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수도 발프람은 줄곧 제국의 중추 역할을 해온 곳이다.
따라서 다섯 별 가문은 수도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졌다.
북쪽으로는 오브론, 서쪽으로는 랑케르트, 동쪽으로는 이베르타가 터를 잡았다.
상대적으로 드넓은 남부로 내려간 가문은 두 곳.
바로 아카락시아와 몬테를로다.
몬테를로는 바다의 신이 부른다는 소리와 함께 최남단에 해양 도시를 세웠다.
아카락시아는 자연스럽게 남부의 중간 지점에서 교통의 요충지로 자리매김했다.
힐데가르트 일행은 잘 닦인 도로를 달려 하루 반나절 만에 수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수도의 관문을 통과하자, 마차는 시가지로 이어지는 내리막길을 힘차게 달렸다.
로빈이 창문을 열며 말했다.
“아가씨! 저길 보세요. 사람이 엄청나게 많아요!”
로빈의 말마따나, 발프람의 거리는 바삐 오가는 마차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힐데가르트는 다치지 않게 조심하며 마차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신기하네. 많이 변했는데 여전한 게 많아.’
저녁이면 야시장으로 바뀌는 약재 거리, 탁 트인 중앙 광장.
사람들의 행색은 변했지만 거리의 형태는 여전했다.
학교도 새로 건물을 올린 것치고는 예전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반면 옛 위엄을 완전히 잃고 볼품없이 변한 곳도 있었다.
바로 신전이었다.
‘세상에…….’
힐데가르트는 저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신전의 건물은 여전히 높이 올려다봐야 할 만큼 컸다.
하지만 옛날과 비교해 보면, 드나드는 사람 숫자가 훨씬 적어진 것 같았다.
포교를 위해 재주 많은 이들이 연극과 연설을 펼치던 극장은 텅 비어 있었다.
가파른 언덕을 깎아 만든 계단식 객석도 스산하긴 마찬가지였다.
빛바랜 돌기둥이 세월의 흔적을 느끼게 했다.
한때는 굉장한 위용을 자랑했고, 건물도 거대했던 만큼 쓸쓸하고 휑한 느낌이 유독 심했다.
환생 이후 첫 문화적 충격이었다.
‘하긴, 내가 마성신을 봉인해 버렸으니, 신전이 더 재미 볼 구석이 사라졌겠지.’
이런 건 세상이 더 좋아졌다고 해야 하는 건가?
절대로 무너질 일 없을 것 같았던 신전이 쇠퇴한 모습을 보고 있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대공 각하께서 대공저를 빌려주셨다고 하셨죠?”
“아, 응. 로빈도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거야.”
그러고 보니 앞으론 수도에서 머물 저택을 구해야겠네.
아카락시아 공작령의 본 저택이야 무사하지만, 수도에 있었던 별저는 팔아버렸다고 했다.
‘나중에 미하일이 공작이 되면 수도에 올 일도 많아질 텐데. 하나 마련해야겠어. 어디가 좋을까?’
옛 저택을 다시 사들이는 방법도 있겠지만, 이왕이면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게 좋지 않을까?
괜찮은 저택이 매물로 나와 있으려나?
고민하는 사이 마차는 랑베르 거리로 들어섰다.
“……여기 꽤 살기 좋아 보이네.”
“유명한 시인이 살았던 곳이래요.”
“아, 어쩐지. 책 보는 사람이 많구나 싶었어.”
깨끗하게 정리된 거리는 조용하고 살기 좋은 곳처럼 보였다.
얼마 뒤 우리는 오브론 대공저에 도착했다.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사용인들이 저택 밖으로 나와서 우리를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미하일 아카락시아 소공작님. 레디스 도련님. 힐데가르트 아가씨. 이쪽의 레이디께서는?”
“저는 로빈이라고 합니다. 세 분을 돌보고 있어요. 말씀은 편히 낮춰주시길.”
“그러셨군요. 저는 이 저택을 관리하는 유바라고 합니다.”
마흔 살쯤 되어 보이는 남성이 나와서 정중히 인사했다.
“손님들을 극진히 모시도록 연락받았습니다.”
“처음 뵙겠습…… 아니, 처음 뵙겠소. 미하일이요.”
힐데가르트는 미하일의 말투에 그만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비슷하게 웃긴 건 레디스도 마찬가지였는지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오브론 대공저의 사용인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저택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많이 피곤하실 텐데 우선 방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부탁하지.”
“그럼 이쪽으로.”
유바는 저택 소개를 저녁으로 미루었다.
오랜 시간 마차를 탄 사람으로서는 그 배려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짐을 풀었다.
다음 날 오후.
힐데가르트는 의욕적으로 식사 중인 레디스에게 물었다.
“오빠들, 오늘 외출한다며?”
“어. 검술 대회 신청하러 갈 거야. 너도 갈래?”
“난 됐어. 좀 더 쉬고 싶어.”
그러자 미하일이 반질반질하게 닦은 안경을 쓰며 말했다.
“해지기 전에는 돌아올 거야. 저녁에는 오브론 대공가에서 손님이 오신다고 했거든.”
“그래? 대공가에서?”
손님이라.
혹시 그때 말했던 연락책인가?
‘셋째 손자……. 카유크라고 했었지 아마?’
어떤 녀석이려나.
힐데가르트는 궁금증을 뒤로하고 두 사람을 배웅했다.
거실에서 시간을 보내며 쉬기로 한 그녀는 가장 먼저 신문과 잡지를 손에 집었다.
신문에는 날이 갈수록 검술 대회에 관한 기사가 늘어가고 있었다.
‘우승 후보. 틸리아 랑케르트, 팔엔 르왈메이. 유르키스 안시…….’
팔도 안으로 굽는 게 사람이라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아보았지만 레디스의 이름은 실려 있지 않았다.
‘아직 신청을 안 했으니 어쩔 수 없나.’
꼭 주목받는 게 좋은 일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부담감을 심어주는 데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이 우승해 버리면 체면을 구기니까.
그래서 참여를 안 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혈기 왕성한 공작가 자제들이 참여했다.
‘나 때는 우승자를 황궁으로 초대해서 만찬도 대접했는데 그것도 여전하려나?’
그렇게 저택에서 피곤을 풀고 있을 때였다.
“힐데가르트 공녀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응?”
힐데가르트는 신문을 내려놓고 창밖을 보았다.
혹시?
“카유크 오브론 공자님이 따로 뵙기를 청하십니다.”
역시나.
오브론 대공이 보낸 사람이 벌써 온 모양이다.
* * *
응접실에서 기다리던 카유크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한 번 훑어보며 씩 웃었다.
칼같이 재단한 소맷단.
오브론 대공가 직계만 달 수 있는 푸른 커프스.
맵시 있게 차려입은 안쪽 재킷에서 은색 시곗줄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모습까지.
‘잘생겼네.’
완벽하게 기품 있는 모습.
이 정도면 손님을 마주하기에는 흠잡을 곳 없다.
‘역시 오브론은 검은색이지.’
옷차림 모두 준수한 외모를 뒷받침하는 훌륭한 날개였다.
그렇게 말하며 거울을 살피던 카유크는 고민 끝에 일부러 주름이 생기도록 셔츠를 한 번 구겼다.
‘나한테 반하면 곤란해. 할아버지가 잘 살피라고 했는데.’
대공이 들었다면 저 되바라진 손자놈이 또 저런다며 지팡이를 두드렸을 모습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공자님, 아카락시아 공녀님께서 오셨습니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기다리던 사람이 들어왔다.
“수고했어. 이만 나가봐.”
응접실에서 만난 손님을 서재로 불러들인 사람처럼 대하는 태도.
“만나서 반가워, 힐데가르트 공녀. 카유크 오브론이라고 해.”
그런 주제에 또 깍듯이 인사하는 모습이 재미있는 녀석.
힐데가르트가 느낀 카유크의 첫인상은 대충 그랬다.
“힐데가르트. 아카락시아 공작가의 셋째야.”
“이야, 우연이네. 나도 마침 셋째인데. 잘 통할 것 같지 않아?”
영혼 없는 인사부터 던지면서, 통하기는 무슨.
힐데가르트가 픽 웃거나 말거나 카유크는 꿋꿋하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힐데가르트가 손을 건네자 그가 손등 위에 입을 맞췄다.
“할아버지 대신이지만, 오브론 저택에 온 걸 진심으로 환영해.”
“환대 고마워. 대공 각하께도 그렇게 전해줘.”
뭐지?
카유크는 어긋난 태엽처럼 무언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분명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소녀다.
하지만 손등을 거두며 우아하게 바라보는 태연함과 당당함이 독특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그 태연함은 대화를 이어나가면서 조금씩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오빠들은 잠시 외출했어. 금방 돌아올 거야.”
“그래? 잘됐네. 같이 저녁이라도 할까 하는데 괜찮을까?”
“좋을 대로.”
힐데가르트가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 모습은 카유크가 예상하던 것과는 여러모로 달랐다.
소리치며 기뻐하지는 않더라도 얼굴을 붉히며 끄덕이는 반응 정도는 돌아오는 게 정상인데?
카유크는 조금 더 뻔뻔하게 들이대 보기로 했다.
“그럼 그동안 같이 있을까?”
“뭐?”
“혼자서 심심할 거 같아서. 내가 저택을 소개해 줄게.”
“그거라면 괜찮아. 어제 사용인이 친절하게 소개해 줬으니까.”
이게 아닌데?
카유크는 삐거덕거리는 고개를 곧게 바로 세웠다.
착각인가? 소개 끝났으면 이만 가봐도 되겠냐는 시선이 느껴지는 건?
“그래? 그럼 다시 한번 정식으로 소개할게.”
“또 뭘?”
“내가 자기소개를 너무 대충 한 것 같아서 말이야.”
카유크는 크흠, 에흠, 하고 다시 한번 목소리를 고른 뒤 자기 손으로 구겼던 셔츠를 다시 빳빳하게 폈다.
“카유크 오브론. 나이는 열다섯으로 오브론 대공가의 셋째야. 특기는 승마. 취미는 얼굴.”
“얼굴?”
“응. 얼굴.”
역시, 마지막 단어를 넘기긴 어려웠지?
카유크가 유쾌하게 눈웃음을 쳤다.
“나 정도면 잘생겼잖아.”
그러나 카유크의 당당함은 안 좋은 곳을 스쳤다.
이 녀석 왜 이렇게 뭘 소개하지 못해서 안달이냐는 눈으로 카유크를 보던 힐데가르트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혹시 자기애가 심한 편이니?”
“자기 객관화 능력이 뛰어난 편이라 해줘.”
“…….”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얼굴까지 잘생겼잖아. 얼굴이 취미일 수도 있는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