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공녀님 (33)화 (33/166)

32화

“좋은 친구 한 명 생긴 셈 쳐.”

카유크는 또다시 끽끽 박쥐 우는 소리가 나도록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나같이 괜찮은 남자 사람 친구 한 명 딸한테 붙여주려고 얼마나 많은 사교계 부인이 공을 들이는데?”

남자 사람 친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내가 결혼만 일찍 했으면 지금쯤 너만 한 손자가 족보에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힐데가르트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렇게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한 무리의 사람이 말을 탄 채 거리를 행렬하고 있었다.

“어라? 저거…….”

행렬 뒤에는 마차도 있었는데, 어디서 많이 본 진녹색 깃발을 매단 채였다.

“랑케르트 가문이잖아?”

카유크가 창밖으로 목을 쑥 내밀었다.

선두에 서서 말을 몰고 있는 여성은 짧게 깎은 베이지색 머리카락에 아무런 치장을 하지 않았음에도 묘하게 우아한 구석이 있었다.

척 보기에도 늠름하고 예사롭지 않은 기세.

그러나 그 기세가 지나친 감이 있었다.

“당장 비켜라!”

행렬하던 랑케르트 가문 측 병사 하나가 행인을 향해 꽥 소리쳤다.

“감히 마우제네 랑케르트 님 앞을 가로막다니 죽고 싶으냐!”

“죄, 죄송합니다!”

“눈알을 파내기 전에 당장 비켜!”

행인이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상대가 길을 비켰음에도, 랑케르트 가문의 병사들은 한 번씩 눈빛으로 행인을 찌르고 갔다.

“이야. 살벌하네.”

창틀에 기대 있던 카유크가 휘파람을 불었다.

“누가 사냥개 아니랄까 봐. 잘못했다간 물어 뜯기겠어.”

“그러게.”

사냥개 랑케르트.

다섯 별 공작가 중에서 황제를 수호하는 로열 가드를 가장 많이 배출해 낸 가문.

랑케르트 가문은 자신을 황제의 사냥개라 칭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으레 사냥개는 주인의 말만 듣는 법이고 그 외에는 악랄하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낼 때도 있는 법.

때문에 랑케르트 가문에게 원한을 가진 자들은 그들을 들개 새끼라고 낮잡아 부르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천지 분간하지 못하고 이빨을 들이민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런 이들조차 랑케르트 영지에서 나오는 모피에는 사족을 못 썼다.

랑케르트는 넓은 서부 삼림을 끼고 발달한 공작령 덕에 타고난 사냥꾼이 많았다.

무두질과 가죽 손질, 박제 기술로는 제국에서 따라갈 곳이 없을 만큼 뛰어난 실력을 지닌 숲의 가문.

“……여전하네.”

“어? 방금 뭐라고 했어?”

“아무것도 아냐. 창문 닫아줘.”

힐데가르트는 냉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카유크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묘하게 차가운 반응이다? 랑케르트 가문에 뭐 원한이라도 있어?”

“없거든.”

“말투만 봐서는 있는 거 같은데?”

“글쎄.”

오브론 대공가도 광산 열 개를 랑케르트 가문에게 팔아넘기면 없던 원한이 생길 것이다.

‘대고모님의 시신은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 랑케르트 가문의 영지에서 실종되었거든. 그곳 땅을 전부 사들이는 대신, 광산 열 개를 넘겼지.’

힐데가르트는 랑케르트 가문에게 넘겼다는 보석 광산을 떠올리며 가슴을 퍽퍽 쳤다.

이미 광물이 메말랐을 땅이다.

‘아깝다며 욕심내 봤자 무슨 소용이야.’

하지만 유행 지난 사랑 노래처럼 잊어야 한다, 지워야 한다 곱씹어도 속이 쓰렸다.

그녀가 끙끙거릴 때였다.

카유크가 그녀를 위해 왈츠를 한 곡을 더 연주하겠다고 나선 순간,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로빈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가씨, 신문이에요.”

“고마워. 카유크! 나 신문 읽을 거니까 연주하지 마!”

“쳇. 넌 어린애가 꼬박꼬박 신문을 챙겨보더라? 애늙은이냐?”

“내가 어리긴 한데 날 어린이 취급하는 건 못 참는다.”

“뭐래?”

“그런 게 있…….”

신문을 보던 힐데가르트의 말이 끊겼다.

어제까지만 해도 1면에는 이베르타 공작가의 후계 싸움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사뭇 달랐다.

<황제의 측근, 황제 폐하의 건강 이상설에 대해 입을 떼다.>

그녀가 천천히 활자를 훑었다.

“카유크.”

“응?”

“황제 폐하가…… 건강이 많이 안 좋으신가?”

“아무래도 그렇지?”

카유크는 주섬주섬 바이올린을 챙기며 말했다.

“폐하의 연세가 올해로 아흔여섯? 일곱? 그 정도인데 아직도 정무를 안 놓고 계시는 것만 해도 엄청난 거지.”

후계자였던 황태자가 사고를 당하지만 않았더라면 진즉 보위에서 물러났을 황제였다.

“우리 할아버지만 해도 삭신이 이곳저곳 쑤신다고 난리신걸. 그만큼 장수하신 것도 놀라운데. 당연히 건강이 안 좋지 않겠어?”

“……그래.”

아흔일곱이라.

‘오래 살았지.’

힐데가르트가 살며시 한숨을 쉬었다.

카유크는 그사이 다른 황자라도 건강했으면 좋았을 거라며 종알거리고 있었지만, 힐데가르트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세월은 무서웠다.

성기사단과 함께 하늘을 찌를 듯 기세등등하던 신전은 초췌해졌고, 아카락시아는 빛바랜 무지개가 되었다.

‘막스가 여태껏 살아 있는 것만 해도 기적이야.’

그녀가 심란한 마음으로 신문을 접었다.

어떻게 해야 막스를 만날 수 있을까?

틈만 나면 고민해 보았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대공에게 부탁하는 건데…….’

그건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대공이 부탁을 거절할 수도 있고, 그렇게 입궁한다면 막시밀리언과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을 것이다.

‘황궁 시종이랑 대공이 옆에 있는데 내가 스승이란 걸 밝히면…….’

법보다 빠르고 간단한 철창과 황족 모욕죄로 철컹철컹!

덤으로 여동생을 꺼내 달라며 엉엉 울고 손바닥을 비비며 싹싹 빌어댈 미하일과 레디스가 떠오른다.

‘그냥 한 번만 보면 되는데.’

이야기를 나눌 수 없어도 괜찮아.

그냥 잘 살아 있구나, 그렇게 알 수 있게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그냥 물방울의 방에서 다시 한번 순간 이동을 할 걸 그랬나.’

머리를 굴려봐도 좀처럼 괜찮은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카유크가 노크를 하고 들어온 하녀와 몇 마디를 나누는 사이, 그녀는 불법과 합법의 경계를 아우르며 재회의 수단을 마련하기 바빴다.

예상치 못한 수단이 툭 튀어나온 건 그 순간이었다.

“어, 힐데.”

“왜?”

“대공저에서 널 찾는 손님이 있다는데?”

“손님?”

“응. 적청 깃발에 하얀 별.”

“……뭐?”

사선으로 그어진 적청 깃발 위에 수놓은 하얀 별.

그건 제국의 국기이자 황족을 뜻했다.

* * *

오브론 대공가에 황실 마차가 당도한 건 한 시간 전이었다.

키스케는 시종 기사 노바와 함께 대공저를 방문했다.

“갑작스레 찾아와서 무거운 이야기를 해 미안합니다, 대공.”

“아닙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란 오브론 대공이었으나, 그는 황자를 마주 보고 앉아 차분히 이야기했다.

“실은 할아버지의 용태에 대한 이야기로 급히 할 말이 있어서 찾았습니다.”

“……폐하의 소식은 신문으로 들었습니다. 이렇게 전하께서 방문하실 정도면,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한 상태로군요?”

키스케가 끄덕였다.

“폐하의 피부가 새카맣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정신도 차리지 못하고 계십니다.”

오브론 대공의 얼굴이 충격으로 싸늘해졌다.

“그대의 손녀와 같은 증상입니다.”

“그런 것 같군요. 쓰러지신 지는 얼마나 되셨습니까?”

“오늘로 이틀째입니다. 황궁 의원들 내에서도 ‘검은 먹구름’인지는 의견이 분분했던 모양입니다.”

키스케는 초조한 얼굴로 말했다.

“사실 아직도 의견이 하나로 모이지 않았습니다. 내가 이곳을 방문한 건…….”

“완치 소식을 들으셨군요.”

오브론 대공은 어렵잖게 짐작했다.

황태손이 아무리 어른스러운 척해도 그의 나이는 아직 열넷이었다.

이런 일을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일리야 공녀의 병을 낫게 한 의원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단순한 소문입니까? 혹시 사실이라면 어떤 의원이죠? 수도를 떠났다면 즉시 사람을 보내서…….”

“전하.”

노바는 어린 주군을 얌전한 목소리로 말렸다.

키스케는 뒤늦게 입을 다물었다.

“전하. 진정하시지요. 닷새 전에 일리야가 나은 것은 사실입니다.”

“……!”

키스케는 물론, 곁에 서 있었던 노바도 눈을 크게 떴다.

“말씀 도중에 실례하겠습니다. 대공 각하. 황궁 의원 중 누구도 고치지 못한 병이었습니다. 정말로 일리야 공녀님의 완쾌하셨단 말입니까?”

“그렇네.”

오브론 대공은 대화 중에 끼어든 노바를 나무라지 않고 차분히 설명했다.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 이 일이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함구령을 내렸네. 하지만 완치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야.”

“……놀랍군요.”

“전하께서도 믿기 어려우시다면 지금 일리야를 이 저택으로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 한마디는 키스케를 향한 말이었다.

키스케는 가뭄 난 땅에 내리는 단비를 바라보듯 오브론 대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대공이 사실을 확인해 주었으니, 이제 막 병상에서 일어난 공녀를 부를 필요는 없겠죠. 하지만 대공.”

“예.”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지금 당장 그 의원이 필요해요.”

키스케는 아직 할아버지를 잃을 수 없었다.

그에게 진정한 의미로 남아 있는 가족은 이제 할아버지뿐이니까.

“실력이 좋다면 길거리의 의원이라도 따지지 않겠으니. 당장 불러주세요.”

“그자를 의원이라 해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대공은 잠시 뜸을 들였다.

“곧바로 연락을 넣겠습니다.”

“행방을 파악하고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오브론의 은인이니 손님으로서 맞이하고 있지요.”

오브론 대공은 그렇게 대답한 뒤 따뜻하게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키스케 전하. 이 늙은이가 장담컨대 성품이 모질지 않은 소녀라 틀림없이 힘을 빌려줄 것입니다.”

소녀?

키스케가 대공의 말에 반응했다.

“어떤 사람이죠? 그만한 실력이라면 한 번쯤 이름을 들어보았을 법도 한데.”

황족의 물음에 감히 거짓을 고할 수는 없었기에, 대공은 소녀의 이름만을 입에 올렸다.

“힐데가르트라고 합니다.”

키스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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