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공녀님 (16)화 (16/166)

16화

“……예?”

법관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오브론 대공?

화이칼의 지배자, 오브론?

대공령의 수호자?

“정, 정말 오, 오브론 대공 각하십니까?!”

오브론 대공은 대답 대신 방패와 흰 사자가 새겨진 가주 인장 반지를 내밀어 보였다.

“먼 길을 오느라 시간을 맞추지 못한 점, 내 사과하지.”

“아, 아닙, 아닙니다!”

법관은 얼빠진 목소리로 한참이나 뻐끔거렸다.

힐데가르트는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나타난 대공을 보며 후, 웃었다.

‘놀랄 만도 하지.’

이런 거물이 후견인으로 올 줄은 몰랐을 테니까.

오브론 대공가가 어떤 곳인가.

드롯셀마이어 시황제의 황제(皇弟)가 오브론 대공가의 초대 가주다.

제국에는 공작가가 다섯 있지만, 그중 대공위를 칭할 수 있는 건 오브론 대공가뿐이다.

지고하신 핏줄로 따지자면 황가 다음이라는 말씀.

“각하께서 세 분의 후견인을……?”

“그렇소.”

백작 부인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오브론 대공이라고? 그런 거물급 인사가 왜 여기에 온 거야?’

왜?

아니, 어떻게?

‘대체 어떤 수를 써서 오브론 대공을 구워삶은 거지?’

버려지다시피 했던 아이들이다.

이제 와서 대공가에서 직접 거두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대략적인 사정은 힐데가르트 공녀에게 전해 들었소.”

“그러셨군요.”

법관이 땀을 훔쳤다.

“오브론 대공가는 다섯 별 가문 모두와 혈연 관계를 맺은 적이 있소. 후견인 자격은 충분하리라 보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대공 각하께서는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계시지요.”

충분하기만 할까.

충분하다 못해 넘칠 지경이지.

설령 혈연 관계가 아니더라도 오브론 대공이 하겠다는 일을 막아설 간 큰 인물은 제국에 없을 것이다.

“미하일 공자님은 괜찮으십니까?”

“네, 네!”

오브론 대공에게 시선을 빼앗겼던 미하일은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레디스와 힐데가르트도 같은 반응이었다.

세 명의 의견이 일치하자 법관은 살짝 안도한 눈치였다.

“대공 각하, 후계자 교육은 직접 책임지고 지도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물론이오. 내 약조하겠소.”

“좋습니다. 그러면 이대로 절차를 밟아…….”

“네에, 잠시만요.”

그때였다.

웃는 얼굴과 함께 손을 들어서 이야기에 끼어든 사람은 바로 힐데가르트였다.

“공녀님? 왜 그러십니까?”

“이대로 끝내기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게 있어서요.”

“음? 말씀하시지요.”

“별건 아니고요, 아까 듣자 하니 백작 부인께선 저희에게 보내주신 것과는 다른 장부를 따로 가지고 있으신 모양이에요?”

힐데가르트는 솔베르 백작 부인 쪽을 향해 몸을 틀었다.

“새 후견인도 정해졌으니 당연히 그 명세를 투명하게 공개해서 넘겨주시겠죠? 무려 철광석 수익이 누락되었으니까요.”

“호오.”

그 순간 기막힌 타이밍으로 그녀와 오브론 대공의 눈이 마주쳤다.

“그거 중요한 일이군.”

딱 한마디 했을 뿐인데, 오브론 대공은 그녀의 의도를 파악하고 씩 웃고 있었다.

‘누가 오브론 아니랄까 봐. 능구렁이 같다니깐.’

“철광석이라면 엄중히 관리해야 하는 품목이 아닌가. 빼돌린 양에 따라서는 반역죄를 물을 수도 있는 물건인데.”

“네, 맞아요.”

힐데가르트는 오브론 대공의 말에 천연덕스럽게 맞장구쳤다.

“물론 사소한 실수로 빠뜨리셨을 수도 있죠. 하지만 황실에 이 일이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요?”

솔베르 백작 부인의 얼굴은 순식간에 희게 질렸다.

“정중히 실수를 인정하시고 누락된 수입 명세서와 따로 쓴 장부를 넘기신다면 굳이 일을 크게 만들진 않겠지만, 끝까지 거부한다면…….”

힐데가르트는 뒷말을 잇지 않고 가만히 상대를 응시했다.

“말씀해 보세요, 이모님.”

그녀가 칼날 같은 웃음으로 마무리 일격을 날렸다.

“아직도 공작가에 미련이 남으셨나요?”

“히, 힐데…….”

“가주 인장 반지를 끼고 계시는 걸로 보니 그런 것도 같은데.”

힐데가르트의 눈은 차가웠다.

“대답에 따라서 아카락시아 가문의 행동도 달라질 겁니다.”

파랗게 질린 백작 부인은 허겁지겁 반지를 뺐다.

그녀는 경련이 일어나는 입가를 애써 말아 올렸다.

“그렇지 않단다. 반지는 워낙…… 워낙 중요한 물건이잖니? 잃어버리면 큰일이라 잠시 맡아두었을 뿐이야.”

“그러세요?”

“그럼. ……여기 있단다. 미하일.”

미하일에게 다가간 솔베르 백작 부인은 떨리는 손으로 그에게 반지를 건넸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힐데가르트에게 꽂힌 채였다.

“하면 장부는 사람을 보내서 찾으러 가겠소.”

오브론 대공이 무감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알겠습니다, 대공 각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녀의 낯빛이 희게 질렸다.

일이 이렇게 되니 중요한 건 레인보우 글로우가 아니었다.

자칫하면 그녀를 조사하러 황실에서 사람이 올 수도 있었다.

잘못해서 반역죄로 엮이기라도 했다간…….

“조, 좋은, 새로운 후견인을 찾아서 다행이구나. 그럼, 난, 이만…….”

파랗게 질린 백작 부인은 그 길로 법정을 뒤로하고 부리나케 자리를 떴다.

힐데가르트는 차가운 눈으로 닫힌 문을 보았다.

‘뻔하네. 예산 빼돌리면서 장부에 장난질 쳐놨을 테고.’

차라리 잘됐다.

이걸 기회로 미하일에게 장부 보는 법도 가르치고, 은화 한 닢까지 계산해서 두 배로 배상금을 받아내리라.

“크흠.”

법관은 순식간에 어색해진 분위기를 정리하려는 듯 작게 헛기침을 했다.

“일이 정리된 것 같군요. 그러면 대공 각하께서 직접 후계자 교육을 지도해 주시는 것으로 하고, 후견인을 맡는 기한은…….”

“1년 뒤 미하일 아카락시아가 열일곱이 될 때까지. 공작위 승계식 날까지면 충분합니다.”

힐데가르트가 재빨리 대답했다.

“동의하시지요, 각하?”

오브론 대공은 분명 후견인으로서는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대공인 그가 작정하고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솔베르 백작 부인을 상대할 때보다 곤란한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힐데는 그러한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명확한 기한을 제시했다.

‘보험은 들어놨지만, 혹시 모르니까.’

오브론 대공은 그러한 힐데의 속내를 간파했는지 가볍게 웃었다.

“그렇게 하지. 만약 상황이 변해서 후견인의 보호가 더 오랜 기간 필요하다면 그때는 미하일 공자를 비롯한 세 남매와 의논하겠소.”

“좋습니다. 그럼 이것으로 후견인 문제를 마무리하겠습니다. 황실에는 제가 직접 전갈을 보내두지요.”

법관이 땅땅 소리가 나도록 법봉을 두드렸다.

“조정 재판은 이것으로 마칩니다. 그리고, 미하일 공자님?”

“네, 네?”

가주 인장 반지를 손가락에 끼워보고 있던 미하일이 고개를 들었다.

“그간 힘드셨을 텐데, 정말 잘 버티셨군요.”

“아…….”

“웬만한 어른들이라도, 이런 일은 견디기 힘들었을 겁니다.”

단상에서 내려온 법관이 미하일에게 다가왔다. 그가 악수를 청했다.

“내년에는 공작 각하로서 뵐 날을 기대해도 되겠습니까?”

“……네, 물론입니다.”

아직 앳된 티가 나는 미하일의 얼굴에 복숭앗빛 홍조가 번졌다.

“기대해 주세요.”

미하일은 천천히 악수했다.

약간 어색하지만, 머잖아 제 손가락에 꼭 들어맞을 가주 인장 반지를 낀 채였다.

* * *

아카락시아 공작가로 돌아오는 길.

나는 오브론 대공의 마차를 얻어 탔다.

“시간을 잘 맞춰 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대공 각하.”

대공은 마차의 등받이에 기댄 채 한결 편해 보이는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직접 뵙는 것은 처음이지요. 힐데가르트 아카락시아입니다.”

“율리겐 마이스터 오브론일세.”

푸른 눈이 나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참 뭐랄까…….

“이렇게 어릴 줄은 몰랐다고 얼굴에 쓰여 있으시네요.”

“놀랐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네.”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내 손녀보다 고작 두세 살 많은 공녀일 줄은 몰라서 말이야. 편지 속 말투가 어른스러워서 그만 착각했네.”

“이해합니다.”

우리의 입가에는 나란히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제일 놀란 건 편지 속의 내용이었네. 수도의 어떤 의원들도 일리야의 병을 고치지 못했어. 사제들의 축복이나 성수로도 마찬가지였지.”

마차는 완만한 길목에 들어서서 조금씩 속도를 냈다.

“……어느 돌팔이는 일리야가 두 번 다시 눈을 뜨지 못할 거라고도 했고.”

창밖을 바라보던 오브론 대공이 눈살을 찌푸렸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에 불쾌한 얼굴을 한 것도 잠시.

그가 표정을 풀었다.

“얼굴도 본 적 없는 아카락시아의 공녀가 해법을 갖고 있었을 줄이야.”

오브론 대공이 그녀에게 살짝 눈을 내리깔며 인사했다.

“궁금한 게 한둘이 아니지만, 우선 고맙네. 그 아이가 눈을 뜬 것만으로도 날아갈 것 같아.”

힐데가르트의 입가에도 덩달아 미소가 번졌다.

오브론 대공은 감사를 전하는 것도 시원시원하고 확실했다.

‘오브론 대공가도 여전하구나.’

힐데가르트는 80년 전, 오브론 대공가를 이끌었던 듀렌달 오브론을 떠올렸다.

듀렌달 대공 또한 미안한 일이든 고마운 일이든 가감 없이 표현하던 사람이었다.

아무래도 현재의 오브론 대공 또한 선대를 닮은 게 틀림 없었다.

살짝 얄밉게 뻔뻔하고, 능글거리면서도 우아한 대귀족의 품위를 잃지 않던 대공가.

그랬기에 아카락시아 공작가와는 아웅다웅 다투면서도 제국을 이끌어간 이들이었다.

이렇게 마주 보고 있으니 새삼 신선한 기분이었다.

“저도 감사드려요. 대공 각하께서 편지를 읽지 않고 태워 버리셨다면 저희가 이렇게 마주 보고 앉아 있을 수는 없었을 거예요.”

“같은 다섯 별 가문에서 온 편지를 어찌 개봉도 하지 않고 태워 버린단 말인가.”

힐데가르트는 교교히 웃었다.

신문에서 기사를 접했을 때부터 오브론 대공의 손녀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힐데가르트는 그길로 편지를 써 보냈다. 일리야 공녀가 눈을 뜨게 하는 방법과 해야 할 일을 적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신성이 담긴 성물(聖物)을 구해라.

그리고 성물을 공녀의 머리맡에 두어라.

우선 그리하면 공녀가 눈을 뜰 것이다.

그 뒤에는…….

“성물은 무사히 구하셨군요. 수도원에서 순순히 넘겨주던가요?”

“기부금을 약속했네.”

“상당한 금액이 드셨을 텐데요?”

“그깟 금액은 일리야를 위해서라면 하나도 아깝지 않아.”

오브론 대공은 단호했다.

편지 내용은 믿기 힘든 말이었으나 이미 수도의 내로라하는 의원들이 다녀갔다.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던 오브론 대공에게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시도해 보았던 셈이다.

그런데 정말로 일리야가 눈을 뜬 것이다.

“수도의 대공저와 본 저택 주변의 땅을 모두 갈아 엎어보라 했네. 공녀의 말대로 했어.”

“잘하셨네요.”

“그러면 이제 약속해 주게. 정말로 그 아이를 예전처럼 건강하게 해줄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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