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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공녀님 (36)화 (36/166)

35화

처음에는 손끝에서, 그다음에는 발등과 발가락 끝까지 느껴지는 저릿한 감각.

아주 미세한 차이였지만, 평범한 마력과는 분명 달랐다.

“찾았다! 키스케, 저쪽에……!”

힐데가르트가 황급히 치맛자락을 들고 개울에서 빠져나오려던 때였다.

차가운 물에 곱아든 발이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아서, 그녀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윽, 넘어진다……!’

그러나 힐데가르트의 몸이 그대로 고꾸라지는 일은 없었다.

“조심해.”

키스케의 양팔이 그녀를 가볍게 붙들었다.

“아…… 고마워.”

“천천히 나와. 거기서 넘어지면 무릎 깨진다.”

키스케가 그녀의 팔을 꼭 붙잡았다.

힐데가르트는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꼭 맨발로 들어갔어야 했어?”

“이젠 들어갈 일 없을 거야. 그보다…….”

그녀가 머쓱한 얼굴을 하던 것도 잠시.

“키스케. 저쪽엔 뭐가 있어?”

키스케의 고개가 힐데가르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돌아갔다.

“…….”

“키스케?”

착각이었나?

방금 키스케의 안색이 차갑게 얼어붙었던 것 같은데…….

“뭐가 있냐니깐?”

“……황자비궁.”

“황자비궁?”

키스케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낸 다음 그녀에게 건넸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로바르네 랑케르트 드롯셀마이어 2황자비님의 궁이다.”

* * *

이유는 알 수 없으나, 키스케는 2황자비궁으로 가는 걸 퍽 꺼리는 눈치였다.

힐데가르트는 그가 황자비궁에 도착하기 직전에 실낱같은 한숨을 쉬던 것을 분명히 들었다.

“키스케 전하.”

“수고가 많군.”

“아닙니다. 황자비 전하를 뵈러 오셨습니까?”

“아니야. 잠시 정원에 용건이 있어서 온 것뿐이다.”

“정원……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러니 신경 쓸 것 없다.”

키스케의 말은 다른 사람이 듣기에도 조금 이상한 소리였다.

아니나 다를까 문지기를 맡고 있던 기사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곧 그의 시선이 힐데가르트에게 꽂혔다.

“그쪽에 계신 분은?”

“내 손님. 이만 들어가도 되겠지?”

“예? 예에…….”

기사는 정말 이대로 보내도 되는 건지 갈등하고 있었다.

원칙대로라면 당연히 신분을 확인해야 하나, 황태손이 손님이라 말하니 더 묻긴 어려웠던 모양이다.

키스케는 그에게 더 고민할 틈도 주지 않고 성큼성큼 멀어졌다.

한참 뒤 힐데가르트가 말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게 도와준 건 고맙지만, 오히려 이상한 눈총을 산 게 아닐까? 아무리 그래도 정원만 보고 가겠다니…….”

“상관없어. 그보다 여기가 확실한 거야?”

“마력으로만 따지면 그렇지만, 장담하기는 어려워. 확인해 봐야지.”

“그럼 최대한 빨리 확인하고 나가는 게 좋겠어.”

“으음?”

힐데가르트가 그를 흘겨보았다.

‘황궁을 죄다 갈아엎어도 상관없다고 하던 건 언제고.’

이 반응은 또 뭐야.

혹시 2황자비하고 사이가 불편한가?

‘로바르네 랑케르트라고 했지.’

미들네임으로 유추해 보면 2황자비는 랑케르트 가문 출신이 분명했다.

딱히 놀라울 건 없었다.

제국 초대 황후도 랑케르트 가문 출신이었고, 80년 전에도 랑케르트에서 나고 자란 황족이 한 명씩은 있었다.

랑케르트의 들개라는 멸칭에는 자기 자식마저 새끼 치듯 결혼시키고 자식을 팔아 호강을 누린다는 비아냥도 섞여 있었을 정도다.

힐데가르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물길을 따라 걷고 있을 때였다.

황자비 궁 정원에 발을 들이기 무섭게, 힐데가르트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뭐야.”

주변에서 느껴지는 마력이 심상치 않았다.

‘여기였구나.’

황자비궁 정원에는 일리야 공녀의 방에서 느낀 것과 비슷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피부가 따끔거려.’

그리고 그녀의 추측을 뒷받침하듯, 몇몇 식물들이 바싹 말라 있었다.

“키스케. 이곳에 사람을 들이긴 어렵겠지?”

“…….”

키스케가 끄덕였다.

힐데가르트는 실망하지 않았다. 워낙 당연한 대답이어서였다.

황궁의 다른 곳이야 키스케가 자기 마음대로 들쑤시고 파헤치라 명령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이곳은 엄연히 주인이 있는 궁이었다.

‘게다가 이유를 설명하라고 말하면 막스가 저주에 걸린 것까지 이야기해야 해.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순 없어.’

황제가 저주에 걸렸다는 사실이 퍼지면 국정이 혼란에 빠진다.

‘내가 찾아내는 게 나아.’

힐데가르트는 곧바로 넓은 정원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상당한 시간을 투자한 뒤에도 제물과 매개체가 묻혀 있을 만한 곳은 찾지는 못했다.

‘한 번만 더.’

힐데가르트는 무릎을 꿇었다.

그녀가 다시금 손끝으로 마력을 뽑아냈다.

거미줄처럼 퍼진 마력이 그녀를 중심으로 퍼지더니 정원 곳곳으로 스며들었다.

이 마력 거미줄에 한 번 걸리기만 하면 어떤 것이든 저주의 형질을 파악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허탕이었다.

탐색에 실패한 힐데가르트는 머리가 핑 도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발을 헛디디자 키스케가 기다렸다는 듯 부축했다.

“괜찮아?”

“……멋지게 찾아내는 걸 보여주고 싶은데 잘 안 되네.”

“너무 무리하지 마.”

“언제는 빨리 확인하고 나가는 게 좋겠다며…….”

그렇다고 곧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는 애한테 어떻게 재촉해?

키스케는 핀잔처럼 내뱉을 뻔했던 한마디를 꾹 참았다.

그가 하얗게 질려 있는 힐데가르트를 벤치에 앉혔다.

‘와. 세상이 핑핑 돈다.’

힐데가르트는 하마터면 헛구역질할 뻔했다.

원인은 마력 고갈이었다.

하기야 아무리 마력이 넘쳐도 사흘 전에 입궁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써댔으니 멀쩡할 리 없었다.

“손이 후들거리잖아.”

“괜찮아. 좀 어지러울 뿐인걸. 금방 괜찮아질 거야.”

“…….”

키스케가 덜덜 떨리는 그녀의 왼손을 바라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괜찮아 키스케. 엄마는 금방 나을 거야. 다 나으면 야유회를 열까? 황자비님이랑 카라딘도 불러서…….’

“안 괜찮아질 수도 있어.”

그가 힐데가르트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진짜 괜찮다니깐.”

“그보다 여기에 있는 건 확실한 거야?”

“응? 그건 확실해.”

키스케는 잠시 말이 없었다.

이마를 짚은 힐데가르트는 차분히 생각했다.

‘2황자비 궁이라…….’

단순하게 생각하면, 2황자비가 황제에게 저주를 걸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너무 단순하지 않나?’

키스케도 때마침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가 물었다.

“……2황자비 전하가 할아버지를 저주한 걸까?”

“그건 아직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해.”

힐데가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한번 생각해 봐, 키스케. 만약 네가 누군가를 저주했다고 쳐. 그럼 그 증거물을 허술하게 자기 궁 정원에 놓아두겠어?”

“누군가 2황자비 전하의 궁을 이용해서 일을 꾸몄다는 거야?”

“그럴 확률도 있다는 거야. 물론 2황자비 전하가 저주를 행했을 확률도 없지는 않지만…….”

섣부른 단정은 마녀사냥을 부른다.

그렇기에 힐데가르트는 함부로 억측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키스케 넌 처음부터 여길 수색하지 않았지? 이유가 뭐야?”

“……황자비 전하는 자기 궁에 다른 사람이 출입하는 걸 싫어하니까.”

특히 다른 사람도 아닌 키스케가 발을 들였다는 걸 알면 당장 쫓아내도 이상할 게 없었다.

키스케는 2황자비를 떠올리고 싶지 않은 건지,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힐데가르트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키스케가 돌연 고개를 돌려 물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

“응? 뭔데?”

“그때. 온실에서 네가 사라졌을 때 말인데.”

키스케가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했다.

“넌 폐하가 살아 있는 게 정말이냐고 물었지.”

“그랬지?”

“왜 물어본 거야?”

“……어.”

힐데가르트는 드물게도 얼버무리기 힘든 대답과 맞닥뜨렸다.

글쎄. 뭐라고 대답하면 이해할까?

실은 내가 네 할아버지와 이러쿵저러쿵 사연이 많다고 말해봤자 믿을 리도 없고.

적당히 거짓말로 얼버무려 봤자 별 이득도 없을 텐데.

게다가 상대가 막시밀리언의 손자라서 그럴까.

아니면 너를 믿어보겠다고 말한 사람이라 그럴까.

그녀도 어지간하면 키스케에게 티 나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설마 폐하께 이런 일이 생길 걸 예측했던 건가?”

“뭐? 아니야, 무슨 소리야! 얘가 생사람을 잡네!”

“그러면?”

“믿기지 않아서. 너한테 소리칠 정도로 깜짝 놀랄 정도로 기쁜 말이라 물어본 거야.”

설마 그때 일을 마음에 두고 있었나?

힐데가르트가 키스케의 긴 속눈썹을 살펴보며 물었다.

“그때 내가 소리 질러서 놀랐어? 응? 속눈썹이 긴 키스케 전하?”

“누가 그렇대? 자꾸 이상한 걸로 놀리지 말라고!”

키스케가 버럭 성을 냈다.

“난 그냥……!”

네가 이상한 표정을 지어서 그랬던 거라고, 그렇게 소리치면 될 텐데.

“그냥?”

이상하게 그게 잘 안 됐다.

키스케는 얼굴을 찡그렸다.

힐데가르트의 설익은 포돗빛 눈동자는 한겨울 호숫가에 서리가 낀 것처럼 푸른빛이 감돌았다.

바람은 소리 없이 양떼구름과 정원의 풀잎을 뒤흔들었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갑게 쓰다듬은 뒤 사라진다.

여유롭게 웃는 소녀의 뺨이 발긋했다.

키스케는 저 얼굴을 앞에 두고 화를 내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냥, 계속 신경, 쓰여서…….”

이게 아닌데.

그가 말끝을 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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