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공녀님 (30)화 (30/166)

29화

다섯 별 가문에서도 가장 ‘떨거지’나 다름없는 아카락시아.

‘……그래.’

각오는 했다.

80년이나 흘렀으니, 세월과 함께 아카락시아의 위명도 깎여져 나갔을 거라고.

하지만 이렇게 적나라하게 들어보는 건 처음이었다.

마도학이 아카데미에서 퇴출당한 것도 모자라, 아카락시아가 다섯 별 가문에서도 떨거지라는 소리를 듣는 이 상황은 전생과 환생을 통틀어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세게 쥐었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그만하게.”

“하지만……!”

“일리야를 눈 뜨게 한 것도,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을 아는 것도 아카락시아 가문뿐일세.”

“각하!”

“한 가지 묻겠네, 길리언. 주치의라는 자격을 가진 자네는 지금 저 문을 나서서 일리야의 몸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나?”

“…….”

“그게 아니면? 그럴 가능성이 있는 방법을 찾았나?”

대공가의 주치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율리겐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나가보게.”

“……실례하겠습니다.”

밖으로 나온 주치의가 카유크와 힐데가르트를 발견하고 얼어붙은 건 그 직후였다.

“도련님? 그분은…….”

“처음 뵙겠습니다. 힐데가르트 아카락시아라고 합니다.”

힐데가르트는 주치의 길리언을 매섭게 쏘아보는 대신 흠 잡을 데 없는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카유크는 그녀의 눈이 웃고 있지 않다는 걸 파악했다.

“주치의 길리언입니다. ……일이 바빠서,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주치의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더니 잰걸음으로 사라져 버렸다.

“공녀.”

“대공 각하.”

오브론 대공이 뒤늦게 집무실 바깥 상황을 감지하고 나왔다.

오브론 대공은 여태까지 보았던 모습 중 가장 난처한 기색이었다.

얄궂게도 그 모습에 힐데가르트는 마음이 누그러드는 걸 느꼈다.

‘이성적으로 행동하자.’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가 있냐며, 도와주려는 사람을 뭐로 보는 거냐며 길길이 날뛸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건 ‘도와주러’ 온 게 아니다.

그녀가 이곳에 있는 건 거래를 위해서였다.

아카락시아의 현주소를 들먹이는 말에 일일이 현실을 부정하며 화를 내는 쪽이 훨씬 꼴사납다.

“……못 보일 꼴을 보였군. 정말 미안하네.”

“아닙니다.

삼류가 산의 높이를 재어보고 있을 때, 일류는 이미 산길을 걷고 있는 법이다.

“일리야 양에게 안내해 주시겠어요?”

힐데가르트는 주치의를 몰아세우는 대신 일류답게 행동하기로 했다.

그것이야말로 가문의 위상을 되찾을 방법이었으니까.

* * *

“그럼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리야가 잠든 늦은 밤.

힐데가르트는 침실 근처에서 대공과 그의 호위를 맡은 기사에게 신신당부했다.

“지켜보시는 건 상관없지만, 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섣불리 공격하지 마세요. 특히 자극하는 건 금물입니다.”

“알겠습니다.”

“오늘 일도 반드시 비밀로 해주세요. 저와 대공 각하, 기사님과 카유크. 이렇게 네 사람만 알고 있어야 해요. 그쪽은 그러니까…… 이름이?”

“휴리입니다.”

“휴리 경. 오늘 일은 대공 각하의 명령이 떨어지지 않는 한 무덤까지 가지고 간다고 생각해 주세요.”

“그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 안심하게.”

“일리야 양에게도 당분간 비밀을 지켜주세요. 알아서 좋을 게 없으니까요.”

“그렇게 하겠네.”

힐데가르트가 약속을 받아내는 동안, 카유크는 문제의 상자와 진검을 가지고 왔다.

대공에게서 멀어진 힐데가르트는 카유크 쪽으로 다가갔다.

“자. 찾던 거 여기 있어.”

“고마워.”

“그걸로 어쩔 생각이야?”

카유크는 힐데가르트의 말에 잠자코 따랐지만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이런 걸로 어떻게 저주를 풀고 일리야를 치료하겠다는 걸까?

“꽤 좋은 검이네. 네 거야?”

“그래.”

깊은 바다색 검집에서 뽑혀 나온 검날에는 예기가 도사리고 있었다.

“혹시 부러지면 큰일 나는 검이니? 소중한 사람에게서 선물 받았다든가, 사연이 있는 검이라면 지금 미리 알려줘.”

“딱히 사연 같은 건 없어.”

“잘됐네. 미련 없는 거 맞지?”

“난 원래 만사에 미련 따위 가지지 말자는 주의라서.”

“말이라도 못하면.”

힐데가르트는 손끝에 힘을 집중했다.

곧, 그녀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희미한 푸른색 마력이 검날에 얇게 둘리더니 사라졌다.

마력으로 검날을 보강하는 작업이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

힐데가르트는 카유크에게 검을 건네준 뒤, 상자를 넘겨받았다.

“잘 들어, 카유크. 오늘은 네 도움이 필요해.”

“도움? 뭔데?”

“내가 침실에서 이 상자를 여는 순간, 커다란 뱀 한 마리가 튀어나올 거야.”

“뭐? 뱀?”

카유크가 엉겁결에 되묻자 힐데가르트가 끄덕였다.

“하지만 상자에는 죽은 뱀밖에 없었잖아?”

“그러니까 미리 알려주는 거야.”

카유크의 실력이라면 뱀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커다란 뱀이 튀어나와서 일리야 양이나 너를 공격하려 든다면 그 검으로 베어버려. 그동안 나는 알아봐야 하는 게 있어.”

“도움이라는 게, 날 미끼 역으로 쓰겠다는 거였어?”

카유크가 투덜거렸다.

“어쨌든 네 말은 이걸로 일리야가 낫는다는 거지?”

“맞아.”

카유크는 일리야가 있는 침실을 흘끔 보았다.

“……알았어. 해볼게.”

“바로 그 자세야.”

대화를 마친 힐데가르트는 오브론 대공에게 눈짓했다.

이윽고 그들은 문을 열고 일리야의 침실로 들어갔다.

안쪽은 조용하고 아늑했다.

하지만 힐데가르트는 그곳에 발 디딘 순간 헛구역질을 할 뻔했다.

‘우욱…….’

침대 근처로 다가가지 못하는 검은 저주의 기운이 매캐한 연기처럼 방 안에 퍼져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잠든 일리야의 곁으로 다가갈수록 기운은 점차 옅어졌다.

‘성물이 제 역할을 해주고 있구나.’

힐데가르트는 협탁 위에 놓여 있는 하얀색 성모상을 바라보았다.

일리야는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카유크는 여동생을 보며 쓰게 웃었다.

이제 다 컸으니 인형은 필요 없다며 한사코 거절하더니.

잠잘 때는 세상모르고 침까지 흘려가며 인형을 껴안고 있다.

“…….”

손등과 팔목, 어깨까지 이어진 저 흉측한 검은 흔적만 아니라면 마음 편히 놀려줄 텐데.

카유크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이젠 힐데가르트가 어떤 방법으로 일리야를 치료할 생각인지, 두 눈으로 직접 봐야 직성이 풀릴 지경이었다.

힐데가르트는 일리야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연녹색 빛이 감돈 것도 잠시.

“우…….”

몇 번 뒤척거리던 일리야는 더욱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수면 마법이었다.

힐데가르트는 소녀의 어깨 끝까지 이불을 덮어준 다음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오브론 대공과 거리를 두고 테이블 위에 상자를 올렸다.

“절대로…….”

“자극하지 않겠네.”

“네, 그겁니다. 대공 각하께서는 만일을 대비해 지켜보고 계셔야 합니다.”

“알겠네. 그럼 부탁하겠네.”

힐데가르트는 카유크와 시선을 마주했다.

카유크가 고개를 끄덕이자 힐데가르트는 망설임 없이 상자를 열었다.

그 순간, 모두가 창문도 열어두지 않은 방 안의 공기가 세차게 요동치는 걸 느꼈다.

“……!”

카유크는 흡,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흩어져 있던 검은 저주의 기운이 순식간에 한데 모이더니 커다란 뱀의 형상으로 변했다.

‘그 말이 진짜였어?’

카유크가 파랗게 질린 채 검 손잡이를 세게 쥐는 동안, 뱀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뱀은 정확히 오브론 대공과 카유크, 일리야 쪽만 번갈아서 바라보았다.

같은 공간에 있던 힐데가르트나 휴리 경을 향해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곧, 고개를 흔들던 뱀이 일리야를 향해 달려들었다.

“카유크!”

“도련님!”

“둘 다 움직이지 마세요!”

목검을 맞대본 힐데가르트는 저 정도는 카유크가 얼마든지 막아설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카유크는 힐데가르트가 외치던 바로 그 순간 검을 뽑아서 휘둘렀다.

카앙!

단단한 뱀의 비늘이 검날을 튕겨냈다.

하지만 효과가 있었다. 카유크의 검을 둘러싼 푸른 마력이 뱀의 비늘을 부순 것이다.

시이이이익-!

성이 난 뱀의 머리가 카유크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

힐데가르트는 뱀이 저주해야 하는 상대가 아닌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광경을 똑똑히 목격했다.

‘이거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카유크는 질겁했다.

제 목을 물어뜯을 기세로 달려드는 뱀을 몇 번이나 후려쳤으나, 뱀은 다시 달려들었다.

“힐데!”

“조금만 버텨!”

힐데가르트는 냉정하게 외쳤다.

그녀가 곧바로 등을 돌려 상자 안의 뱀 사체와 애뮬릿을 확인했다.

제물로 쓰인 뱀의 사체는 절반 넘게 썩어서 흉측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위에 새겨진 글자가 분명히 드러났다.

[나는 오브론의 완전한 파멸을 바란다.]

힐데가르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건…….’

캉!

또 한 번 비늘이 검날을 튕겨내는 소리가 들렸다.

여태껏 실내에서 검을 휘두른 적도, 몸통만 한 뱀을 상대한 적도 없었던 카유크였다.

하지만 재주 좋게 검을 놀린 카유크가 침착하게 공격을 막았다.

뱀이 또다시 목을 물어뜯기 위해 달려들자 카유크는 검을 바로잡았다.

그 순간.

사아아아아악!

갑자기 검은 뱀이 온몸을 비틀며 발광하기 시작했다.

카유크는 깜짝 놀라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덜컥 겁이 난 그가 더욱 세게 검을 쥔 순간.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여유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 괜찮아.”

힐데가르트였다.

그녀가 제물로 쓰인 뱀의 사체와, 매개체인 애뮬릿을 마법의 불꽃으로 태우고 있었다.

카유크의 코앞까지 다가왔다가 물러나기를 반복하던 뱀은, 몸부림치더니 마침내 바닥으로 쓰러졌다.

타다닥, 타닥, 탁. 탁.

불꽃 튀는 소리와 함께 방 안에 가득 차 있던 독한 기운이 점차 옅어졌다.

화르르륵!

마침내 뱀의 사체가 완전히 타버리자, 검은 저주의 기운은 흔적도 없이 파스스 흩어져 버렸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방금 그건 대체…….”

힐데가르트는 반쯤 넋이 나가 있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창문을 열었다.

그녀는 불에 탄 뱀 사체와 애뮬릿을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숯이 되어, 이제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이 저주는 반쪽짜리 저주였다.

“끄, 끝난 거야?”

“이제 괜찮아.”

“정말이지?”

눈알을 굴리던 카유크는 퍼뜩 제정신을 차렸다.

“너…… 너 마법사였어? 왜 말 안 했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맞다!”

“대공 각하, 이제 괜찮습니다.”

수면 마법을 걸어둔 덕분에 일리야는 그 소란 속에서도 잠에서 깨지 않고 잠든 채였다.

카유크가 후다닥 여동생 곁으로 다가갔다.

“일리야……. 야, 막내야?”

“카유크, 일리야! 둘 다 괜찮은 게냐?”

“전 괜찮아요, 할아버지.”

대공은 카유크가 다친 곳이 없는지 살폈다.

손자가 멀쩡하다는 걸 확인한 그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곧바로 일리야를 내려다보았다.

“우웅…….”

오브론 대공이 손녀의 이마를 쓰다듬자, 일리야는 뒤척이며 인형을 끌어안았다.

“오빠…… 할아버지?”

그 평범한 모습에, 오브론 대공과 카유크 모두 할 말을 잃고 안도했다.

“벌써 아침이야?”

“아…….”

카유크는 주먹을 꽉 쥐었다.

“다행이다……. 진짜, 다행…….”

인형을 안고 있는 소녀의 피부가 서서히 예전처럼 새하얗고 깨끗하게 돌아오고 있었다.

내심 마음 졸이고 있었던 오브론 대공의 눈에도 물기가 스며들었다.

대공이 제 손녀와 손자를 와락 껴안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