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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공녀님 (32)화 (32/166)

31화

Chapter 04. 너는 정말 체념을 모르는구나

키스케는 그답지 않게 빠른 걸음으로 황궁 복도를 가로질렀다.

수심이 깊은 얼굴에는 초조함마저 깃들어 있었다.

“전하, 키스케 전하. 조금만 천천히 가세요.”

호위 기사 노바가 그의 뒤를 따르며 달래듯 말했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기어코 황제의 침소 앞에 다다른 키스케가 벌컥, 소리 나게 문을 열었다.

황제의 침대 주변에는 황실 의원이 모여 있었다.

“키스케 전하.”

그리고 또 한 사람.

“소란스럽군요, 발걸음이 여기까지 들렸습니다.”

흥분한 키스케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로바르네 2황자비였다.

로바르네 랑케르트 드롯셀마이어.

황제의 둘째 아들과 결혼하여, 황족이 된 여자.

남편은 물론 황태자 부부가 세상을 뜬 지금, 황실의 안살림은 그녀가 맡고 있었다.

그녀는 황제의 며느리이자 키스케의 숙모이기도 했다.

그녀는 키스케와 달리, 차분하기만 했다. 마치 이런 일이 생길 걸 알고 기다려왔다는 듯.

“숙모님.”

도자기 인형처럼 우아하고 커다란 눈망울과 두툼한 애교살.

순한 인상을 지녔음에도 어딘지 모르게 차가움이 감도는 사람이 바로 로바르네 2황자비였다.

그녀의 사뭇 건조한 얼굴에 웃음이 스치는 건 언제나 외동아들 카라딘에 관련된 일뿐이었다.

“쉿. 조용히 하세요, 키스케”

로바르네는 살뜰한 손길로 황제의 목까지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 모습은 아름다웠지만, 슬퍼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회를 잡은 사람처럼 눈이 웃고 있었다.

“폐하께서 쓰러지셨으니 정숙하셔야죠.”

키스케는 고개를 돌려 의원들을 노려보았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전하…….”

“대답해라.”

의원들은 머뭇거리며 그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키스케의 눈썹이 점점 하늘로 치솟기 시작하자, 결국 의원 중 한 명이 눈치를 보며 걸어 나왔다.

“놀라지 마십시오, 전하.”

의원은 황제의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레 황제의 손목을 잡았다.

의원이 침통한 표정으로 황제의 옷소매를 걷는 순간, 키스케는 헛숨을 삼켰다.

“이건…….”

황제의 피부가 기괴한 검은빛으로 얼룩덜룩하게 물들어 있었다.

의료 지식이 없는 키스케의 눈에도 이상한 점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죄송합니다. 아직 병의 원인을 명확하게 찾지 못했습니다.”

키스케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이미 아흔 살이 넘은 황제의 나이를 생각해 보면, 쇠약해져서 쓰러지는 일은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병에 걸렸다는 건 다른 문제였다.

“병명은 뭐지? 치료법은? 무엇이라도 알아낸 건 있겠지?”

“…….”

“왜 대답이 없어?”

저 많은 황실 의원 중 저와 눈을 마주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니.

“그대들은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의원 중에서도 최고로 뛰어난 의원들이다. 침묵할 생각인가?”

그 말에 대답한 건 로바르네였다.

“의원들을 닦달해도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병명을 알 수가 없다고 하니.”

“하지만…….”

“키스케. 이야기는 침실 밖에서 나누도록 하죠.”

로바르네는 키스케에게 밖에 나가있으라며 턱짓했다.

키스케는 가능한 침실에서 멀어지고 싶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이 방문을 나섰다.

로바르네는 문을 닫은 즉시 따라 나온 시녀에게 말했다.

“리시아 자작 부인에게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라고 전하렴. 무온 재상에게도.”

“숙모님.”

“폐하께서 돌아가셨을 때를 대비해야지. 국정에 혼란이 없어야 할 테니까.”

“숙모님!”

“듣고 있으니 조용히 말하세요”

그 순간 키스케는 깨달았다.

침실에 있었던 의원 대부분이 로바르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로바르네 황자비는 처음부터 치료법을 찾을 생각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폐하께서 걸리신 병을 알아내고 치료하는 게 우선입니다!”

“보통이라면 그렇겠죠. 하지만 병의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으니 그에 따른 최악의 상황도 대비해야 하고요.”

팔짱을 낀 로바르네가 고압적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폐하의 연세를 생각한다면 이미 천수를 누리신 거죠.”

“숙모님께선 폐하가 눈을 뜨지 못하는 걸 바라시는 게 아닙니까?”

키스케가 허탈하게 물어보자, 로바르네의 웃는 얼굴이 싸늘해졌다.

“무례하군요. 그런 입에 담기도 끔찍한 말을 또다시 뱉는다면 예법을 다시 배워야겠어요.”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황자비 전하.”

“키스케. 이젠 내가 그대의 노예 기사와도 말을 섞어야 하나요?”

로바르네가 제 말에 끼어든 노바를 경멸하는 눈으로 보았다.

키스케는 분노를 꾹 참고 말했다.

“그럼 폐하의 병환을 이대로 내버려 두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물론 치료법이야 알아봐야겠죠. 키스케도 한 번 찾아보도록 해요.”

로바르네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혹시 알아요? 그대가 직접 치료법을 찾아오면 쾌차하신 폐하께서 감격하여 그대를 황태자로 책봉하실지?”

“…….”

어릴 적, 키스케에게 다정했던 숙모는 해마다 눈에 띄게 차가워지는 게 눈에 보였다.

그녀는 변하고 있었다. 이 모습이 원래 제 모습이었다는 듯.

“이렇게 소란 떠는 그대보다는, 카라딘이 차기 황태자에 더 잘 어울리는데.”

그녀의 아니꼬운 말투에서 진심이 흘러나왔다.

“핏줄을 잘 타고 나는 것도 재능이고 능력이지요. 그대의 부친께선 황태자셨으니 가장 좋은 재능을 물려주신 것 아니겠어요?”

“…….”

“그러니 치료법을 열심히 찾아보도록 해요, 키스케.”

목 끝까지 차오르는 감정이 배 속에서 끓는 기분이었다.

키스케가 해일처럼 일어나는 분노를 참는 동안, 황자비 곁으로 시녀 한 명이 다가왔다.

“황자비 전하. 대주교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런, 내 정신 좀 봐. 저녁 선약이 있었지.”

로바르네는 한숨을 쉬었다.

키스케를 돌아본 그녀의 표정은 사뭇 밝고 당당했다.

제 행동에 그릇된 점 하나 없다고 믿는 사람 같았다.

“그럼 키스케. 궁술 수업은 빼먹지 말도록 해요.”

“…….”

키스케는 손톱이 살을 파고 들 때까지, 비웃음만 남기고 사라진 황자비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 * *

황제의 침실에서 한참을 더 머무른 키스케는 무작정 걸었다.

저벅저벅 걸어가는 황태손의 기색이 심상치 않자, 시종 모두 곁눈질만 할 뿐이었다.

감히 아무도 말을 걸지 못하던 그때.

의원 한 명이 그를 불러세웠다.

“키스케 전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지?”

왜소한 체구의 청년이 그의 눈치를 살폈다.

“의원인가?”

“예, 전하. 올해부터 황실에서 의원으로 일하게 된 베르톨이라 합니다.”

그가 넙죽 고개를 숙였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한 가지 신경 쓰이는 점이 있어 전하를 붙잡았습니다.”

신입 의원인 그는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무슨 일이지?”

“실은, 폐하께서 앓고 계시는 증세가 오브론 대공가의 여식이 앓았던 병과 유사한 것 같습니다.”

“오브론 대공가?”

키스케가 잠시 기억을 되짚어보며 보았다.

“혹시 ‘검은 먹구름’을 말하는 건가? 그 불치병?”

“그렇습니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키스케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다만 얼마 전에 묘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묘한 소문?”

“예. 오브론 대공가에 엄청난 명의가 다녀갔다는 소문입니다.”

베르톨은 키스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천천히 말했다.

“대공이 데려온 명의가 불치병을 씻은 듯이 낫게 했다 합니다.”

“그게 정말인가?”

“사실 여부는 확인해 보아야겠지만, 조그마한 가능성이라도 열어두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베르톨의 태도는 몹시 조심스러웠다.

“괜찮으시다면 대공 각하를 궁으로 불러 사실 여부를 확인해 보시는 게 어떠십니까?”

최소한 대공과 이야기를 해본다면 소문이 진짜인지 아닌지, 황제의 병이 ‘검은 먹구름’인지를 확인할 수 있으리라.

키스케는 베르톨을 진지하게 보았다.

‘헛다리를 짚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의원을 찾는다는 오브론 대공가의 광고가 전부 내려가지 않았던가.

그 사실을 고려해 본다면, 의미 없는 일은 아닐 터였다.

“……언제 부름에 응할지 모르는 대공을 기다릴 시간은 없다.”

키스케는 젊은 의원이 머쓱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러곤 입을 뗐다.

“공작가에 기별을 넣지. 당장 직접 찾아가겠다.”

* * *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일리야 공녀의 저주 사건도 그렇게 일단락되는 듯했다.

거래는 끝났다.

오브론 대공과 원만한 신뢰 관계를 맺었으니 힐데가르트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넌 왜 계속 붙어 있는 거야?”

힐데가르트는 오늘도 끈질기게 붙어 있는 카유크를 보며 타박했다.

“왜? 오늘은 일부러 왈츠로 연주하고 있는 건데?”

“제발 바이올린 좀 그만 켜. 대체 어떻게 하면 왈츠에서 장송곡 같은 소리가 날 수 있어?”

“내 특기야.”

“언제는 얼굴이 특기라며.”

“내겐 아주 많은 특기가 있지.”

카유크는 다른 건 몰라도 악기를 다루는 재주는 하나도 없는 게 분명했다.

그가 낑까낑까 이상한 소리를 내던 바이올린을 내린 채 히죽거렸다.

“덕분에 심심하지는 않잖아?”

“차라리 심심한 게 낫겠다.”

“에이.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그래도 나 지금까지는 제법 도움 되지 않았어?”

“…….”

사실 그 말에는 반박하기 어렵다.

요 며칠 할 일이 없다는 핑계로 졸졸 따라다닌 카유크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아카락시아 남매에게 도움이 되었다.

미하일에게는 차기 오브론 대공이 될 유스티즈 오브론을 소개해 주었다.

대련 상대가 절실한 레디스와 함께 아침마다 목검을 맞댔다.

로빈의 선물을 사려고 들른 의상실에서는 힐데가르트더러 어떻게 고르는 족족 80년 전 유행했던 색이냐며 잔소리를 했는데…….

‘어? 따지고 보면 나한테는 그렇게 도움이 된 건 아닌데?’

힐데가르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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