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얕다.’
덤으로 물러 터졌다.
목검을 휘두르는 자세만 보아도 어떤 생각인지 훤히 보인다.
어차피 이길 승부, 소란이 일어나면 귀찮으니까 적당히 목검만 날려버리자는 얕은 생각.
‘뻔하지.’
힐데가르트가 몸을 반 바퀴 비틀고 카유크의 목검을 흘렸다.
따닥, 소리가 나며 경쾌하게 튕겨 나간 목검에 당황한 카유크가 허겁지겁 다음 일격을 내질렀다.
힐데가르트는 그 공격 또한 여유롭게 흘리며 입을 열었다.
“깜빡했는데.”
따닥! 딱!
힐데가르트의 목검이 카유크의 오른쪽 어깨를 강타했다.
카유크는 꺽, 소리를 내며 고꾸라질 뻔했다.
“항복하는 수도 있어. 어쩔래?”
“됐거든?!”
카유크는 무심코 성을 냈다.
‘방금 그 발놀림은 뭐지?’
그가 욱신거리는 팔을 붙잡은 채 힐데가르트를 보았다.
순식간에 호흡이 빨라진 저와 다르게, 소녀는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검을 잡아본 적 있었단 말이야?’
한층 어두워진 카유크의 푸른 눈이 신중하게 목검을 쥐었다.
그 순간.
“빈틈 발견.”
퍼억!
순식간에 간격을 좁혀온 소녀가 그의 옆구리에 목검을 때려 넣었다.
“크억…….”
기습?
아니다. 방심이나 요행을 노린 것도 아니다.
그냥 빨랐다.
너무 빨라서 보이질 않았다.
카유크는 무심코 목검을 떨굴 뻔했다. 눈앞에서 별이 튀는 것 같았다.
“뻔하지. 손가락에 굳은살도 없는 애한테 질 리가 없다.”
딱! 따따닥!
“감히 나를 연락책으로 쓸 만큼 대단해 보이지는 같은데 시험해 보자.”
따닥! 딱!
“잘 들어, 오브론 대공가 셋째.”
쩌정!
연신 두들겨 맞던 카유크가 창백한 표정으로 겨우 목검을 막았다.
“교만하게 자라난 어린애는 오만한 어른이 될 뿐이야.”
사각에서 찔러오는 힐데가르트의 목검이 쉴 새 없이 그를 난타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연격.
순식간에 좁아진 시야가 그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왜 이렇게 빨라?!’
카유크가 잘 막고 있는 게 아니었다.
막는 시늉이라도 잘해보라는 듯, 힐데가르트가 목검을 미친 듯이 날려대며 그를 봐주고 있었다.
‘틈을 봐서 반격해야 해, 안 그러면……!’
카유크가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청보랏빛 눈동자가 나긋하게 그를 훑어보는 순간.
‘아, 이거…….’
졌다.
직감과 동시에 패배가 닥쳤다.
빠아악!
힐데가르트의 목검이 카유크의 목검 손잡이 윗부분을 정확하게 가격했다.
텅! 데구루루-
카유크는 자기도 모르게 떨군 목검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내내 목숨줄처럼 붙들고 있었던 목검이 순식간에 땅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저런. 목검을 똑바로 들었어야지.”
힐데가르트의 목소리는 시합이 시작될 때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꽃에 벌이 날아들었다는 듯, 산들바람에 풀잎이 흔들렸다는 듯.
당연히 일이 일어났을 뿐이라는 저 태도.
반면 카유크의 손바닥은 얼얼하다 못해 바들바들 잔떨림이 일어날 정도였다.
“얼음으로 식히지 않으면 부어오를 거야. 어떻게 할래?”
“……어떻게 하기는.”
카유크는 열감이 느껴지는 오른손을 붙잡은 채 허탈하게 말했다.
“내가…… 졌어.”
완벽한 패배였다.
* * *
“아야야야…….”
“엄살 좀 그만 부려.”
“엄살이라니? 너, 자기가 얼마나 아프게 때렸는지 모르는 거지!”
저택으로 돌아온 카유크는 본격적으로 발갛게 부어오른 손바닥을 부여잡고 울부짖었다.
“봐! 완전 벌에 쏘인 것처럼 부었잖아.”
“그만 좀 소리쳐! 네가 마림바야? 건드리는 곳마다 소리 나게?”
카유크는 헝겊으로 싼 얼음주머니를 쥔 채 나 죽는다고 깽깽 소리를 질렀다.
힐데가르트는 진상을 상대하는 점원처럼 그를 보았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순순히 상자를 보여줬으면 됐잖아. 왜 쓸데없이 사람을 떠봐?”
“야. 내가 셋째여도 명색이 오브론인데, 보여달라면 보여주고 치우라고 하면 치우겠냐고!”
“넌 그 자존심 때문에 언젠간 큰코다치겠다.”
힐데가르트가 다리를 꼰 채 고개를 저었다.
“하던 이야기마저 하자. 상자 보여줄 거지?”
“혹시 이번에도 싫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 거냐?”
“너보다 강한 사람의 명령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몸으로 알게 될걸?”
“몸으로?”
“정확하게는 뼈. 몸에서 가장 단단한 정강이뼈로.”
“보여줄게. 그깟 상자.”
카유크는 아직 뼈가 부러질 만큼 자존심을 세울 각오가 없었다.
얌전히 항복한 그가 툴툴댔다.
“너 정체가 뭐야?”
“정체?”
“솔직히 말해봐. 아카락시아 공작가의 숨겨진 검술 천재라도 돼? 귀신이라도 들렸어? 어마어마한 힘을 숨기고 다시 태어난 거 아냐?”
이 자식 은근히 날카롭네.
힐데가르트는 한시도 쉬지 않고 구시렁거리는 저 입이 신기했다.
“시답잖은 소리 하지 말고, 이렇게 됐으니 네가 날 좀 도와야겠다.”
“돕다니? 뭘?”
“일리야 양 치료 말이야.”
“뭐?”
힐데가르트가 다리를 꼰 채 나긋하게 말했다.
“치료는 빠를수록 좋잖아. 정확하게는 저주를 푸는 거지만.”
“아니, 잠깐만. 잠깐.”
카유크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치료? 저주? 그게 다 무슨 소리야?”
“들은 그대로야.”
기선제압을 당해서인지, 카유크는 그녀와 만난 이래로 가장 고분고분한 태도였다.
힐데가르트는 그에게 사실을 털어놓기로 했다.
기민하고 빠르게 움직여 줄 손발로 카유크는 제법 괜찮은 상대다.
“일리야 양은 저주에 걸려 있어. 난 그걸 해결하기 위해 대공 각하와 거래했고.”
“그럼…… 일리야는 다 나을 수 있어?”
“물론이지. 네가 도와준다면 당장 가능해.”
카유크는 입을 쩍 벌렸다.
설마 할아버지가 아카락시아 영지까지 다녀온 이유라는 게……?
순간, 카유크는 힐데가르트를 떠본답시고 언짢게 굴었던 게 얼마나 아찔한 행동이었는지를 깨달았다.
“일단 네가 발견한 상자가 필요한데 보여줄 수…… 카유크?”
“어, 어?!”
넋이 나가 있던 카유크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며 끄덕였다.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말해! 다 준비해 줄게!”
“너 나랑 만났을 때도 그 말 했잖아.”
“윽…….”
“지금이랑은 태도가 몹시 다르시네요? 응? 나보다 약한 사람 명령은 듣지 않는다며?”
“……너 은근히 성격 나쁘구나.”
카유크가 얼음주머니를 주물럭거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하루하고도 반나절 뒤에 힐데가르트는 대공가를 방문하기로 했다.
거래는 빠르고 깔끔하게 끝낼수록 좋다.
심지어 아픈 사람이 대상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마무리 짓는 게 상책이다.
마차를 타고 가는 내내 카유크가 거듭 물었다.
“근데 진짜 일리야를 치료할 수 있단 거지?”
“응.”
“진짜로?”
“못 한다면 네 손에 정강이뼈가 부러져도 불만 품지 않을게.”
“아니, 부러뜨릴 생각 없거든?”
얘는 왜 이렇게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걸까.
카유크가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목검으로 두들겨 맞은 경험이 퍽 각별했는지, 카유크는 몰라보게 협조적인 태도로 나왔다.
덕분에 힐데가르트는 한결 수월하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대공 각하는?”
“저택에 계셔. 미리 연락했으니 널 기다리고 계실 거야.”
미하일과 레디스에게는 일리야 공녀의 병문안을 다녀오겠다고 둘러대며 나선 길이었다.
얼마 후 마차가 부드럽게 멈추자, 힐데가르트는 먼저 내린 카유크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조용한 곳이구나.”
“근처에 수도원이 있거든.”
일리야 공녀가 머무는 저택은 수도에서도 외곽에 자리 잡은 곳이었다.
저택에 발을 디딘 힐데가르트는 무심코 바닥에 깔린 대리석을 보고 웃어버렸다.
‘화이칼산 대리석이네.’
오브론이 하사받은 북부 영지는 유독 험난한 돌산이 많은 지역이다.
이는 건국 당시 대공가가 자치(自治) 가능한 대공국으로 독립하는 걸 경계한 황제의 노림수였는데, 덕분에 오브론은 반강제적으로 암석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났다.
뼈를 깎고 돌을 깎는 노력으로 백색 도시 화이칼을 이룩한 대공가의 자긍심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그 먼 화이칼에서 수도까지 대리석을 공수해 와서 깔다니.’
하여간 자존심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깐.
한때 솜씨 좋은 석공이며 세공사며 광부를 차지하기 위해 불꽃을 튀겼던 오브론과 아카락시아였는데.
‘세상일은 참 모를 일이지.’
힐데가르트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와 카유크의 걸음이 멈춘 건 대공의 집무실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대공 각하,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집무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는데, 옥신각신 다투는 소리가 안쪽에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일리야 아가씨의 치료를 정녕 다른 가문에게 맡기실 생각입니까?”
“길리언.”
“주치의인 제 능력이 부족하여 큰 도움이 되지 못한 건 압니다. 하지만 이건 정말 잘못 생각하신 겁니다.”
힐데가르트는 노크하려 드는 카유크를 막으며 문 앞에 섰다.
“저는 반대입니다. 다른 가문이 얼마나…….”
“교활하게 굴 수 있는지 알고 있으니 이제 그만하게. 길리언.”
대공이 피곤한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자네가 일리야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하는 소리라고 생각하겠네. 하지만 거기까지 하게. 내 결정에 토를 달 셈인가?”
“각하! 다른 곳도 아니고 아카락시아입니다! 다섯 별 가문에서도 가장 떨거지나 다름없는!”
“길리언!”
오브론 대공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말조심하게! 곧 손님이 온다고 말했건만 기어이 내 얼굴에 먹칠해야 만족하겠나!”
힐데가르트는 제 쪽을 흘끔거리며 눈치를 살피는 카유크의 시선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지는 것은 어쩔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