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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공녀님 (28)화 (28/166)

27화

마도학은 80년 전만 해도 어엿한 아카데미 교양 과목 중 하나였다.

비브롯셀 왕국에서는 글자를 떼자마자 배우는 학문이었건만.

“정말? 한 번밖에 못 봤다고?”

“그렇다니깐. 행상인 무리에 섞여 있는 걸 딱 한 번 구경한 게 전부야.”

힐데가르트는 아찔하다는 말을 몸소 체감했다.

마도학이 퇴출당할 정도로 마법을 다루는 이들이 줄어들었다는 건, 그만큼 마법사가 제국 내에 일절 녹아들지 못했다는 소리였다.

카유크를 물고 늘어져 봤자 소용없겠지만 힐데가르트는 착잡함을 느꼈다.

“……신문에서는 일리야 양이 깨어난 걸 기적이라고 했으니까. 혹시나 해서 물어봤어.”

“말도 마. 얼마나 소란스러웠는지 모를 거야. 오죽하면 재혼했던 고모까지 돌아오려 했다니깐.”

“막내가 사랑을 많이 받나 봐.”

그녀가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어쨌든 눈 떠서 다행이네. 그럼 이제 일리야 양은 괜찮은 거야?”

“완전히 다 괜찮은 건 아니야. 한숨 놓긴 했지만, 여전히 면회 금지.”

그래도 밀랍 인형처럼 창백했을 때보다는 나아졌다며 카유크의 얼굴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한 가지는 분명해.’

카유크는 아직 일리야가 저주에 걸렸다는 사실을 모른다.

‘대공이 저주에 관해서 비밀을 지킨 모양이야.’

좋은 판단이다.

힐데가르트는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

“혹시 말이야, 최근에 대공 각하 명령으로 대공령에서 수도로 보낸 상자 하나가 있을 거야. 그게 뭔지 알아?”

“뱀 상자 말하는 거야? 알지 그럼. 그걸 누가 찾았는데?”

카유크가 엄지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힐데가르트는 의외의 대답에 놀랐다.

“네가 찾았단 말이야?”

“할아버지가 찾아보라고 닦달하셔서. 처음엔 뭐 이렇게 황당한 명령을 내리시나 했는데……. 잠깐, 넌 그걸 어떻게 알아?”

“그 이야기 좀 해줘.”

힐데가르트가 의자를 바짝 끌며 카유크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카유크는 갑자기 눈을 빛내는 힐데가르트의 태도 변화에 당황했다.

이 상황은 뭐지?

“상자를 발견된 장소가 어디였어?”

“……대공저 뒤쪽에 있는 우물 근처야. 그거 찾느라고 사방으로 인부들이 삽질 좀 했지.”

카유크는 눈앞의 소녀가 왜 이런 걸 질문하는 건가 싶어 궁금했지만, 우선 착실하게 대답했다.

“우물 근처? 용케 찾았구나?”

“비교적 최근에 흙이 파헤쳐진 흔적이 있었거든.”

“상자 내부는 어땠어? 아니다, 상자는 어떤 모양이었어?”

카유크는 그녀가 참 이상한 걸 물어본다고 생각했다.

그가 힐데가르트를 관찰하며 차분히 정보를 풀었다.

“상자 자체엔 특별할 게 없었어. 나무로 된 상자였고, 뱀 사체랑 작은 장신구가 신문지에 싸여 있었지. 그게 다야.”

찻잔을 든 힐데가르트의 손이 멈췄다.

“그거 정말이야?”

“뭐가?”

“정말 그 상태로 묻혀 있었니?”

“뭐 하러 거짓말을 하겠어?”

힐데가르트가 미간을 구겼다.

‘저주의 매개체와 제물을 고작 나무 상자에 넣어뒀다고?’

그것도 허접스럽게 신문지에 싸서?

“혹시 상자엔 뭐 특별한 점 없었고? 뭐라도 좋아. 이상하다고 생각할 만한 건?”

“딱히? 오히려 그 안의 내용물이 기분 나빴지. 상자나 신문지에서는 특이한 게 없었어.”

그냥 흙이 좀 묻어 있던 게 전부였다며, 카유크는 솔직하게 답했다.

하지만 두 번이나 확답을 들었음에도 힐데가르트의 미간은 펴질 줄을 몰랐다.

‘특이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고? 그게 더 이상하잖아.’

무려 대공의 손녀를 저주하는 데 쓴 물건이다.

보통은 어떻게든 숨겨보려고 상자를 감추는 게 일반적일 텐데?

최소한 쉽게 열지 못하는 장치라도 설치해 두는 게 정상이건만.

‘흙이 파헤쳐진 흔적이 남아 있었다니. 그건 마치…….’

들켜도 상관없다는 것 같잖아.

“…….”

힐데가르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마구잡이로 물어보던 상대방이 갑자기 입을 다물자, 카유크가 그녀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얜 대체 이런 걸 왜 물어보는 거지?’

게다가 할아버지가 내린 명령은 어떻게 안 걸까?

오브론에 사람이라도 심은 건가?

도무지 머리를 굴려봐도 알 수가 없었다.

“그 상자, 지금은 누가 보관하고 있어? 언제든지 꺼낼 수 있어?”

“내가 따로 금고에 보관 중이야.”

“그래?”

힐데가르트가 반색했다.

“그럼 그 상자 내가 좀 볼게.”

“네가?”

“응.”

“…….”

“카유크?”

무슨 말을 해도 능청스럽게 대답했던 카유크의 입가에 삐죽, 심술이 스친 건 그때였다.

“싫은데?”

“뭐?”

“싫다고.”

힐데가르트는 뭘 잘못 들었나 싶었다.

“아니, 갑자기 왜?”

카유크는 저 자신만만한 고양이 눈매가 확 찌푸려지는 모습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치기 어린 대답에 힐데가르트의 눈썹이 삐딱하게 솟았다.

“카유크. 난 일리야 양을 돕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아, 일리야를 위해. 참 편한 핑계지. 내가 쫓아낸 돌팔이도 다 그렇게 말했던 거 같은데.”

카유크가 냉소적으로 그녀의 말을 반박했다.

“난 널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아. 내가 대공 각하께 상자를 확인하고 싶다고 말씀드리면, 각하께선 네게 명령하실 테니까.”

힐데가르트는 논리적으로 그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카유크는 히죽 웃으며 턱을 괴었다.

“그럼 그렇게 하든가.”

“괜히 빙빙 돌아갈 필요 없잖아.”

“내가 할아버지에게 들은 건 연락책을 맡으라는 말뿐이야.”

“너 낮까지만 해도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라, 어지간하면 돕겠다, 그러지 않았어?”

“아, 그거 말인데.”

카유크가 엄한 곳을 쳐다보며 딴청을 부렸다.

“마음이 변했어.”

“……이유는 뭔데?”

“이유가 필요해? 그럼 간단하지. 나는 나보다 약한 사람의 명령은 듣지 않거든.”

“…….”

“자. 됐지?”

이제 어떻게 나올까?

카유크는 우습다는 얼굴로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무작정 떼를 쓰려나?

대공 각하에게 말해서 혼을 내줄 거라고 신경질을 부릴까?

그것도 아니면 옛날만도 못한 아카락시아 공작가의 위세를 들먹일까?

설마…… 우는 건 아니겠지?

사실 그까짓 상자를 보여주는 일이야 카유크의 재량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내 직감이 맞다면 힐데가르트 공녀는 상당한 거물이 될 거야.’

거물이라니?

이 조그마한 여자아이의 어떤 부분이 할아버지에게 그만한 확신을 심어준 거지?

카유크는 저녁 식사 내내 힐데가르트를 관찰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란, 지극히 평범하다는 평가였다.

웃는 얼굴, 평범.

기품이나 교양, 이것도 아마 평범.

상식 수준도 평범.

‘아닌가. 평범 이하지. 저대로 사교계에 나가면 상식 부족으로 따돌림당할 건 뻔한데.’

나이답지 않게 차분하거나 태연한 구석이 있긴 했어도, 힐데가르트는 거물은커녕 무엇 하나 특별한 게 없어 보였다.

솔직히 말하면 실망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너보다 약하니까 말을 듣지 않겠다?”

“그렇지.”

“그럼 잘됐네. 그런 이유라면 내가 간단히 해결할 수 있으니까.”

“응?”

턱을 괴고 있던 카유크가 허리를 폈다. 믿기지 않는 소리가 들려온 건 그다음이었다.

“목검 가져와. 내 말을 들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줄 테니까.”

소녀의 웃음은 마치 너 잘 걸렸다는 듯 서슬 퍼런 구석이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카유크는 그녀를 황당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 * *

야심한 시각.

카유크는 손님방에서 멀리 떨어진 안뜰로 나왔다.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편안한 얼굴로 휙휙 목검을 휘두르는 힐데가르트와 달리, 그의 표정은 한없이 복잡했다.

‘진심인가? 날 검술로 때려눕히겠다고?’

카유크는 어릴 적부터 공작가의 일원이라면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할 교양을 전부 익혔다.

화술이나 학문은 기본.

체스, 승마, 검술, 외국어, 모든 걸 평균 이상으로 해냈다.

그에 비하면 힐데가르트는…….

‘손끝에 굳은살도 없는 애가 무슨 수로 이기겠다고.’

설마 단순한 오기인가?

유치한 도발에 화가 나서?

‘그런 거면 꽤 실망인데.’

체격, 근력, 실력. 셋 모두 압도적으로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이었다.

조금 유치하게 굴었기로서니 이렇게 앞뒤 가리지 않고 떼를 쓸 줄이야.

카유크가 눈을 찌푸렸다.

‘별 볼 일 없는 일에 시간 버리는 거 질색인데. 적당히 시늉만 하고 끝내야지.’

그때까지만 해도 카유크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다.

“서로 피곤하니까 빨리 끝내는 걸로 하자.”

“너 진짜 나랑 시합할 생각이야? 다친다?”

“내가? 그럴 일 없어.”

“없긴 뭐가 없어?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승부라니까.”

“왜? 네가 이길 것 같아?”

“당연한 거 아니냐?”

카유크의 대답에 힐데가르트가 다시금 웃었다.

참 일관적으로 채신머리없는 녀석이 아닌가.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지.”

“하아…… 그래. 마음대로 해라.”

카유크가 목검을 똑바로 쥐었다.

“울면서 오빠들한테 이를 땐 꼭 말해라? 네가 먼저 벌인 일이라고?”

“네가 먼저 와.”

“…….”

진짜 끝까지 저런 태도란 말이야?

“목검 놓치거나 경계석 밖으로 나가거나. 둘 중 하나만 해도 깨끗하게 끝내는 거다.”

카유크는 힐데가르트의 말을 건성으로 넘겼다.

어차피 그의 머릿속에는 목검을 놓치는 일도, 경계석 밖으로 나갈 일도 없었다.

차라리 빨리 끝내야지.

카유크는 자세를 낮춘 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울어도 책임 못 진다?”

빠른 도약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가온 카유크의 목검이 힐데가르트의 목검을 후려치려 들었다.

미동조차 없었던 힐데가르트의 입가에 피식, 비웃음이 스친 건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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