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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공녀님 (23)화 (23/166)

22화

“대공 각하께서 해주신 약속이 절대 가볍지 않으실 거라고 믿었는데요.”

예상했던 반응이기에, 그녀는 준비했던 대답을 내놓았다.

“제가 10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천재라는 것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정확하겐 80년에 한 번이지만.

“대단하군.”

“마도 지식이요?”

“자네가 말일세.”

좀 그런 편이죠.

힐데가르트는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칭찬 감사합니다. 제자 한둘쯤 있어도 이상할 것 없을 정도랍니다.”

은근슬쩍 제자 모집 예정임을 어필한 힐데가르트가 혼란스러워 보이는 대공을 달랬다.

“벌써 세 번째로 말씀드리는 건데 정말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저주를 풀 수 있다고 자신하는가?”

“네, 이런 저주는 제물과 매개체를 찾는 일이 가장 어렵습니다. 하지만 대공 전하께서는 그 두 가지를 모두 찾으셨으니 자신할 수밖에요.”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들킨 저주는 삼류다.

반면 그녀는 일류였다.

힐데가르트의 손에 걸린 이상 어림도 없었다.

껍질을 까듯 모조리 벗겨서 알맹이를 뭉개버릴 것이다.

“반드시 일리야 양의 저주를 풀어드리겠습니다. 약속드리지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은 오브론 대공은 복잡한 얼굴을 했다.

‘저주라니.’

손녀 일리야는 이제 고작 열 살이다.

대체 누가 원한을 가진단 말인가?

겪어보지 못했다면 허무맹랑한 말이라고 몰아세웠을 것이다.

오브론 대공은 이미 손녀를 치료하기 위해 수많은 의원을 만나보았지만, 하나같이 불신과 환멸을 불렀다.

하지만 힐데가르트는 달랐다.

그녀는 천 리 밖에서 손녀가 저주에 걸렸다는 걸 간파했다.

‘편지로 반쪽짜리 해결법을 미리 알려준 것도 이걸 위해서였군.’

힐데가르트는 일리야가 눈을 뜰 것도, 제물과 저주의 매개체가 있을 것도 예상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일……. 저주를 푸는 방법은 그녀와의 거래를 통해서 얻을 수 있게 한 것이다.

‘훌륭하군.’

오브론 대공은 작게 감탄했다.

‘이 나를 상대로 판을 짜는 능력이 제법이야.’

힐데가르트는 고작해야 막내 손녀인 일리야보다 두 살 더 많을 뿐이다.

하지만 오브론 대공은 그녀와 대화하는 내내 대단히 원숙한 인물을 상대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몹시 오묘한 기분이었다.

힐데가르트는 오브론 대공이 갑자기 입을 닫아버려서 당혹했다.

왜 저렇게 빤히 보지?

“궁금한 게 있으시다면 얼마든지 물어보셔도 됩니다. 아, 저주하는 방법은 제외하고요.”

“수맥 위주로 조사하라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수분은 마력을 끌어당기기 쉬운 물질 중 하나거든요. 저주가 담긴 제물과 매개체를 대공령에…… 원하는 지역에 심고 빠르게 퍼뜨리려면 수맥이 흐르는 땅은 필수라고 할 수 있죠.”

무엇을 물어봐도 막힘이 없다.

무의식적으로 당황하거나, 눈을 굴리는 일도 없었다.

지어낸 말로 이렇게까지 유창하고 논리정연한 말을 할 줄 아는 거라면 희대의 사기꾼이나 진짜 천재,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대마법사의 재목인가.’

과연 아카락시아, 라고 해야 할까.

존재감만큼은 비 내린 뒤 나타나는 무지개처럼 선명하고 화려하다.

“알겠네. 자넬 믿겠어.”

감탄하던 오브론 대공은 곧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

“한 가지만 물어보겠네. 저주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나?”

“……확답을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애뮬릿을 직접 살펴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누가 저주를 건 걸까?

그건 힐데가르트도 궁금한 부분이었다.

애뮬릿을 직접 조사해 본다면 실마리가 잡힐지도 모른다.

“반드시 알아내 주게.”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손녀에게 끔찍한 저주를 걸었다.

오브론 대공은 이 문제를 결코 가볍게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그 상자는 수도로 보내라고 연락해 두겠네. 언제 수도로 올 텐가?”

“준비가 끝나면 곧장 발프람으로 가려 합니다. 다만…….”

힐데가르트는 난처한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머물 곳이 마땅치 않아서 조금 걸릴 수도…….”

“수도의 대공저 중 하나를 준비해 주겠네.”

젠장, 역시 오브론은 수도에 저택이 많구나!

‘우리 가문도 꼭 다시 사들여야지.’

힐데가르트는 분한 마음을 감추고 다소곳하게 인사했다.

“호의에 감사드려요. 그럼 이걸로.”

“거래는 완벽히 성립되었네.”

두 사람이 눈빛을 교환하며 끄덕였다.

* * *

공작령을 떠날 때가 되자, 오브론 대공은 대공령에서 불러온 교사를 미하일에게 붙였다.

“이쪽은 내가 직접 부른 교사일세. 내 아들의 후계자 교육을 맡았던 사람이니 도움이 될 것이야.”

“네!”

“그리고 주기적으로 한 번씩 서로의 공작령에 방문하기로 하지. 책상 앞에서 배우는 게 전부는 아니니까.”

품이 많이 드는 원거리 교육이지만 상대가 오브론 대공이라면 그렇게 해서라도 배울 가치가 있었다.

“레디스 공자가 스칼렛 스워드에 참가한다고 하였지. 곧 수도에서 다시 만나겠군.”

“대공 각하께서도 수도로 가시나요?”

“그럴 생각일세. 참, 마땅히 지낼 곳이 여의치 않을 테니 대공저를 빌려주겠네.”

오브론 대공은 깜짝 놀라서 한사코 거절하는 미하일을 순식간에 설득시켰다.

원만한 거래를 위해 나와의 연락책은 따로 두기로 했는데…….

“셋째 손자 카유크를 연락책으로 보내겠네. 수도에 오거든 그 아이를 통해 일정을 잡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참, 가시기 전에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무언가?”

“현 황제 폐하…… 그러니까…….”

힐데가르트는 이름이 일부러 기억나지 않는 척했다.

“막…… 막시…….”

“막시밀리언 쥬브네스 드롯셀마이어 황제 폐하 말인가?”

“…….”

힐데가르트는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지는 걸 느꼈다.

정말이구나.

정말 막스가 살아 있다.

“……네. 혹시 막시밀리언 폐하께서는 스칼렛 스워드 결승전을 참관하시는지요?”

“글쎄.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빠짐없이 참관하셨지만 지금은 모르겠군. 연세가 연세이니 말이야.”

“그렇군요. 먼발치에서나마 황제 폐하를 뵙고 싶었는데 아쉽습니다.”

힐데가르트는 표정이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숙였다.

“그럼 수도에서 기다리고 있겠네.”

“살펴 가세요.”

대공은 가볍게 끄덕이며 배웅을 받은 뒤 공작가를 떠났다.

오브론 대공이 떠난 뒤로 저택은 평온 그 자체였다.

특히 후계자 교육을 받을수록 미하일의 눈동자에는 생기가 넘쳤다.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지치고 피곤해 보이는 인상은 온데간데없었다.

“오빠, 저녁 먹어.”

“응?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니?”

서재에 있던 미하일이 고개를 들었다.

그가 흉기로도 쓸 수 있을 만큼 두꺼운 책을 덮으며 일어났다.

“너무 열심히 공부하는 거 아냐?”

“괜찮아. 혼자서 뭘 해야 하는지 몰랐을 때보다는 훨씬 나아.”

“그럼 다행이지만…….”

“그보다 힐데, 수도는 언제 올라가고 싶니?”

미하일이 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

“빠를수록 좋긴 해. 오빠는 어떡할 거야? 같이 올라갈래?”

“당연하지. 어떻게 너희끼리만 보내겠어.”

“공부할 거 많지 않아?”

“그래도 같이 가야지. 이젠 내가 너희의 보호자야.”

미하일의 눈동자는 또랑또랑하게 빛났다.

아니라고 부정하면 상처받겠지?

“게다가 검술 대회는 한 달이면 끝나잖아? 그렇게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니 괜찮아.”

“알겠어. 그럼 같이 올라가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힐데는 수도에 올라가면 뭘 하고 싶어?”

“음……. 일단 이곳저곳 돌아다녀 보고 싶어.”

“그러면 같이 다니자. 레디스 응원 선물도 사고, 네 옷도 사야지. 새 구두도 가지고 싶다고 했잖아.”

“그럼 오빠 옷도 새로 사. 맨날 비슷한 옷만 입고 있잖아.”

“수도에 올라가자마자 의상실부터 들러야겠는걸?”

사실은 의상실 말고도 훨씬 급한 용건이 많지만 여기서는 그러자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식당에 도착한 우리를 기다리는 건 세 사람 몫의 식사였다. 하지만 자리에 앉은 건 나와 미하일뿐이었다.

“레디스는?”

“수련 중이세요.”

“아직도? 벌써 저녁이잖아. 오늘 아침 식사도 거르지 않았어?”

“공복이어야 훈련이 잘되신다나 봐요. 그래도 중간중간에 제가 식사를 챙겨서 보냈어요.”

“으휴, 로빈이 없으면 종일 쫄쫄 굶었겠네.”

레디스는 벌써 일주일 넘게 아침 식사도 거르고 있었다.

주스 한 잔만 마시고 종일 검을 휘두르는 아이를 떠올리니 마음이 안 좋았다.

“레디스는 옛날부터 몸을 움직이는 걸 좋아했으니까.”

“흐음…….”

“아카데미를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말려야 했는데.”

“지금이라도 다시 다니면 되잖아?”

“물어봤는데, 싫다고 하더라.”

스푼을 내려놓은 미하일이 축 처진 눈으로 중얼거렸다.

“이젠 학비 걱정할 필요 없는데. 이게 다 내가 모자라서…….”

“또 그런다. 자꾸 옛날 일 때문에 우울해하면 벌금 받는다? 은화 한 닢씩 받을 거야?”

음식을 나르던 로빈이 후후, 웃었다.

“아가씨께서 부자가 되시겠네요.”

“아니지! 부자가 되면 안 되지! 오빠가 습관처럼 자학하는 걸 고쳐야지!”

내가 엄숙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레디스 오빠도 생각이 있을 거야. 로열 가드가 되는 게 꿈이라며?”

“그럴까?”

“그럼! 일단은 믿고 지켜보자.”

일단 식사가 끝나면 미하일의 우울함을 방지할 은화 저금통을 만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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