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공녀님 (12)화 (12/166)

12화

‘로빈.’

‘로빈…….’

‘가는 거야?’

현관문 앞에 나란히 선 세 남매를 본 순간, 로빈은 가방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로빈……. 안 가면 안 돼?’

제아무리 잘 먹고 잘 컸다 해도 아직 조숙해 보이는 어린아이들일 뿐.

세 남매는 아직도 한참 어렸다.

어른의 보호가, 뺨을 쓰다듬는 온기가 필요할 나이였다.

로빈의 나이는 스물이었다.

많은 나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어린아이들이 불행하지 않도록 돌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아뇨. 안 가요. 이곳에 있을 거예요.’

‘정말?’

‘네, 제가 아니면 누가 도련님들과 아가씨를 돌봐드리겠어요.’

로빈은 저택에 남았다.

‘아직 어리구나. 하긴 스물이니깐. 로빈, 정 때문에 발목이 잡히는 거 바보 같은 짓이야.’

‘맞아. 은혜 갚는 것도 좋지만 네 생각부터 하면서 살아야지.’

‘불쌍하다고 도와주면 세상에 안 도와줄 사람이 어딨니?’

몇몇 사용인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로빈을 대하기 껄끄럽다는 듯 저택을 떠났다.

은인의 아이들이기에 무작정 덮어놓고 돌보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어른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해보자고 마음먹었을 뿐이다.

‘정말 남아도 괜찮겠어? 공작가가 예전 같지 않은데…….’

‘그럼. 걱정 마, 네리아.’

‘미안해. 나도 함께 남아야 하는데……. 도련님들을 잘 부탁할게.’

그렇게 로빈은 공작가에 남게 됐다.

점점 가문이 기울고 있다는 걸 몰라서 남은 게 아니었다.

매일매일 청소를 하고, 빵을 굽고 시트를 갈면서 문단속을 했다.

평소와 똑같은 일상을 수호하고 무너지지 않도록 유지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그래서일까?

‘강아지든 고양이든 햄스터든……. 하물며 자기 자신이라도 괜찮아. 무언가를 돌보고 책임질 줄 아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 어른이라고 생각해.’

힐데가르트의 말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말이었고.

‘너처럼 말이야.’

동시에 점잖은 칭찬을 받은 기분이었다.

* * *

현관에 도착한 힐데가르트는 금방 솔베르 백작 부인을 알아보았다.

그녀는 꼿꼿하게 허리를 편 채 양산을 들고 서 있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건방진 편지를 보낸 저를 혼내려고 하는 게 분명했다.

‘할 말이야 뻔하지. 진지하게 대응해 봐야 나만 손해고.’

힐데가르트는 무슨 말을 하든 적당히 대꾸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렇게 일찍 뵐 줄은 몰랐…….”

퍽!

그러나 그녀의 다짐은 곧바로 무너졌다.

백작 부인이 들고 있던 양산으로 보란 듯이 로빈을 후려쳤다.

“로빈!”

힐데가르트가 비명을 질렀다.

다짜고짜 무슨 짓이냐고 화내기도 전에 백작 부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가 한 짓이니?”

“이게 무슨…….”

“사용인 주제에 애들에게 이상한 헛바람 불어넣은 게 네 짓이냐고 물었다.”

그녀가 로빈을 무섭게 을렀다.

“백작 부인.”

“여기를 거지 소굴로 만들 생각이야?”

갈색 머리카락을 귀로 넘긴 그녀가 로빈을 내려다보았다.

“보모 흉내를 내려거든 염치라도 알아야지. 뻔뻔하게.”

“부인!”

힐데가르트가 로빈과 백작 부인 사이에 끼어들었다.

“지금 뭘 하시는 거죠?”

“뭐?”

“애 앞에서…… 제 앞에서 뭘 하고 계시냐고요.”

솔베르 백작 부인은 기가 찬다는 듯 양산 끄트머리로 로빈을 쿡쿡 찔렀다.

“보면 모르겠니? 네게 막돼먹은 편지를 쓰게 만든 사용인을 훈계하고 있다.”

양산에 찔린 로빈은 이를 악물었지만, 끝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지금 자리에서 물러난다면 이다음엔 누가 양산에 찔릴지 뻔했기 때문이다.

“막돼먹은 편지라뇨? 설마 제가 보내신 편지를 그렇게 여기고 계실 줄은 몰랐네요.”

“너, 하녀에게 넘어가서 자기가 무슨 내용을 적어 보냈는지도 기억 못 해?”

“가주 인장 반지를 반환하고 밀린 급여를 지급해라, 장부에 수상한 점이 있으니 소명해라.”

힐데가르트는 한 음절, 한 음절에 힘을 실어 말했다.

“후계자 교육도 제대로 하지 않은 사람에게 후견인 지위는 과분하다!”

“…….”

“전부 정확하게 기억해요. 이제 이 편지의 어느 지점이 문제인지 부인께서 설명해 보시겠어요?”

솔베르 백작 부인은 또박또박 맞받아치는 힐데가르트를 보며 잠시 말문이 막혔다.

“설명 못 하시겠어요?”

“어린것이 머리가 영글어졌다고 그럴듯한 이유 몇 개 주워듣고 어른에게 들이받는구나?”

그녀가 표정을 고쳤다.

“벌써부터 돈, 돈 하고 쪼아대는 법부터 배워서는.”

백작 부인이 성가신 어린아이를 내치듯 턱짓했다.

“차려주는 식사 앞에서 입만 벌리는 힐데가르트. 이모가 하는 말 똑똑히 잘 들으렴.”

백작 부인의 목소리는 냉랭했다.

“너와 네 오빠들이 없는 살림에 간신히 구색이라도 맞춰서 사는 건, 전부 복잡한 일을 대신 해주고 있는 이 이모 덕분이란다. 네 옆에 있는 사용인 덕이 아니라.”

백작 부인이 로빈을 노려보았다.

“경솔하게 굴었으면 부끄러운 줄 알아. 네 불만만 토하고 버릇없이 구는 건 어디서 배워 먹은 거야?”

물론 그 궤변을 가만히 듣고 있을 힐데가르트가 아니었다.

“부인께선 뭔가 착각을 하고 계시는데요, 그 편지는 제가 쓴 거예요. 처음부터 끝까지.”

솔베르 백작 부인은 저를 타인 취급하는 힐데가르트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양산으로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사용인이 말하는 걸 주워듣고 곧이곧대로 믿는 걸, 세상에선 멍청하다고 표현한다.”

“듣고 싶은 대로 듣는 사람을 멍청이라 표현하는 건 아니고요?”

마침내 솔베르 백작 부인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녀가 든 양산 끄트머리가 힐데가르트를 향했다.

“진심으로 그런 소릴 하는 거라면 네게도 훈계가 필요하겠구나.”

어쩌면 이렇게 예상에서 벗어나질 않을까?

솔베르 백작 부인은 그녀가 직접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을 조금도 믿지 않았다.

물론 열두 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가 보낸 편지다.

자기 머리로 생각해서 편지를 썼다고는 믿기 어렵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애 앞에서 사람을 쳐?’

이것은 정서적인 학대다.

백작 부인은 일부러 ‘제 앞에서’ 양산을 휘둘렀다.

보는 아이가 더럭 겁을 먹고, 위압감을 느끼게. 그녀를 무서워하고,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도록.

하지만 힐데가르트는 백작 부인이 알던 열두 살 아이가 아니었다.

겁먹기는커녕, 힐데가르트는 백작 부인이 어떤 사람인지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후견인이 아이들을 방치하는 게 자랑인가요? 염치를 모르는 게 대체 어느 쪽이죠?”

“뭐? 염치?”

백작 부인은 하, 소리를 내며 하늘을 바라보더니 곧장 두 손가락으로 힐데가르트의 이마를 확 밀었다.

힐데가르트의 몸이 기우뚱했다.

하지만 그녀는 물러나거나, 울먹이지 않았다.

외려 두 다리로 단단히 버티며 백작 부인을 쏘아보았다.

백작 부인은 그 시선에 흠칫 놀랐다가, 양산을 단단히 고쳐 쥐었다.

“백작 부인! 아가씨께 손대지 마세요!”

화들짝 놀란 로빈이 소리쳤다.

그러나 백작 부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양산을 들지 않은 손으로 그녀의 이마를 콱콱 밀었다.

“너 다시 말해봐.”

“부인!”

“다시 말해!!”

백작 부인은 자신을 막으려 드는 로빈을 양산으로 한 번 더 후려쳤다.

“미하일 어딨어! 내가 분명 애들 교육 똑바로 하라고 했을 텐데?”

그쯤 되니 이마를 다친 힐데가르트의 입에서도 고운 말은 나오지 않았다.

“애한테 애를 교육하라고 시켰다고? 당신이 그러고도 후견인이야?!”

백작 부인은 힐데가르트의 반항을 듣자마자 손을 들어 올렸다.

인장 반지를 낀 손이 힐데가르트의 뺨을 후려치려던 그 순간.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불쑥 튀어나온 손이 백작 부인의 손목을 잡아챘다.

“레디스 도련님!”

레디스였다. 그가 힐데가르트를 등지고 막아섰다.

“이거 놓지 못해?!”

“내 동생한테 뭐 하는 거냐고요.”

레디스는 흥분하지 않았다.

하지만 백작 부인의 손가락에 가주 인장 반지가 끼워져 있는 걸 본 그의 얼굴이 곧 차갑게 굳었다.

“당장 이 손 놔라, 레디스.”

“왜요. 놓으면 또 때리려고?”

“어른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백작 부인이 붙잡힌 손목을 세차게 흔들었지만, 레디스는 더 강한 힘으로 그녀를 붙들었다.

상황이 이렇게 번질 줄 몰랐던 로빈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을 그때였다.

“저 애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고는 있니?”

“힐데가 뭘 어쨌는데요.”

“내게 후견인 자격이 없다며 마음대로 재판을 열었다.”

“…….”

소리 없이 놀란 레디스는 잠시 여동생을 흘끔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래서요?”

레디스는 더욱 백작 부인의 손목을 세게 붙잡았다.

“이모님이 화났으면 힐데를 마음대로 때려도 되는 거예요?”

“뭐……!”

“레디스!”

미하일이 흘러내리는 안경을 허겁지겁 고쳐 쓰며 계단에서 내려왔다.

서재에 있었던 미하일은 한 박자 늦게 소란을 듣고 달려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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