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저 스스럼없는 태도는 여간해서는 바뀌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힐데가르트의 그런 모습이 싫은 건 아니었다.
아주 조금이지만, 키스케는 내내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아카락시아 공작가의 막내 공녀가 마법사라는 게 밝혀지면 곤란한 일이 생길지도 몰라. 괜찮겠어?”
“곤란한 일?”
“사람들이 마법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른다고는 하지 마.”
신비한 힘을 다루는 마법사는 으레 추앙받는 대상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한 줌에 불과한 변질자다.
제국 사회에 받아들여지기보다는 질투의 대상이 되거나 은근히 배척당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마법사를 하나로 뭉치게 해줄 마탑까지 무너진 지 오래라, 마법사들은 세상에서 활약하기보다는 흔적을 지우고 숨어버리는 게 일반적이었다.
“음, 글쎄. 네가 비밀을 지켜주면 되잖아?”
“영원한 비밀이라는 건 없어.”
“하긴 그렇겠지. 그렇지만 키스케.”
힐데가르트가 그를 보며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내가 마법사라는 게 밝혀지면 그게 뭐? 폐하를 도울 수 있다는 데는 변함이 없잖아.”
그녀가 시원스럽게 말했다.
“내가 사람을 살릴 수 있어. 너를 도울 수 있다고. 그럼 어느 쪽이 더 중요하겠어?”
“…….”
키스케는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황궁에 있던 의원들은 황제가 제 나이를 이기지 못한 것처럼 굴었다.
분명 이상한 점이 눈에 띄는데도 이 정도면 천수를 누리고 가는 거라고, 호상이라는 눈을 하며 키스케를 안쓰럽게 볼 뿐.
그래서인 걸까?
힐데가르트의 말을 믿고 싶었다.
이건 저주일 뿐이라고.
할아버지는 금방 털고 일어날 거라고…….
사람은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고, 행동하고 싶은 대로 행동한다.
그것은 어른이건 아이든, 황제이든 노예이든 다를 바 없었다.
힐데가르트는 키스케의 가면이 잠시 벗겨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소년의 간절함.
입술을 꾹 다무는 그 모습이 도마뱀 한 마리를 살리겠다며 울음을 참던 막스의 옛 모습과 겹쳐 보였다.
“……정말로 할아버지를 낫게 해줄 수 있다는 거지?”
“응.”
“약속할 수 있어?”
어차피 그녀가 마법사라는 사실은 평생 품고 갈 비밀이 아니었다.
“약속해. 그 대신 키스케 너도 나를 도와줘야 해. 나 혼자서는 모든 걸 해결할 수 없거든.”
“……좋아. 내가 너를 돕는 대신, 너도 나를 돕는 거야. 약속한 거다.”
“응.”
곧 마차가 황성에 도착했다.
먼저 내린 키스케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널 믿어볼게.”
“믿어봐. 후회하지 않을 테니까.”
힐데가르트는 그 손을 잡고 천천히 내렸다.
80년 만의 황성이었다.
* * *
으레 열두 살 소녀가 황성에 처음 온다면 호들갑을 떨게 마련이지만 힐데가르트의 감상은 사뭇 달랐다.
‘변한 게 없네, 변한 게.’
수도나 오브론의 사택마저 달라졌건만. 황성은 무서울 정도로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하긴, 황성은 그 존재만으로도 유적이나 마찬가지니까.’
황태자 궁에 있는 손님 방으로 안내받은 힐데가르트가 막시밀리언을 만나게 된 건 거의 저녁이 넘어서였다.
키스케가 침소에 있는 사람을 모두 물려준 덕분에 그녀는 막시밀리언을 볼 수 있었다.
막시밀리언의 증상은 그사이 더 심해져서, 손끝이 완전히 까맣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힐데가르트의 충격은 저주에서만 기인한 게 아니었다.
‘감히 누가 막스를 이렇게 만든 거지?’
분노는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그녀가 주먹을 꽉 쥐었다.
자극적인 신문 기사를 볼 때와는 다른 기분이었다. 몰라보게 노쇠한 제자는 언제 숨이 멎어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안 돼.’
황혼의 끝자락에 서 있는 제자와 겨우 만났다.
그런데 이야기 한 번 나누어 보지 못하고 헤어질지도 모른다니.
‘반드시 저주를 풀어야 해.’
힐데가르트가 이를 악물었다.
‘어느새…… 이렇게 늙어서는.’
마지막으로 막스를 본 게 언제였더라.
그녀는 무심코 세월을 헤아렸다.
막시밀리언을 처음 만난 건 그의 나이가 열넷이었을 때다.
그랬던 게 벌써 80년이 지났고, 이마에는 주름이 가득했다.
쪼글쪼글한 피부는 그녀가 기억하던 막스의 모습을 가리고 있었다.
남아 있는 옛 모습은 그야말로 한 줌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여전히 소중했다.
비로소 힐데가르트는 검게 변한 손을 가만히 쓸어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날 못 알아보겠지만, 그래도 괜찮아. 살아 있기만 하면 돼.’
만에 하나, 눈을 뜬 제자가 저를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그는 황제를 거쳐 간 수많은 선생 중 한 명을 잊은 것에 불과하다.
‘섭섭해하지 말자.’
환생했을 때, 생전의 저를 기억하는 사람이 여태껏 살아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살아 있기만 하면 돼.
기억 못 해도 괜찮아.
그냥 살아 있기만 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진심으로 기쁠 테니까.
“어때?”
“…….”
“힐데가르트?”
“아, 응?”
“어떻냐고.”
힐데가르트는 뒤늦게 빗물을 털어내는 새처럼 파드득 떨었다.
그녀가 침착하게 말했다.
“안 좋아. 생각보다 저주의 상태가 심각한 것 같아. 폐하가 쓰러진 지 이틀이라고 했지?”
“그래.”
“생각보다 너무 진행이 빨라.”
힐데가르트는 오브론 대공에게서 받아온 성물을 막시밀리언의 머리맡에 놓았다.
성물 덕분에 눈을 떴던 일리야 때와는 상황이 여러모로 달랐다.
이 상태라면 며칠 뒤에는 곧바로 피부 껍질이 벗겨지기 시작할 것이다.
아무래도 일전의 실험을 표본 삼아 더욱 확실하고 강력하게 저주를 건 게 분명했다.
키스케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뒤늦게 힐데가르트는 그를 달래듯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어떻게든 할게.”
막시밀리언이 살아 있는 한, 힐데가르트가 그를 포기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저주를 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마력이 흐르는 수맥을 중심으로 저주에 쓰인 제물과 매개체를 찾는 게 우선이야.”
힐데가르트는 막스의 가슴께까지 이불을 덮어준 뒤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내가 방법을 알려줄게. 여기서부터는 네 도움이 필요해.”
키스케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힐데가르트가 ‘검은 뱀의 저주’를 자세히 설명한 뒤.
두 사람은 사흘 내내 제물과 저주의 매개체를 찾는 데 집중했다.
키스케는 곧바로 황궁 사람들에게 지시하여 수맥 근처를 모조리 뒤엎었다.
“안 나왔어?”
“…….”
“안 나왔나 보네.”
표정이 안 좋은 걸 보니 대답을 안 들어도 알겠다.
키스케가 가제보 쪽으로 걸어왔다.
“정원과 이어진 수로, 오수 파이프로 연결된 곳까지 샅샅이 뒤져봤지만 없었어.”
“시종들이 머무는 숙소는? 그쪽에도 우물이 있지 않아?”
“거긴 지금도 뒤져보고 있어. 그런데 너…….”
키스케가 수상하다는 듯 그녀를 보았다.
“황궁 구조를 왜 이렇게 잘 알아?”
“아.”
설마 그걸 물어볼 줄이야.
허를 찔린 힐데가르트가 데구루루 눈알을 굴리자, 키스케의 눈매가 더욱 가늘어졌다.
“실은 한밤중에 몰래 황궁에 침입해서 쫓고 쫓기는 위험한 추격전을 벌인 적이 있어.”
“농담이지?”
“농담이야.”
키스케의 표정이 식기 포장지로 쓴 신문지처럼 구겨졌다.
농담일 걸 알면서 물어본 거지만, 막상 그렇다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넌 대체 그런 실없는 농담을 뭐 하려 하는 거야?”
“원래 농담에는 이유가 없잖아.”
“불필요한 농담은 상대를 믿을 수 없게 만들 뿐이야.”
“그래? 그럼 앞으론 진실만을 말할게. 실은 나는 80년 전 엄청나게 유명했던 천재 마검사라 한때는 황궁을 자기 집처럼 드나들었고 황녀의 결혼식 때는 들러리를 섰어.”
“차라리 추격전을 벌였다고 해!”
이럴 줄 알았다.
역시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고독한 법인가 보다.
“그래, 미안해. 실은 마법으로 주변을 탐색해 봤어. 됐지?”
힐데가르트는 한숨을 쉰 뒤, 하얀 지붕이 아름다운 가제보에서 벗어났다.
“어쨌든 제물과 저주의 매개체는 못 찾았다는 거네.”
“이젠 어떻게 할 거야?”
“마력으로 수색해 볼 생각이야.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말하면 자신이 없었다.
마력 속에서 원하는 저주의 흔적을 정확하게 찾아낸다는 건 모래사장에서 뜨개질용 대바늘을 찾아내는 수준으로 어려웠다.
‘실 바늘이었으면 마력 낭비라서 시도도 안 했을 텐데.’
대바늘이니까 해본다, 대바늘이니까.
힐데가르트가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며 나섰다.
그녀가 걸어간 곳은 황태자 궁 정원 한쪽에 있는 실개울이었다.
정원에 흐르는 개울이나 물길은 모두 발프람 수로에서 연결되어, 구조만 놓고 보면 커다란 원형을 이루며 황궁을 에워싼 형태였다.
“잠깐…… 힐데가르트!”
찰박, 찰박.
힐데가르트는 키스케가 말릴 틈도 없이 실개울 한가운데에 발을 들였다.
키스케는 그녀가 구두를 벗은 채 물속에 발을 담그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사교계에 데뷔하지 않은 소녀라 해도 맨발을 드러내는 건 보통은 극도로 꺼린다.
하지만 키스케가 놀라거나 말거나, 힐데가르트는 개울가 밖으로 구두를 가지런히 벗어놓았다.
“다른 사람이 오면 알려줄래?”
“넌 정말…….”
키스케는 알몸이라도 본 것처럼 고개를 돌린 채 마지못해 끄덕였다.
이른 봄이라고 해도 아직 개울 물은 차가웠다.
힐데가르트는 잠시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이내 허리를 완전히 굽혀 물속으로 완전히 양손을 집어넣었다.
그녀가 차분히 눈감았다. 개울 물이 손등을 훑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손과 발이 차디차게 얼어붙어 갈 무렵이었다.
힐데가르트는 손끝으로 찌릿하게 느껴지는 기운에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