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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공녀님 (31)화 (31/166)

30화

오죽 기뻤으면 손님인 저를 옆에 두고 체면도 내려놓고 감격할까.

‘잠깐 자리 좀 비워 줄까.’

힐데가르트는 웃으며 자리를 벗어났다.

오랜 시간 마음고생했을 오브론 대공을 생각한다면, 그 정도 배려는 해줄 수 있었다.

저 감격만큼이나 진상을 알게 될 오브론 대공의 분노도 크겠지.

“공녀님.”

“휴리 경.”

힐데가르트는 그녀와 함께 조심스레 자리를 피한 기사를 올려다보았다.

“고생했어요.”

“아닙니다. 제가 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휴리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함께, 그녀를 향한 존경심이 드러나 있었다.

“……일리야 아가씨를 모시는 오브론의 일원으로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율리겐 각하께서 매우 기쁘신 모양입니다.”

“그럴 만도 해요.”

“괜찮으시다면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제가 모시겠습니다.”

힐데가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브론 대공과 단둘이서, 정확히는 카유크를 포함한 셋이서 자리를 함께하게 된 건 다음 날 오전이었다.

“고맙네.”

대공이 솔직한 마음을 터놓았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꿈 같군.”

“꿈이 아닙니다.”

“그렇지. 아주 긴 악몽을 꾼 뒤 깨어난 기분이야.”

좀처럼 듣기 어려운 대공의 나약한 말이었다.

그만큼 감격스러웠다는 뜻이겠지.

“정말 고맙네. 더는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야.”

힐데가르트는 쉬운 일이었다든가, 별거 아니었다는 말로 제 노력을 깎아내지 않았다.

대신 가만히 입을 다문 채 웃어 보였다.

“오늘 아침 의원과 주치의가 번갈아 다녀갔어. 모두 일리야의 건강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확답해 주었네.”

“다행이네요.”

“늙은이의 마음이 얼마나 놓였는지 모를 것이야.”

대공은 제 앞에 놓인 찻잔에 손도 대지 않고,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 자네 덕일세.”

이것은 대공과 그녀의 거래였다.

후견인을 맡아주는 대신, 손녀의 병을 낫게 해주는 그런 거래.

그걸 알면서도 오브론 대공은 물을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 더 바라는 건 없나?”

대공은 생각했다. 과연 힐데가르트가 찾을 수 있는 후견인이 저뿐이었을까?

아닐 것이다.

아카락시아 공작가는 손이 귀한 편이라 방계 친족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찾아본다면 얼마든지 다른 후견인을 찾을 수 있었을 테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이 선했기 때문에, 제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누군가를 살리고 돕기 위한 거래를 선택한 것이다.

“일리야를 살린 것은 나를 살린 것과도 같네. 자네는 한 번에 두 목숨을 살렸어. 무엇이든 말해보게.”

힐데가르트가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약속했던 대로 거래를 이행했을 뿐입니다. 무언가를 더 받는 건 이치에 맞지 않아요.”

“바라는 게 없다는 건가?”

“물론 있습니다.”

미하일 작위 승계식까지 오브론 대공은 성심껏 그들의 후견인이 되어야 한다.

“대공 각하께는 이 거래를 끝까지 이행해 주셔야 할 책임이 남아 있습니다.”

“……명심하겠네.”

“믿겠습니다. 신뢰야말로 거래의 기본이니까요.”

대공의 옆자리에 서 있던 카유크의 표정이 미미하게 변했다.

카유크는 그 순간, 그녀가 진정한 의미로 값진 것을 얻었다고 판단했다.

바로 오브론 대공의 신뢰였다.

‘내 직감이 맞다면 힐데가르트 공녀는 상당한 거물이 될 거야.’

그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다.

카유크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대공 각하.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니 제 마음도 가볍습니다만.”

힐데가르트의 눈빛이 달라졌다.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저주에 관한 이야기인가?”

“네.”

카유크의 몸이 움찔거렸다.

두 사람이 너무 태연하게 저주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으나, 카유크는 아직 그 말에 익숙하지 않았다.

일리야에게 저주라니.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카유크의 속이 뒤집힐 정도였다.

“각하께선 이 저주를 건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내 달라 하셨지요.”

“그랬네. 찾은 건가?”

힐데가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사실 이런 종류의 저주는 누가 걸었는지 알아내는 게 쉽지 않아요. 하물며 반쪽짜리 저주라서요.”

“반쪽짜리 저주?”

오브론 대공이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그녀가 차분히 설명했다.

“일리야 양의 저주를 풀며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분명히 목격했다.

저주가 형상화된 검은 뱀이 일리야만 노리지 않고, 오브론 대공과 카유크, 일리야를 번갈아 보던 모습을.

‘반면 같은 방에 있던 나와 휴리 경은 쳐다보지도 않았지.’

게다가 공격을 시도한 카유크에게 달려들기까지 했다.

그것은 저주가 일리야만을 노리고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증거였다.

보통 저주는 한 사람을 지정하여 그 사람의 목숨을 완전히 앗아갈 때까지 끈질기게 달라붙는다.

애초에 일리야만을 노린 저주였다면, 카유크가 어떻게 가로막든 집요하게 저주 대상만 공격했을 것이다.

하지만 뱀은 분명 카유크를 공격했다.

“제물로 바쳐진 뱀의 사체에 누군가가 문자를 새겨놓았더군요.”

[나는 오브론의 완전한 파멸을 바란다.]

썩은 뱀의 사체에 적혀 있던 글귀는 불쾌하리만치 선명했다.

“그럼 그 저주는…….”

“네, 정확하게는 오브론 대공가를 향한 저주였습니다. 그래서 카유크를 공격했던 겁니다.”

카유크가 무심코 숨을 삼켰다.

“따라서 제 결론은 이겁니다. 이 저주는 대공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

“불행히도 일리야 양이 그 표적이 되었지만요.”

이런 반쪽짜리 저주는 눈을 감고 던지는 다트나 마찬가지다.

누가 표적이 될지는 닥쳐보지 않으면 모른다.

“왜 오브론을 노렸지?”

“그건 알 수 없습니다. 논리적으로 추론해 보면, 범인은 오브론에게 적대감을 가진 사람이니 대공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상관없었다고 봐야겠죠.”

오브론 대공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대공가에 원한을 가진 사람이 한둘일까.”

“그 점을 고려해서 오브론을 골랐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하나 은원 관계를 추적하기 어려우니까요.”

“간사한 자로군.”

오브론 대공의 손등 위에 핏줄이 돋아났다.

힐데가르트는 조심스럽게 추측을 늘어놓았다.

“어쩌면 이 저주는 무언가를 실험하기 위한 걸지도 몰라요.”

처음부터 이상했다.

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해야 할 상자를 우물가 근처에 허술하게 묻은 걸까?

심지어 자물쇠가 걸린 상자도 아니고 나무 상자에 넣어 보관하다니.

게다가 표적을 정하지 않은 저주라니. 통하는지 시험해 보면 그만이라는 태도였다.

“실험이 끝났으니 다음 표적을 정해서 더 강한 저주를 걸지도…….”

힐데가르트는 간신히 분노를 참고 있는 오브론 대공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이크. 더는 말하면 안 되겠네.’

아니나 다를까, 무지막지한 분노를 터뜨리며 오브론 대공이 버럭 화를 냈다.

“감히 오브론을 상대로 실험을 해보았단 말인가!”

오브론 대공이 보기 드물게 언성을 높였다.

“감히 대공가를 건드리고도 무사할 거라 생각하는 건가! 청맹과니 시정잡배도 아닌 오브론이거늘!”

이만한 분노를 느껴본 게 언제였던가.

대공은 저주를 건 상대가 눈앞에 나타난다면 당장에라도 씹어먹을 기세였다.

한참 뒤, 씨근덕거리던 대공은 간신히 분노를 가라앉히며 말했다.

“공녀, 이번 일을 맡아준 것에 감사를 표하오.”

화산처럼 분노하던 대공이 엄한 말투로 말했다.

“오브론은 이번 일을 결코 가볍게 넘기지 않을 것이오. 대공가를 드나든 자라면 가신이라 할지라도 철저하게 조사하여 누가 그 상자를 묻은 건지 밝혀내겠소!”

힐데가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렇게 하셔야죠.”

“다만 한 가지 걱정이 있네. 이번 일은 무사히 넘어갔다지만 다음번은 모를 일이지.”

그녀는 이어질 대공의 말이 무엇일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염치없는 말이지만 다음번에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공녀에게 조언을 구해도 괜찮겠소?”

그녀가 어떻게 이토록 해박한 마도 지식을 알고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결코 손을 놓아서도, 적으로 돌려서도 안 되는 상대라는 점이다.

“언제든지 환영하겠습니다.”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힐데가르트는 빙긋 웃었다.

* * *

오브론 대공가의 주치의 길리언은 술에 잔뜩 취한 채 밤거리를 비척비척 걸었다.

사람들은 얼굴이 벌게진 길리언을 피해가기 바빴다.

하지만 길리언은 그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 쓰이는 일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연이겠지?”

길리언은 오브론에서 10년 가까이 주치의로 일했다.

제법 많은 돈을 모았으나, 얼마 전 빚더미에 앉았다.

모아둔 돈을 노름으로 날렸던 탓이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길리언의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다는 걸 알고 다가온 이가 어떤 상자를 건네며 말했다.

‘아무것도 묻지 말고, 이 상자를 대공저의 수맥이 흐르는 땅에 묻어두십시오. 그러면 300만 케루블을 드리겠습니다.’

길리언은 상자를 받아서 부탁받은 대로 했다.

거래자는 자신의 얼굴은 잊게 될 거라며 손가락을 튕겼다.

시일이 지나자 그의 말처럼 인상착의나 목소리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마법에 당했구나. 요사스러운 사술에 넘어간 거야.’

길리언은 그렇게 생각하며 몸서리쳤다.

그 상자가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알아볼 틈이 없었다.

허겁지겁 빚을 갚던 중, 일리야 공녀가 아프다는 소식에 수도로 와야 했기 때문이다.

공녀를 진찰하느라 상자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사용인들이 수군거리는 말을 들었다.

셋째 공자인 카유크가 공작령까지 가서 어떤 상자를 찾아왔다는 말이었다.

“우연일 거야. 우연…….”

그러나 자신에게 들려주듯 말해도 불안한 마음은 커질 뿐이었다.

생각해 보니 상자를 묻고 난 뒤 공녀가 쓰러진 타이밍이 절묘하리만치 맞아떨어졌다.

‘우연이었겠지?’

하지만 한 번 의구심이 생기니 떨쳐내는 게 어려웠다.

그 상자엔 무엇이 들었던 걸까?

도대체 누구였길래 그렇게 큰 금액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밀었던 걸까?

혹시 그 상자가 일리야 공녀와 무슨 관계가 있었던 건 아닐까?

뒤늦게 덜컥 겁이 났다.

“……빨리 영지로 돌아가서 확인해 봐야겠어.”

지금이라도 알아본다면 뭔가 놓쳤던 걸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걸어가던 길리언의 귓가에 울음소리가 들렸다.

야옹.

“……뭐야. 고양이잖아.”

까만 고양이 한 마리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노란 눈의 고양이는 길리언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재수 없게 웬 검은 고양이야. 저리 꺼져!”

길리언은 버럭 성을 낸 다음, 계속 다리 위를 걸었다.

문득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렇게나 걷다 보니 어느새 수도 외곽에서도 더 인적이 드문 곳으로 와버린 탓이었다.

사방이 묘지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야옹.

고양이 울음소리가 또 들렸다.

몸을 부르르 떤 길리언이 몸을 돌리며 윽박질렀다.

“꺼지라는 말 안 들려! 이 고양이 새끼가…… 뭐야.”

길리언은 비틀거리며 눈을 비볐다.

잘못 봤나?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노란색 눈이었는데…….”

왜 고양이 눈이 빨간색으로 변했지?

그가 몇 번이고 눈을 비비던 그때였다.

난간에서 그를 지켜보던 고양이가 다시 한번 울었다.

야옹.

“어…… 어어어……?”

길리언의 다리가 비척비척 움직였다.

어느새 난간에 기댄 그는 제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안 되는데. 이대로라면 사람들은 내가 술에 취해서 정신이 나간 사람으로 알 텐데.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길리언의 시야가 홱 뒤집혔다.

풍덩!

사람 하나를 집어삼킨 더러운 강물이 물방울을 튕겼다.

그러나 그 모습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야옹.

노란 눈의 고양이는 즐거운 듯 웃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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