마음 놓고 가르칠 수 있지.”
힐데가르트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번졌다.
“필요한 게 있다면 얼마든지 말씀해 주시지요. 전부 준비하겠습니다.”
“사양 안 할게.”
그 후로도 두 사람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힐데가르트가 허브티를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그런데 말야, 막스.”
“네, 스승님.”
“혹시 플람의 소식은 알고 있니?”
“…….”
그 순간 막시밀리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