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난처한 상황에 놓인 힐데가르트는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황궁에서 저주를 푸느라 바쁘다는 말까지 곧이곧대로 한 건 아니겠지?
다행히 카유크는 마음을 읽은 사람처럼 그녀를 안심시켰다.
“적당히 둘러댔어. 키스케 전하께서 네 가족에게 연락해야 할 거 같다면서 대공가에 연락을 넣으셨거든.”
힐데가르트가 키스케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가 머쓱하다는 듯 시선을 피했다.
카유크는 굉장한 선심을 쓴다는 듯 가슴을 쭉 펴고 말했다.
“이번 한 번만! 일리야랑 노느라 정신없다고 둘러댔어. 넌 쭉 로베소 대공저에서 놀고 있는 걸로 알 거야.”
“……고마워.”
“별말씀을. 그나저나 너 진짜 안색이 안 좋네.”
“의원들이 말하기를, 하루는 더 푹 쉬셔야 한답니다.”
“고마워요…… 가 아니라, 고마워.”
그녀가 노바에게 어색하게 인사했다.
냉큼 의자에 앉은 카유크는 그래서 어떻게 된 일이냐며 물었다.
하지만 모든 걸 카유크에게 설명할 수는 없었기에, 그녀가 가볍게 둘러댔다.
“그냥 고생한 거지 뭐. 생각보다 저주가 너무 끈질겼거든.”
“일리야 때보다 고생했나 보지?”
“말도 마. 마력을 얼마나 많이 썼는데.”
“지금은? 이제 다 끝난 거야?”
“응.”
그녀가 키스케를 흘끗 보았다.
키스케는 방 안에 들어온 이후 줄곧 말 한마디 없었다.
그저 묵묵하게 팔짱을 낀 채 내 쪽을 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것저것 궁금한 게 많았던 힐데가르트는 내심 카유크가 적당히 묻고 빨리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너 지금 내가 가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지.”
“눈치 빠르구나, 카유크.”
“부정 좀 해라.”
카유크는 어이없다는 듯 눈총을 보냈으나, 툴툴거리면서도 의자를 뒤로 끌며 일어났다.
“갈 테니까 푹 쉬어라. 너 안색이 안 좋아도 너무 안 좋아.”
그 정도란 말이야?
힐데가르트가 제 뺨을 슬슬 매만졌다.
“……정말 고마운데, 덕분에 돌아가면 두 배로 혼나겠네.”
“그건 어쩔 수 없다고 본다. 나중에 보자.”
카유크가 인사하자, 내내 조용히 있었던 키스케가 노바에게 넌지시 말했다.
“노바. 카유크 공자를 배웅해 드려.”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공녀님. 푹 쉬세요.”
“응.”
카유크와 노바는 그녀에게 한 번씩 얼굴도장을 찍은 다음, 그 자리를 떠났다.
문이 닫히자, 키스케는 조금 전까지 카유크가 앉아 있던 자리로 다가갔다.
의자에 앉은 그가 힐데가르트의 안색을 살폈다.
힐데가르트는 쓰러지기 직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기억해 내느라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였다.
‘……안색이 아직도 안 좋아.’
힐데가르트의 안색은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저주를 풀어낸 직후, 그녀는 막시밀리언의 손을 잡은 채 키스케의 품 안으로 쓰러졌다.
키스케는 그때 처음으로 사람이 파랗게 질린 상태에서도 열이 펄펄 끓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왜 그렇게 될 때까지 무리했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물어본다 해도 그녀는 전과 똑같은 대답을 할 것 같았다.
‘내가 사람을 살릴 수 있어. 너를 도울 수 있다고. 그럼 어느 쪽이 더 중요하겠어?’
키스케는 그녀가 정말 이상한 마법사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마법사란 신기한 힘을 다루는 음침한 괴짜들에 지나지 않았다.
제국사를 공부할 때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드롯셀마이어 제국이 세워질 당시, 마법사의 기원은 엘프였다.
뾰족한 귀와 맑은 눈동자를 지닌 요정족.
그들은 숲의 주인으로서 동식물과 교감하며 막대한 마력을 다루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터전으로 삼을 만한 숲이 점차 사라지자, 엘프족도 뿔뿔이 흩어졌다.
여전히 더 깊은 숲을 찾아서 들어간 엘프도 있었고, 비브롯셀 왕국으로 흘러간 엘프도 있었고, 유목민이 되어 초원을 떠도는 엘프도 있었다.
그렇게 엘프의 피가 인간 사회에 섞이며 나타난 게 마법사라 배웠다.
그런데 놀랍게도 힐데가르트는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녀는 무려 다섯 별 공작가의 공녀였다.
드넓은 초원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도 아니고, 깊은 숲속에서 자신을 감추면서 사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키스케와 다른 세계에서 사는 것 같았다.
‘너는 대체 뭘까.’
물어보면 대답해 줄까.
신경 쓰이는 점은 또 있었다.
‘힐데가르트 스승님……?’
그녀가 쓰러지기 직전.
동시에 할아버지가 눈을 뜬 직후.
키스케는 분명히 들었다. 그 알 수 없는 한마디를.
스승님이라니?
잠시 정신이 혼란스러운 할아버지가 아무렇게나 한 말이라기에는, 아무래도 마음이 쓰였다.
그건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키스케는 어두운 방 안에서 한참이나 그녀를 보았다.
새벽녘에 내린 눈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은발, 고양이처럼 살짝 올라간 눈매.
달빛에 따라 푸른색이기도 하고 보라색이기도 한 그 눈동자가 그럭저럭 예뻤다.
‘그럭저럭 예뻐 보이는 건 밤에 보니까 그런 걸 거야.’
키스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여태껏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그렇게 침묵이 계속 이어졌다가.
“저기…….”
“저기…….”
지독한 우연으로,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어……. 키스케 네가 먼저 말해.”
“아니야. 너 먼저 말해도 돼.”
“괜찮은데…….”
“됐어. 난 별거 아니니까.”
키스케가 고개를 까딱였다.
실속 없는 실랑이는 질색이었다.
힐데가르트는 그렇다면야, 하고 입을 열었다.
“별건 아니고. 내가 쓰러진 뒤엔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서.”
힐데가르트가 물었다.
“막…… 아니, 폐하의 저주는 풀린 거지? 내가 쓰러진 뒤엔 어떻게 됐어?”
“그거라면…….”
키스케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걱정할 필요 없어. 네 덕분에 저주는 무사히 풀렸으니까. 혹시 기억 안 나?”
“다 기억이 안 나는 건 아니야. 이 빠진 것처럼 드문드문 기억이 나서 그래.”
힐데가르트가 제 뺨을 쓸었다.
마력 고갈로 정신을 잃고 있었을 때는 당연히 기억이 나질 않고…….
그래도 막시밀리언이 제 이름을 불렀던 순간.
그거 하나만큼은 그녀 또한 확실히 기억한다.
‘아마 착각이었겠지만.’
전생과 비교하면 현생의 이목구비는 제법 도도한 인상이다.
얼굴만 따지고 보면 누가 봐도 확연히 차이가 나서, 다른 사람이라고 구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카락시아 공작가 특유의 은발과 청보라색 눈동자는 여전했다.
막시밀리언이 착각한 건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상식적으로 저주에서 막 깨어난 애가 나를 어떻게 알아봤겠어.’
그런 사람이 있었지, 라고 기억하고 있으면 다행이었다.
나한테는 어제 헤어진 제자였지만, 막스에게는 오래전에 죽고 없어진 사람일 텐데.
그녀가 씁쓸하게 웃었다.
안녕했니, 막시밀리언. 나야. 스승님이야.
그래, 맞아. 환생했어.
깜짝 놀랐지? 저주도 내가 풀었는데 감동이지?
‘미친 사람 취급받기 딱 좋겠네.’
그게 현실이었다.
황제로서 치열하게 자기 인생을 꾸려왔을 막시밀리언이다.
수십 년 전 스승이 환생했다며 터무니없는 말을 해봤자 정신 나간 여자 취급만 받을 테다.
‘기대하지 말자니까는. 왜 자꾸 이러나 몰라.’
그녀가 속마음을 추슬렀다.
“어쨌든 괜찮아졌다는 거네? 내가 안심해도 되는 거고?”
“그래. 안 그래도 오늘 아침부터 다른 곳에 이상은 없으신지 확인하느라 바빴어.”
결과는 더없이 건강하다는 판정이었다.
체온이나 맥박도 정상이었고, 피부를 뒤덮었던 검은 흔적도 전부 사라졌다.
황궁 의원 모두 귀신에게 홀린 것 같다며 제 뺨을 찰싹찰싹 치고 난리가 아니었다.
“정말 다행이다…….”
늦지 않았구나.
힐데가르트는 휴, 하고 심호흡을 했다.
나이를 먹은 제자가 자칫 이번 일로 잘못되면 어쩌나, 가슴을 졸였는데.
그녀의 표정이 풀어졌다.
“할아버지는 이제 괜찮아. 고맙다, 이상한 마법사.”
“이상하다는 수식어는 빼 줘.”
“감사하지, 공녀.”
“그래. 그쪽이 좀 더 듣기 좋네.”
키스케가 피식 웃자 힐데가르트도 따라서 웃어버렸다.
“그럼 이제 네 차례네. 키스케 넌 무슨 말을 하려 했는데?”
“…….”
키스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하고 싶은 말, 물어보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고를 수가 없었다.
몸은 좀 괜찮아? 너 열이 엄청 심했었어.
마법은 어디에서 배운 거야? 공녀인 네가 어떻게 마법을 배울 수 있었지?
할아버지와는 무슨 관계야?
나는 분명히 들었어. 할아버지가 네 이름을 불렀잖아.
궁금한 건 그것뿐만이 아니야.
너 분명히 온실에서 나와 만났을 때, 그때부터 할아버지를 알고 있었던 거지?
애초에 그때부터 묻고 싶었어.
왜 울 것 같은 얼굴로 웃었어?
힐데가르트 아카락시아.
너는 누구야?
“……황제 폐하께서.”
키스케는 하고 싶은 말을 가슴속에 묻었다.
묻었으면 당연히 썩어서 없어져야 하는 물음들인데 이상하게 앞으로도 계속 반짝이며 남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를 만나고 싶어 하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