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콰지직!
커다란 소리가 나더니 검은 뱀의 비늘이 뜯겨나갔다.
‘됐어! 제대로 찌르기만 하면……!’
한 번만 더 하면 된다.
하지만 힐데가르트의 팔이 석상처럼 굳어서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돌처럼 굳은 손은 검 손잡이를 제대로 잡기조차 쉽지 않았다.
‘읏……!’
그녀의 표정에 고통이 번졌다.
그동안에도 침대에서는 막시밀리언이 헐떡이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마지막 생명의 불씨가 완벽하게 꺼지는 소리.
힐데가르트는 그런 숨소리를 뱉어본 적 있었다. 바로 그녀가 죽어가던 때였다.
‘안 돼!’
힐데가르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녀는 손아귀에 억지로 힘을 주며 검 손잡이를 감아쥐었다.
미끄러지는 검을 다시 한번 뱀의 몸통에 박아 넣었다.
하지만 힐데가르트가 애를 쓸수록 뱀은 세차게 온몸을 뒤흔들었고, 막시밀리언은 더욱 밭은 숨을 내뱉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재빠르게 다가온 키스케가 손을 뻗었다.
“이걸 찌르면 되는 거야?”
키스케가 그녀를 뒤에서부터 감싸 안았다. 그러고는 검의 손잡이를 함께 잡았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칼날 위에 푸른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마력……?’
힐데가르트는 깜짝 놀랐다.
뱀이 고통스러운 듯 요동치자, 그녀가 숨을 삼키며 외쳤다.
“키스케! 내 손 놓지 마!”
두 사람의 손이 하나로 포개졌다.
‘아.’
이렇게 손을 잡고 있으니 알겠다.
아주 희미하지만, 살짝 시리고 차가운 느낌.
키스케가 지닌 마력이다.
힐데가르트의 손에서 나온 붉은빛과 푸른빛이 한데 섞이더니 단검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침내 팔목에 감아둔 애뮬릿이 파삭, 하고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검은 뱀은 모래처럼 흘러내리며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키이이이익! 키엑! 케에엑!
뱀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두 사람은 끝까지 버티며 칼날을 세운 채 이를 악물었다.
뱀이 마지막으로 격렬하게 발광할 때까지.
사아아아아악!
마침내 단말마를 내뱉은 뱀이 축 늘어졌다.
저주의 기운은 낙엽처럼 바스러지더니,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 * *
황제 막시밀리언은 꿈을 꾸고 있었다.
그의 등 뒤에는 금과 옥으로 만든 황좌가 있었고, 발밑에는 금색 실로 엮은 주단이 깔려 있었다.
붉은 비단 위를 따라 나가면 금방 황궁 밖이건만.
언제부턴가 막시밀리언은 저곳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열넷, 열다섯 무렵에는 그토록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던 궁전이 이젠 감옥 같았다.
황좌를 물려주지 않는 한 이곳을 벗어날 길은 요원해 보였다.
그런데 황위를 물려줘야 하는 아들이 그보다 먼저 붉은 비단길 위에 섰다.
‘아버지.’
‘폐하. 키스케를 잘 부탁드려요.’
황태자였던 아들 내외였다.
부부는 사이좋게 손을 잡은 채,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그들이 멀어졌다.
막시밀리언은 둘에게 가지 말라며 애원하기도 했고, 명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라진 이들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어서 역병으로 세상을 떠난 또 한 명의 아들이 멀리서 인사했다.
‘아버지. 로바르네와 카라딘을 잘 부탁드립니다.’
막시밀리언은 아들을 붙잡기 위해 일어섰으나 꿈쩍도 할 수 없었다.
노쇠한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폐하를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드롯셀마이어에 영광을.’
기사단장, 대장군.
‘잘 지내요, 막스.’
그의 현명한 아내이자 제국의 황후마저 모두 사라졌다.
어느새 황궁은 텅 비었다.
황제의 삶이란 하루하루가 거센 파도를 맞는 것과 비슷했다.
자리만 지키려 하면 어느새 물살에 휩쓸려 저만치 멀리 떠밀려갔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발장구를 쳐야 간신히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죽을 만큼 노력하면 아주 조금 앞서갈 수 있었다.
늙어간다는 건 갈수록 외로워지는 일이었다.
“……아무도 없는 건가……?”
막시밀리언은 나무껍질처럼 쪼글쪼글해진 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그러자 어디선가 검은 뱀 한 마리가 스멀스멀 기어서 다가오더니, 그의 몸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뱀은 눈 깜짝할 새에 막시밀리언의 몸을 휘감더니 숨통을 조였다.
꺽꺽거리던 막시밀리언은 어느새 붉은 비단 위에서 저를 바라보는 사람에게 손을 뻗었다.
“형……. 플람 형…….”
한때 같은 스승 아래에서 배우고 자란 사형.
힐데가르트의 첫 번째 제자, 플람이었다.
플람의 옷차림새는 힐데가르트와 함께 마성신을 봉인하러 떠났던 모습 그대로였다.
막시밀리언은 꼭 그가 떠나던 때처럼 간절히 애원했다.
형. 플람 형.
“형, 나 좀 도와줘. 나…….”
플람은 차갑고 쌀쌀맞은 성미였지만 그래서 따뜻한 사람을 외면하지 못했다.
생짜를 부리던 저에게 끝내 생명의 엘릭서를 만들어주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플람의 모습은 어딘가 이상했다.
‘스승님은 죽지 않았어.’
시뻘겋게 핏발 선 눈은 툭 튀어나와 있었고, 동공은 쉴 새 없이 흔들렸다. 깔끔했던 머리도 산발이었다.
‘죽은 게 아니야. 실종된 것뿐이야. 그렇지?’
귀기 어린 목소리가 음산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반드시.’
반드시, 반드시, 반드시, 반드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스승님을 다시 데려올 거야.’
플람이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데려와야 해. 내가…….’
형.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제발 인정해. 스승님은 죽었어.
형의 마음은 이해해. 나도 스승님이 보고 싶어.
하지만 형까지 없어지면 나는 어떡하라고.
가지 마. 스승님이 남겨주신 마탑도 돌봐야 하잖아. 나 혼자서는 역부족이야. 나만 남겨두고 가지 마.
막시밀리언이 헐떡이며 그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세차게 목이 졸렸다.
‘내가 그분을 데려올게, 막스.’
플람은 끝까지 그를 무시했다.
그리고 등을 돌려 사라져 버렸다.
“꺼억…… 헉…… 어억…….”
막시밀리언을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남겨진 그는 꼴딱꼴딱 숨만 삼켰다.
얼마나 더 이렇게 버티고 고통스러워해야 하는 걸까?
이렇게 힘들면 차라리…….
막시밀리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거대한 뱀이 아가리를 벌렸다.
검은 뱀이 그의 목덜미에 거대한 송곳니를 박아넣으려고 하던 그 순간.
사아아아아악!
갑자기 어마어마한 힘으로 저를 목 조르던 검은 뱀이 순식간에 사라지더니, 한결 숨 쉬는 게 편해졌다.
“막스!”
익숙한 목소리가 그에게 호통쳤다.
“정신 차려, 막스!”
막시밀리언은 저도 모르게 폐부에 맑은 공기를 집어넣으며 크게 호흡했다.
“컥, 커헉……!”
그는 이 목소리가 누구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황제가 된 그를 막스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이뿐이었으니.
고른 숨을 되찾은 황제의 눈꺼풀이 서서히 열렸다.
막시밀리언의 피부색은 천천히 원래대로 돌아왔다.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헐떡이던 그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조막만 한 이목구비와 하얗고 작은 손.
청보라색 눈동자와 투명한 은발까지.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막시밀리언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말했다.
“힐데가르트 스승님……?”
‘스승님은 죽지 않았어.’
‘내가 그분을 데려올게, 막스.’
음침하게 읊조리던 플람의 목소리가 그의 귓전을 떠돌았다.
“다행이다, 막스…….”
소녀가 막시밀리언의 손가락을 꼭 쥔 것도 잠시.
한계에 다다른 듯, 그녀가 무너지듯 쓰러지며 정신을 놓았다.
* * *
실신했던 힐데가르트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미미하긴 하지만 이마에서 열감이 느껴졌다.
‘그대로 정신을 잃었구나…….’
힐데가르트는 금방 자신의 상태를 파악했다.
아무래도 마력 고갈로 쓰러졌던 모양이다.
그 증거로 여전히 몸에는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고, 머리도 지끈거렸다.
힐데가르트는 몽롱한 정신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직도 황궁이네.’
창문 밖을 보니 이미 밤이 늦었다.
달빛이 밝은 날이라, 어두웠어야 할 방이 환했다.
때마침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공녀님! 일어나셨군요.”
“노바.”
“다행입니다. 훨씬 안색이 좋아지셨네요.”
키스케의 시종 기사였다.
그가 쟁반을 든 채로 문을 닫고 조심스레 다가왔다.
“열이 꽤 많이 나셨습니다. 지금은 괜찮으신가요?”
“이 정도는 괜찮아요. 몸에 힘이 안 들어가긴 하지만…….”
“말은 편하게 놓으세요.”
힐데가르트가 끄덕였다.
노바가 들고 온 쟁반에는 물그릇과 마른 수건이 올려져 있었다.
힐데가르트가 그것들을 빤히 바라보자, 그가 살포시 웃었다.
“키스케 전하께서 많이 걱정하셨습니다. 의원도 다녀갔는데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응. 전혀 안 나.”
“아침에는 일어나실 줄 알았는데 전혀 눈을 뜨지 못하셨습니다.”
“마력 고갈이 원래…… 응? 잠깐만, ‘아침에는’이라고?”
“예. 공녀님께서는 꼬박 서른 시간 만에 눈을 뜨셨습니다.”
“뭐?!”
힐데가르트가 경악했다.
큰일 났다. 미하일과 레디스가 엄청나게 걱정할 텐데!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지만, 이렇게까지 날이 어두워졌으니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이 이만저만 걱정하는 게 아닐 터.
‘엄청나게 걱정하고 있겠네, 당장 돌아가야 해.’
힐데가르트가 살짝 입술을 물었다.
“폐하는 어떠셔? 무사히 깨어나셨어?”
“예. 그거라면 다행히…….”
힐데가르트가 곧바로 침대에서 일어나려던 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눈에 익은 얼굴들이 나란히 걸어 들어왔다.
“……일어났어?”
“여. 살아 있어?”
키스케와 카유크였다.
힐데가르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그녀가 눈에 띄게 카유크를 반겼다.
“카유크! 마침 잘 왔어, 저택에 가기 전에 나랑 이야기 좀……!”
“무단 외박 때문에 그래? 걱정할 거 없어.”
카유크가 먼저 그녀에게 말했다.
“이미 엄청나게 화나 있던데, 네 오빠들.”
“윽…….”
힐데가르트에게 오빠가 있었구나.
키스케는 그녀를 흘끔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