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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공녀님 (27)화 (27/166)

26화

“그런 걸 보통 자기 입으로 말하지는 않지.”

힐데가르트는 흡사 무지개색 개구리를 보듯 카유크를 보았다.

뻔뻔한 데다, 능글거리는 게 오브론 대공 가문의 특징이라지만 이 녀석은 좀 지나친 감이 있었다.

마치 자연에서 나올 수 없는 파격적인 생물체를 목격한 기분이었다.

‘뭐랄까…….’

검술 대회에서 마주친다면 울면서 부러진 검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고 싶은 녀석이네.

그러나 카유크는 그 시선을 다르게 해석한 듯했다.

그가 다 이해한다는 듯 끄덕였다.

“반하지 마. 약혼녀 있거든. 얼굴 본 적은 없지만.”

레디스보다 한 살 더 많은 것 치고는 애가 철이 없구나.

힐데가르트는 그 대단한 대공조차도 자식 손자 농사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한다는 점에서 세상이 제법 공평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그…… 래. 누군지는 몰라도 약혼녀가 참 복이 많구나…….”

명백한 반어법이었다.

대공은 왜 저런 녀석을 보낸 걸까?

밑바닥에 깔린 저의가 궁금하지만, 그건 나중에 물어보기로 하자.

“할아버지께선 바쁘시니까, 연락할 일이 있으면 내게 말하면 돼. 대신 전해 줄 테니까.”

거기까지 말한 카유크는 곧장 눈빛을 달리했다.

“그런데 할아버지와 네가 연락할 일이라는 게 대체 뭔지, 난 그게 참 궁금하거든? 뭔지 물어도 될까?”

“직접 여쭤보지 그래?”

“일일이 설명해 주실 분이 아니라서 말이야.”

카유크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힐데가르트는 시선 속에 담긴 의도를 금방 파악했다.

그녀가 삐딱한 목소리를 했다.

“너 지금 나 재어보니?”

“아, 그렇게 보였으면 미안하고.”

“아니라고는 안 하네?”

“에이. 미안하다니깐.”

이 녀석, 끝까지 부정 안 하잖아?

힐데가르트는 손님을 앞에 두고 대뜸 제 호기심부터 채우는 녀석을 기가 막힌다는 듯 바라보았다.

하지만 힐데가르트가 살짝 불쾌한 심기를 내비치자, 카유크는 그 이상 파고들지 않았다.

말투는 여전히 장난스럽고 가벼웠지만, 본능적으로 사람 사이에 파고드는 방법을 아는 것 같았다.

“기분 나쁘게 하려는 게 아니야. 네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그랬던 거지.”

설마 나보다 어릴 줄은 몰랐지만.

카유크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때 창밖에서 미하일과 레디스의 말소리가 들렸다.

벌써 용건을 끝마치고 돌아온 모양이었다.

카유크는 바깥 상황을 파악했는지 금세 손바닥 뒤집듯 화제를 바꿨다.

“대답하기 싫으면 괜찮아. 직접 알아볼 시간은 앞으로도 많으니까.”

“너…….”

“난 당분간 저택에서 머물 거야. 편하게 찾아줘.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따로 말하고. 어지간하면 도울게.”

카유크는 언제 사람을 재어보았냐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전 이만. 소공작님께 인사 좀 하러 물러나지요, 공녀.”

“카유크 오브론.”

힐데가르트는 냉큼 그 자리에서 도망치려 하던 카유크를 넌지시 불렀다.

“너 기억해 뒀다.”

“뭐?”

“잘해보자고.”

힐데가르트는 그렇게 말하더니 카유크보다 먼저 응접실을 나갔다.

남겨진 카유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꼬리처럼 살랑살랑 흔들리는 은발 너머로 좁은 어깨가 보일 듯 말 듯 했다.

‘기억해 뒀다?’

얼굴 붉히며 잘 부탁한다는 게 아니라?

그리고 잘해보자니? 뭘?

‘저런 건방진 반응은 또 처음인데.’

카유크의 푸른 눈이 재밌는 듯 그녀의 등을 좇았다.

* * *

그날 오후, 남매와 카유크는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카유크는 미하일과 레디스에게 제법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

저보다 한 살 많은 미하일에게는 꼬박꼬박 형님이라고 불렀지만, 반대로 한 살 어린 레디스에게는 그냥 말을 편히 하라며 친구로 대했다.

가만 보고 있으니 저렇게 사교성이 좋을 수가 없었다.

우리 손자가 저 정도로 성격이 좋다고 어딜 가서 으쓱이기 좋은 재질이랄까.

하지만 힐데가르트는 그가 자신을 가늠해 보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웠다.

‘왜 나한테만 묘하게 태도가 다른 건데?’

이유를 알 수 없는 점이 살짝 거슬린다.

하지만 걸고넘어지는 것도 우스웠다.

식사는 카유크 덕분에 나름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흘러갔다.

“그럼 미하일 형님은 후계자 수업을 받고 계신 건가요? 내년에는 정식으로 작위를 물려받으시는 거고?”

“맞아. 대공 각하께서 도와주신다고 하니 내가 열심히 해야지.”

“와. 우리 큰형님이 들었으면 엄청나게 부러워했을 말이네요.”

“큰형님?”

“아, 우리 큰형님이요. 올해 스물다섯이지만 아직도 작위를 이으려면 멀었거든요. 워낙 할아버지 존재감이 크신 데다 가문도 크다 보니.”

은근슬쩍 자기 집안 자랑을 끼워 넣네.

그러면서도 식기를 쥐는 손이 한 번도 흐트러지지를 않았다.

대공가의 일원답게 철저하게 배워온 티가 났다.

“다음 작위를 물려받는 건 아버님이 아니시고?”

“그게, 저희 쪽은 아버지가 너무 오랫동안 할아버지와 일을 해오셔서. 작위는 곧바로 형님에게 상속될 예정이에요. 피곤하시다나.”

“그랬구나. 처음 듣는 이야기네.”

“이건 외부로는 발설하지 말아주세요.”

여기서니까, 우리끼리니까, 남이 아니니까 하는 말이라며 눈웃음을 친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네.’

그렇게 대단한 비밀은 아니지만, 어쨌든 허물없이 얽혀드는 태도 하나만큼은 일품이었다.

‘한 대 때려주고 싶은 뻔뻔함에 유능함까지.’

한 가지는 확실했다.

아마 카유크의 나이가 스물다섯이었다면 작위는 큰형님이 아니라 그의 몫으로 돌아갔으리라.

‘타고난 오브론이네.’

어쩐지. 왜 하필 셋째 손자를 연락책으로 삼았나 싶었더니.

‘이래서였구나?’

오브론 대공은 제 셋째 손자가 영민하고 쓸 만하다는 걸 진즉 간파했던 모양이다.

저녁 식사를 마친 힐데가르트는 방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이브닝 티를 마실 때 즈음이었다.

노크와 함께 초대 손님이 찾아왔다. 카유크였다.

“찾았다면서?”

“바쁘지 않다면 잠깐 차 마시고 갈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먼저 권해주는 차를 거절할 수야 없지.”

카유크는 선뜻 힐데가르트가 손짓한 테이블 맞은편에 앉았다.

“대공 각하께 전할 말이 있는데, 그 전에 몇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

“아, 얼마든지. 물어봐. 이래 봬도 이것저것 아는 게 많거든. 안 되는 거 빼곤 다 알려줄게.”

“괜히 한마디씩 덧붙이는 건 민망하니까 하는 행동이니?”

“…….”

“재밌네. 넌 친하지 않을수록 꼭 한마디씩 말이 많아지는 타입인가 봐.”

식사 시간 때도 느꼈던 거지만, 카유크의 차분한 표정은 어색한 상대 앞에서 더욱 많이 웃고 떠드는 얼굴로 변한다.

그녀의 지적에 무슨 말을 해도 능청스럽게 받아치던 카유크가 처음으로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입을 다물었다.

힐데가르트가 빙긋 웃곤, 맞은편에 앉은 카유크를 위해 직접 차를 따라주었다.

‘살짝 되바라진 녀석이긴 해도 근본이 나쁜 녀석은 아닌 거 같으니까.’

너른 마음으로 품어주기 위해서 차나 한잔 대접하자…… 같은 이유로 부른 건 아니었다.

그녀는 가볍게 오브론 대공가의 내부 분위기와 수도의 상황을 알아볼 생각이었다.

“수도가 떠들썩하네. 검술 대회 본선도 아닌데 예선전 시작 전부터 이렇게 인기일 줄은 몰랐어.”

“그래? 발프람은 처음이야?”

“일단 그렇다고 해둘게.”

힐데가르트가 일부러 모호하게 대답한 줄도 모르고, 카유크는 피식 웃었다.

‘하긴, 아카락시아니까. 다 망해가는 집안 출신이라도 자존심 좀 세우고 싶겠지.’

같은 다섯 별 공작가로 꼽힌다 해도 수도에 일곱 채가 넘는 저택을 가진 오브론과는 하늘과 땅 차이니 저렇게 대답할 수밖에.

“떠들썩할 만도 하지. 평민들 사이에서는 이만한 볼거리가 또 없잖아. 전야제부터 피날레까지 사람 구경은 실컷 할걸?”

카유크는 잔뜩 젠체하며 나불거렸다.

“오브론에서는 누가 나가?”

“올해는 불참하기로 했어.”

“일리야 양 때문에?”

“……그런 셈이지.”

카유크의 입가에서 잠깐이지만 미소가 사라졌다.

힐데가르트는 주의 깊게 그 모습을 지켜보며 한마디씩 이어나갔다.

“신문에서 읽었어. 눈을 떴다면서? 의원이 많이 다녀간 게 차도가 있었나 봐.”

“딱히 그렇진 않았어. 대부분 돌팔이였거든.”

힐데가르트가 찻잔을 앞까지 밀어주자, 카유크는 심드렁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남의 절박한 마음은 모르고 검증도 안 된 처방전을 써오질 않나,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의술이라고 사기를 치러 오질 않나.”

그것들을 쫓아내며 직접 엉덩이를 뻥뻥 차주는 게 카유크가 할 일이었다.

“마법사는 찾아오지 않고?”

“뭐? 마법사?”

카유크는 닭이 뱀을 낳았다는 소식을 들은 것처럼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아카데미 과목에서 마도학이 퇴출당한 게 10년도 넘었어. 나도 살면서 딱 마법사는 한 번 봤다, 한 번!”

힐데가르트는 기함할 뻔했다.

‘마도학이 퇴출당했다고?’

그럼 요새 애들은 대체 뭘 배우며 지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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