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
“일리야의 피부에 남아 있는 검은 흔적을 지울 수 있는지 말해보게.”
오브론 대공의 눈빛은 매서웠다.
긍정하는 대답 말고는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네, 약속드리죠.”
잠깐 입을 닫고 있던 힐데가르트가 곧 여유롭게 웃었다.
“그런 거래니까요.”
오브론 대공은 세 남매의 새로운 후견인이 되고, 힐데가르트는 일리야 공녀의 병을 낫게 하는 거래.
이 거래는 이제 막 교섭을 시작했다.
“공녀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거나 다시 쓰러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장담할 수 있어요.”
다만 사용인들은 입단속을 시키는 게 좋을 테지.
지금쯤 일리야 공녀의 피부는 보기 흉할 정도로 검게 변해 있을 테니까.
“조급하신 마음은 이해하지만, 순서대로 진행해야 하는 일입니다. 저를 믿고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죠.”
힐데가르트는 나긋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분명 저택 주변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고 연락이 올 겁니다.”
“음.”
“준비가 끝나기 전까지는 후견인으로서 후계자 교육에 힘써 주셨으면 합니다.”
“연락이 오면 그때 병을 완전히 낫게 하는 법을 알려주겠다?”
“예, 약속드릴게요.”
아카락시아 공작저가 얼마 남지 않았다. 마차는 어느새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얼마간 힐데가르트와 시선을 마주하던 오브론 대공은 희미한 흥분을 잠재웠다.
“알았네. 그러면 며칠간 객으로서 머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저택에 도착하자, 대공이 먼저 마차에서 내린 뒤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힐데가르트는 조금 궁금해졌다.
손녀가 병이 아닌 저주에 걸렸음을 알게 된다면, 대공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리고…….
‘대체 누가 대공의 손녀에게 흑마법으로 저주를 걸었지?’
힐데가르트는 마차에서 내리며 대공을 말없이 응시할 뿐이었다.
* * *
저녁 식사가 끝난 뒤.
벽난로 근처에 앉아 있던 미하일은 애틋한 얼굴로 거실을 둘러보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부터 언제나 이곳은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하나둘 사람들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남아 있는 건 저뿐이라 생각해서, 외로움이 물씬 차오르기도 했다.
버틸 수 있었던 건, 동생들이 있어서였다.
정확히는 버텨야만 했던 거지만.
“도련님?”
“아…… 로빈.”
“이만 올라가셔야죠.”
“응.”
미하일이 끄덕였다.
“정신없는 하루셨죠? 피곤하셨을 텐데, 어서 쉬세요.”
“그럴게. 고마워.”
두 사람은 따뜻한 미소를 교환했다.
로빈이 마저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자리를 뜨려던 찰나였다.
“저기, 로빈.”
“네?”
“……사과하고 싶은 게 있어.”
“사과요? 저한테?”
“응. 이모님이 네게 가혹하게 굴었을 때 지켜만 본 거 말이야.”
엉뚱한 말에 놀란 로빈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얼핏 듣기에는 담담했지만, 어릴 적부터 미하일을 돌봐왔던 로빈은 그가 떨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내가 그러지 말라고 막지 못해서, 이모님이 널 더욱 함부로 대하셨을 거야. 미안.”
“도련님.”
“정말 미안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도 막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말 걸 그랬다.
차라리 절대 쫓아내지 말라고 길길이 날뛰어 보기라도 할걸.
애처럼 드러누워서 로빈이 없으면 안 된다고, 그녀에게 손대지 말라고, 쫓아내지 말라고 울거나 뻗대거나 반항이라도 해볼걸.
마냥 답답하게 네, 네 대답하지 말 걸 그랬다.
그럼 무언가 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미안…….”
미하일은 후회 속에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놀랍게도 로빈이 살짝 무릎을 굽힌 채, 그와 눈을 맞췄다.
“도련님, 저 괜찮아요. 조금도 힘들지 않았어요.”
“…….”
“진짜예요.”
미하일을 탓할 이유가 없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에게 해코지를 당하는 건 개에게 물린 것과 똑같다.
그것을 어떻게 아이 탓으로 돌리겠는가.
“제 얼굴 보면 아시겠죠? 거짓말 아닌 거?”
“…….”
동글동글한 얼굴, 깔끔한 단발.
언제나 웃는 모습으로 남매들을 돌보아주었던 로빈의 모습은 오늘도 한결같았다.
“저한테 사과하실 필요는 하나도 없어요. 왜냐면…… 저는 어른이거든요!”
“……응?”
저도 누군가에게 들은 말이지만요, 하고 가볍게 운을 뗀 로빈이 미하일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어른이라는 건, 누군가를 돌보고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래요. 그러니까, 저는 어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거예요.”
“…….”
“도련님은 아직 열여섯이잖아요. 너무 일찍 어른이 되지 마세요.”
안경 너머 미하일의 눈동자가 조금씩 젖어 들었다.
“아마 도련님은 멋진 어른이 되실 거예요.”
“……응.”
“아마 다섯 별 공작가에서 가장 멋진 가주님이 되실걸요?”
“응…….”
어른과 아이의 경계선을 밟고 서 있던 미하일은, 오랜만에 어깨가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그날이 정말로 기대되네요.”
미하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로빈을 향해 활짝 웃었다.
“고마워, 로빈.”
정말 오래간만에 보는, 미하일의 함박웃음이었다.
* * *
솔베르 백작 부인은 후견인으로서 모든 권리를 박탈당했다.
하지만 그걸로 끝날 리 만무했다.
그녀는 피보호자인 힐데가르트에게 신체적 위해를 가한 일로 또 다른 재판에 회부되었고, 즉시 접근 금지령이 떨어졌다.
백작 부인이 그간 장부에 기입해 둔 숫자가 엉터리라는 것도 금세 밝혀졌다.
이 과정에서는 오브론 대공이 힘을 좀 썼다.
그녀의 장부와 대조해 보기 위해, 황실에 직접 연락을 넣어 철광석 수익 내역을 다시 보내주십사 청한 것이다.
대공은 단기 손님으로 체류하는 동안 후견인의 책임을 다했다.
그는 재판이 끝나자마자 미하일에게 장부 보는 법부터 가르쳤고, 미하일은 그야말로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모든 지식을 익혀나갔다.
혹시라도 크게 상심하진 않았을까 걱정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미하일은 후계자 교육에 열의를 보였다.
“도련님, 쉬엄쉬엄하세요.”
“난 괜찮아. 그보다 로빈, 이때 기억나? 이모님이 주셨던 예산 액수가 이것보다 적었던 것 같은데…….”
“그렇네요. 외상 장부를 가져와서 비교해 볼까요?”
불과 며칠 만에, 미하일은 백작 부인이 빼돌린 재산을 정확히 집어냈다.
솔베르 백작 부인 앞으로는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과징금과 배상금이 청구되었다.
다행히 철광석 수입은 빼돌렸어도, 철광석 자체는 빼돌리지 않았으니 반역죄는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착복 정황이 낱낱이 드러났다.
백작 부인은 그간 빼돌린 돈을 모조리 토해내게 된 건 물론, 지방 수도원 유배형을 피하고자 벼락같이 사죄 편지를 날려댔다.
하지만 그 편지가 우리 손에 닿는 일은 없었다. 로빈이 모두 불태워 버렸기 때문이다.
로빈은 미리 일러두었던 대로, 옛 사용인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많은 이가 다시 공작가로 복귀했다.
공작가 저택은 눈 깜짝할 사이에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활기가 넘쳤고, 예전보다도 훨씬 사람 사는 집다웠다.
솔직히 말하면 이것도 80년 전만은 못하지만…….
‘처음 봤을 때보다는 훨씬 나아졌지.’
힐데가르트는 따뜻한 이브닝 티를 마시며 그 모든 걸 지켜보았다.
그날 밤, 미하일이 정중하게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
“힐데, 잠시 괜찮을까?”
“응? 오빠?”
“들어가도 되니?”
“물론이지. 어서 들어와.”
성격이 순해서 그런가. 미하일은 참 매사에 조심스럽다.
힐데가르트가 그에게 손짓했다.
방으로 들어온 미하일은 침대로 다가왔다.
그가 침대 한쪽에 앉자 쿠션이 푹 꺼졌다.
“그렇게 구석에 걸터앉지 말고. 넓은 곳으로 와.”
하여간에 이런 점까지 포함해서 미하일은 레디스와 영 딴판이었다.
똑같은 재료의 소스라도 순한 맛과 매운맛의 차이라고나 할까?
힐데가르트가 채근하자, 미하일은 천천히 침대 중앙으로 왔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실은…… 부탁할 게 있어서.”
“부탁? 뭔데?”
“잠깐 손 좀 펴볼래?”
그렇게 말하며 미하일이 그녀에게 쥐여준 건, 다름 아닌 가주 인장 반지였다.
“오빠? ……이걸 왜 나한테 줘?”
힐데가르트는 깜짝 놀랐다. 그녀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설마 그릇이 못 된다는 말로 작위 계승을 포기할 생각인가?
하지만 미하일은 부드럽게 웃으며 뜻밖의 말을 꺼냈다.
“괜찮다면 그 반지를 내년에 있을 작위 계승식 날까지 맡아줄래?”
“응? 그건 어렵지 않지만……. 굳이 왜? 오빠가 계속 끼고 있으면 되잖아.”
미하일은 마치 그 대답을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왜 저러는 거지?
“작위 계승식 때는 아버지나 어머니가 반지를 끼워주시는 거 알지?”
“응. 공작으로서 임명하고, 인정한다는 뜻으로.”
“맞아. 그런데 우리는 두 분 다 안 계시니까.”
“대역이 필요해서 그래? 그럼 나보다는 오브론 대공 각하께 부탁드리는 게 좋지 않아?”
그쪽이 조금 더 모양새가 날 텐데.
“그럴 수도 있겠지만.”
미하일이 키득거렸다.
느슨하게 묶어둔 그의 꽁지머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이 인장 반지는, 내가 지켜주고 싶은 동생이 끼워주었으면 해서.”
그렇게 말한 미하일은 힐데가르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는 내내 참아왔던 말이라는 듯, 한 마디 한 마디에 진심을 담아 속삭였다.
“힐데, 나 정말 열심히 할게. 네가 만들어준 기회, 절대 헛되게 만들지 않을 거야.”
미하일의 청보랏빛 눈동자는 흡사 우주 같았다.
그 속에 담긴 무한한 가능성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듯. 이제부터 시작이라며 빛나고 있었다.
“내가 미덥지 못해서, 네가 힘든 일을 겪게 했지만…….”
잠깐이지만, 미하일의 옆모습에서 레온 오빠의 모습을 겹쳐 보았다.
“이제부턴 아니야. 앞으로는 오빠가 널 지켜줄게.”
“…….”
“나는 꼭 너를 위해 강해질 거야.”
혹시라도 여동생의 이마에 흉이 졌을까 봐, 이마를 확인하는 손길이 꼼꼼하고 다정했다.
힐데가르트는 그만 웃어버렸다.
“와, 어디서 그런 말을 배웠어?”
“레디스는 이렇게 말하니까 도망치더라.”
“그럴 만하지!”
미하일은 순한 강아지처럼 웃었다.
“열심히 배우고 익혀서, 어엿한 공작이 될게. 그러니까 그때까지 이 반지를 맡아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