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내가 맡아도 괜찮겠어?”
“응. 레디스도 그게 좋겠다고 했거든.”
“잃어버릴지도 모르는데? 팔아버릴 수도 있는데?”
“그럴 리 없어. 널 믿어.”
후계자 교육 효과가 벌써 나타나고 있나?
그것도 아니라면 커다란 심적 변화가 있어서일까.
차분히 대답하는 미하일에게서는, 주눅 든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알겠어. 그럼 내년까진 내가 가지고 있을게. 작위 계승식 날에는 멋지게 차려입고 와야 돌려줄 거다?”
“참고할게.”
자식 키우는 마음이 이런 건가.
힐데가르트는 자신이 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참, 각하께서 너와 함께 차를 마시고 싶다고 하셨어. ‘오브론 저택에서 연락이 왔다’고 전해달라는데, 그게 무슨 뜻이야?”
“아.”
슬슬 오브론 대공에게 일러두었던 조사 결과가 나온 거구나.
“으음, 그런 게 있어.”
그녀는 미하일의 순진한 얼굴을 못 본 척했다.
“내일 점심 식사 끝나고 티타임에 초대하셨는데, 가겠다고 전해줄까?”
“응. 그렇게 해줄래?”
“알겠어. 그럼 잘자, 힐데.”
미하일은 용건이 끝나자 인사와 함께 방을 떠났다.
힐데가르트는 침대에 드러누운 뒤 작게 하품했다.
‘아이들은 정말 금방 자라는구나.’
자꾸만 피식피식 웃음이 튀어나왔다.
이래서 레온 오빠가 날 죽을 때까지 어린애 취급했던 걸까?
“그나저나, 이건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네…….”
그녀가 천장으로 손을 뻗었다.
미하일이 건네준 가주 인장 반지는 반질반질하게 빛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잠깐 빌려 쓴 다음 제자리에 되돌려둘 생각이었는데.’
일이 너무 쉽게 풀리는데?
설마 제 발로 반지가 손안에 들어올 줄이야.
힐데가르트는 하염없이 반지를 만져보며 시간을 죽였다.
그리고 새벽 늦은 밤.
가볍게 밤을 새운 그녀가 발소리를 죽이며 2층으로 내려갔다.
목적지는 바로 초상화의 방.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레인보우 글로우가 보관되어 있을 물방울의 방이었다.
* * *
“으, 발 시려워.”
그녀는 맨발로 살금살금 걸었다.
물방울의 방이란, 초대 아카락시아 공작을 위해 엘프들이 마법을 걸어주고 간 비밀 장소다.
첫 이슬이 맺히는 시각.
새벽 5시에만 열고 들어갈 수 있는 비밀 공간.
인장 반지를 낀 채 시간에 맞춰 정확하게 문을 열면, 초상화의 방이 아닌 물방울의 방이 눈앞에 나타난다.
댕- 대앵-
괘종시계에서 5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힐데가르트는 반지 낀 손으로 초상화의 방문 손잡이를 잡았다.
그러자 반지에서 미세한 마력이 일어나더니, 곧 문 주변으로 푸른빛이 맴돌았다.
‘좋아.’
그대로 문을 열자, 눈앞에는 수많은 초상화가 걸려 있는 방 대신 다른 장소가 나타났다.
세로줄이 난 자주색 벽지.
흑단 나무로 만든 검은색 책장.
오직 초대 공작의 초상화 한 점만 걸려 있는 것까지.
“여전하구나. 역시 엘프가 걸어둔 마법은 강력하다니깐.”
물방울의 방은 기억하던 그대로였다.
묘하게 서늘한 공기마저도.
“먼지 한 톨 없다니……. 으스스한 느낌이네.”
이곳에선 어떤 서류도 썩지 않고, 어떤 검도 녹슬지 않는다.
보석이나 장신구도 마찬가지다.
결코 빛을 잃고 투명함을 오래도록 보존됐다.
그녀는 보존 마법이 걸린 방을 둘러보며 감탄을 터뜨렸다.
“와……. 우리 집이 그냥 망하지는 않는다지만…….”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초대 가주의 애뮬릿.
이제는 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는 400년 된 바이올린과 비싼 장서.
광산에서 채굴된 보석 중에서 마력을 지닌 희귀석까지.
그 외에도 층층이 쌓아둔 금괴나 백금 주화, 미술품 등 값나가는 물건 천지였다.
성인 남자도 거뜬히 들어갈 만큼 커다란 상자가 있길래 열어봤는데, 거기엔 제국 금화가 꽉 채워져 있었다.
물방울의 방에는 반드시 계승되어야 하는 유품이나 물건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살짝 기가 막혔다.
기쁘면서도 언짢았달까?
“마루 밑에 이만한 재산을 쌓아두고 무슨 고생을 한 거니.”
만약 내가 레온 오빠를 졸라대서 이 장소를 알아내지 않았으면…….
“나야 그렇다 치지만 애들은 억울해서 어쩔 뻔했어?”
상상만 해도 오싹했다.
이 많은 재산이 영영 어둠 속에 묻힐 뻔하다니.
“안 될 일이지. 환생하길 잘했어.”
그녀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물방울의 방은 그녀도 레온 오빠를 졸라서 두세 번 들어 와본 게 전부였다.
어차피 가주 인장 반지도 없으니 출입할 일 없다며 잊고 살았던 장소였는데, 세상일은 참 모를 일이다.
솔베르 백작 부인을 쫓아낸 뒤에도 공작가 재정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레인보우 글로우를 팔아치워서 사업 자금으로라도 쓸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겠구나 싶었다.
물방울의 방에 남아 있는 재산은 그만큼 값나가는 게 많았다.
“여깄다!”
찾던 물건은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힐데가르트는 레인보우 글로우가 들어 있는 벨벳 상자를 열었다.
다이아몬드와 일곱 가지 색의 보석으로 이루어진 목걸이.
광채를 머금고 있는 보석은 80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하도록 여전히 아름다웠다.
“여기 있을 줄 알았지. 레온 오빠도 은근 단순한 구석이 있다니깐!”
예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다시 보니 이렇게 반가울 수가!
그녀는 감격에 젖었다.
“좋았어. 이거면 애들한테 돈 타서 쓸 일은 없지.”
절로 웃음이 나왔다.
힐데가르트는 다른 사적인 욕심으로 물방울의 방에 있는 재산을 빼돌릴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딱 하나 예외가 있었으니, 바로 레인보우 글로우였다.
이건 원래 그녀의 물건이었으니까.
레온 오빠가 그녀만을 위해 만든 거니까.
‘나중에 팔거나 처분할 때 꺼내 가야겠다.’
레온 오빠, 미안.
그래도 코흘리개 애들한테 용돈 받아 쓸 순 없잖아.
여차하면 이건 오빠가 주는 용돈이라고 생각할게. 그건 괜찮을 거 같거든.
힐데가르트는 한결 든든한 마음으로 레인보우 글로우가 담긴 상자를 내려놓았다.
그 뒤엔 흉기로 써도 될 만큼 크고 무거운 금괴 몇 개를 따로 챙겼다.
“이 정도면 저택 유지비랑 사용인 급여로 충분하고……. 나머진 필요할 때 조금씩 꺼내야지.”
사실, 백작 부인을 쫓아낸 것만으로도 공작가의 재정 상황은 훨씬 나아진다.
후견인도 새로 생겼겠다, 이 정도면 공작가가 새롭게 출발하는 마중물로서는 충분한 금액이었다.
‘나중에 로빈에게 살짝 찔러줘야겠다.’
금괴 실물은 처음이라면서 엄청나게 놀라겠지?
“세상에 이렇게 순조로울 수가 없네.”
가문 재건을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고안해 낼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확실하게 숨겨진 재산을 찾을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래. 우리 가문이 어떤 곳인데. 그냥은 안 망하지! 그럼!”
그녀는 오두방정을 떨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그래도 스멀스멀 입꼬리가 올라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천천히 구경이나 하고 나가볼까?”
목적을 달성한 힐데가르트는 흐뭇하게 걸음을 옮겼다.
서성거리던 그녀는 곧 초대 공작의 초상화 앞에서 멈춰 섰다.
테스타사 아카락시아.
다섯 별 가문의 초대 가주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했던 영웅.
그녀의 초상화 아래에는 작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무지개가 서 있는 곳에는 행복이 숨겨져 있다.]
힐데가르트는 제복 차림의 찬란한 은발 공작을 찬찬히 살폈다.
그러고는 다소곳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초대 가주님. 힐데가르트예요.”
오랜만에 뵙지요?
제가 모습이 바뀌는 바람에 못 알아보실 거 같지만, 예쁘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가주님 덕을 톡톡히 봤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세상에 둘도 없는 선조님이세요.”
초대 가주가 공작가를 세운 시절, 인간과 엘프는 서로를 불편하게 여기는 관계였다고 한다.
인간은 엘프의 뾰족한 귀를 흉보면서도 그들이 다루는 마법을 부러워했고, 엘프 또한 인간의 야만스러움을 경멸하면서도 그들의 무시무시한 번영을 부러워했다.
하지만 전쟁을 통해 두 종족은 수많은 위기를 함께 넘겼다.
그렇게 울고, 웃고, 싸우고, 패배하고, 승리하는 과정에서 하나가 되었다.
‘무지개는 수많은 물방울이 모여져서 만들어지지요.’
‘우리 엘프는 아카락시아를 이루는 물방울로서 함께 싸운 걸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테스타사.’
엘프들은 우애의 증표로서 몇 가지 마법을 남겼다.
그중 하나가 물방울의 방이었다.
만약 이 방이 없었더라면, 레인보우 글로우는 곧장 솔베르 백작 부인처럼 탐욕스러운 사람의 손에 넘어갔으리라.
그러니 그녀는 조상님 덕을 아주 잘 본 셈이었다.
“마법 때문인지 초상화가 엄청 생생하게 보존된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며 초상화에 손을 댄 순간이었다.
“……어?”
가주 인장 반지가 밝게 빛나더니, 힐데가르트의 몸에 쌓인 마나가 순식간에 반응했다.
찰나의 순간.
힐데가르트는 레온 오빠의 말을 기억해 냈다.
‘힐데, 아무거나 만지면 안 돼. 넌 마력이 있으니 마법이 발동될지도 몰라.’
‘마법? 무슨 마법이 걸려 있는데?’
‘나도 잘은 몰라. 근데 아마…….’
레온 오빠.
나 이거 무슨 마법인지 알 거 같아.
‘순간 이동……!’
그녀의 왼팔이 먼저 초상화 안으로 쑥 들어갔다.
“아, 안 돼!”
그러나 외침과는 달리, 환한 빛이 몸을 덮쳤다.
그렇게 힐데가르트는 알 수 없는 장소로 끌려가고 말았다.
무려 맨발에 잠옷 차림으로.
* * *
와장창창!
쨍그랑!
쿠웅!
데굴데굴 구르던 몸이 어딘가에 부딪혀서 겨우 멈췄다.
“으윽……. 으으으윽…….”
아프다.
어딘가에 긁힌 것 같은데 쓰려서 죽을 것 같다.
뭔가 박살 나고 깨지는 소리가 나기도 했는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아파 죽겠다! 레온 오빠! 나 아파!
“흐윽…….”
힐데가르트는 부들부들 떨며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대체 왜?
왜 하필 많고 많은 마법 중에 순간 이동 마법이 걸려 있었던 거야?
그것도 초상화에!
‘피부를 고기 망치로 다지는 것 같아…….’
순간 이동 마법은 몹시 편리해 보이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그게 뭐냐고?
온몸을 깍둑깍둑 네모나게 썰어버린 다음, 다시 문지르며 짜 맞추는 그 감각이 끔찍하단 거다!
“흐윽……. 헉, 허억…….”
힐데가르트는 한동안 끔찍한 고통을 참아내야 했다.
온몸이 쥐가 난 것처럼 저리고 아팠다. 눈앞은 캄캄해졌다가 밝게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예상은커녕 각오조차 못 한 아픔에 얼마나 떨었을까.
시야가 어둠에 익숙해질 무렵 조금씩 숨을 고르던 그녀는 문득 허전함을 느꼈다.
“아…….”
가주 인장 반지가 없었다.
헐렁하게 끼고 있었던 반지가 어느새 감쪽같이 사라졌다.
‘구를 때 빠졌구나!’
그녀는 아픔도 잊고 벌떡 일어났다.
어두운 사방을 두리번거릴 때였다.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