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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공녀님 (11)화 (11/166)

11화

그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뒤.

힐데가르트는 뒤뜰의 정원과 연결된 야트막한 언덕으로 나왔다.

‘하아……. 역시 식물이 많은 곳은 참 좋아.’

힐데가르트는 그간의 스트레스가 사르르 녹는 걸 느꼈다.

인간, 동물, 식물 할 것 없이 세상 모든 생명에는 마력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 마법사들은 대부분 녹음이 가득한 곳을 선호한다. 그곳이야말로 마력을 쌓기에 최적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숲에서 나고 자란 엘프들이 인간보다 마법을 잘 다루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었다.

‘괜히 마법사들이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연구하는 게 아니란 말씀.’

마력이 없는 이들이 동물을 제물로 삼아 마법을 쓰는 것도 그러한 원리였다.

식물에서 느껴지는 마력을 만끽하며 힐데가르트는 손바닥에 힘을 집중했다.

그러자 동그란 빛무리가 생겨나며 그녀의 의지대로 움직였다.

‘마력 수련은 순조롭고.’

아카락시아 저택 주변에는 식물이 많았다.

변했다고는 하나, 익숙한 장소에서 마력을 수련하는 건 생각보다 큰 도움이 되었다.

그때 저편에서 로빈이 정신없이 달려왔다.

“아가씨! 여기 계셨어요?”

“응, 잠시 산책하느라. 왜 그래?”

로빈의 뺨은 흥분으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가 오브론 대공가의 문장이 찍힌 편지 한 통을 내밀었다.

힐데가르트는 곧바로 편지를 뜯었다.

편지지에 적힌 내용은 퍽 짧았지만, 그녀를 미소 짓게 하기엔 충분했다.

‘역시. 효과가 있었네.’

힐데가르트의 반응을 살핀 로빈이 주먹을 꼭 쥐었다.

“아가씨, 대체 무슨 편지를 보내셨던 거예요?”

이틀 전부터, 신문은 오브론 대공가의 일리야 아가씨가 갑작스레 눈을 뜬 일로 화제였다.

로빈은 처음 그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힐데가르트가 그녀에게 부탁해 보낸 편지가, 꼭 그 전날에 도착했을 텐데 그게 과연 우연이었을까?

“아가씨가 뭔갈 하신 거죠?”

“으음, 그건 알려줄 수 없어. 사업 비밀인걸.”

힐데가르트는 생글생글 웃었다.

그러면서 습관처럼 마력으로 편지를 태울 뻔했다.

‘아차, 아직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걸 밝혀선 안 되지.’

그녀는 담담하게 마력을 갈무리한 뒤, 편지를 주머니에 넣었다.

“참, 솔베르 백작 부인에게선 아직 답장이 없어?”

“아…… 네. 아직이에요.”

“편지가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이상하네.”

“백작 부인의 성격이라면 직접 찾아오실지도 몰라요.”

“그럼 차라리 잘된 일이네. 1년에 두 번밖에 안 오신다며.”

힐데가르트는 오브론 대공가에 이어, 솔베르 백작 부인에게도 연락을 넣었다.

편지의 내용 자체는 별것 없었다.

당장 가주 인장 반지를 돌려줄 것.

로빈의 밀린 급여를 지급하고, 공작가의 사용인을 다시 고용할 것.

장부에 철광석 수익 내역이 쏙 빠져 있는 점을 소명할 것.

마지막으로…….

‘철광석 수익? ……이모님은, 아무 말도 안 하셨는데…….’

새하얗게 질린 미하일의 안색을 떠올리자, 힐데가르트는 저도 모르게 삐딱한 자세로 팔짱을 꼈다.

‘미하일의 후계자 수업을 내팽개치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백작 부인은 남겨진 아이들을 위해 후견인을 맡은 게 아니다.

특히 차기 가주인 미하일에게 가문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후계자 교육을 시키지 않았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힐데가르트는 비아냥거림을 숨기지 않았다.

“너한테만 저택을 맡기셨을 정돈데, 이렇게나마 얼굴 좀 뵈면 좋지.”

“……아가씨.”

로빈은 그녀를 살피며 조용히 말했다.

“백작 부인에게 화가 나셨군요.”

“당연하지.”

힐데가르트의 입가에는 느슨하게 미소가 걸렸지만, 그녀의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로빈 네게도 화낼 권리가 있어. 이 저택이 얼마나 넓은데 네게만 아이들을 돌보라며 책임을 떠맡길 수가 있어?”

“화가 나시는 마음은 알지만, 저는 괜찮아요.”

“로빈.”

“정말로요. 감히 제가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전 나름대로 즐거웠어요. 도련님들과 아가씨를 돌보는 일이요.”

로빈이 구김살 없는 미소를 지어 보이자, 힐데가르트는 침묵했다.

“아가씨……?”

힐데가르트는 한참 뒤 입을 뗐다.

“로빈, 너는 사람이 언제 어른이 된다고 생각해?”

“……네?”

별안간 물음을 던진 힐데가르트가 곱게 웃었다.

“우리는 누구나 어른이 되잖아. 하지만 스스로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나이는 제각각이지. 왜 그럴까?”

“어…….”

사람이 언제 어른이 되냐고?

로빈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 앞에서 머뭇거렸다.

머뭇거림이 길어지자, 힐데가르트는 가만히 정답을 알려주었다.

“난 말이야, 사람이 아무리 자그마한 생명이라고 해도 그걸 책임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어른이 된다고 생각해.”

“생명이요?”

“응.”

힐데가르트는 따뜻한 눈으로 로빈을 바라보았다.

“강아지든 고양이든 햄스터든……. 하물며 자기 자신이라도 괜찮아. 무언가를 돌보고 책임질 줄 아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 어른이라고 생각해.”

“…….”

“너처럼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기에 힐데가르트는 더더욱 화가 났다.

후견인이라면. 한 명의 어른이라면.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한 아이들을 이토록 쉽게 내팽개쳐서는 안 됐다.

‘책임지지 않을 거라면 거두지도 말았어야지.’

세상에는 차라리 없는 게 나은 보호자가 있다.

솔베르 백작 부인이 그런 사람이었다.

“하여간 신경 쓸 필요 없어. 이제부터가 중요해. 로빈, 내가 했던 말 기억하지?”

힐데가르트는 눈을 치켜떴다.

“네.”

로빈은 잊지 않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믿을 만한 사람들을 기억해서 편지를 보내 두었어요.”

힐데가르트는 로빈에게 믿을 만한 사용인들을 다시 부를 수 있도록 미리 연락을 취하게 했다.

로빈은 마지막까지 어린 주인들만 놓고 갈 수 없다며 백작 부인에게 호소했던 사용인을 기억하고 있었다.

“다들 안 그래도 걱정했다며 연락을 주더라고요. 언제든지 공작가의 부름에 응할 거예요.”

힐데가르트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때가 되면 부탁할게.”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로빈이 쓰러지기라도 하면 저택이 돌아가지 않을 지경이다.

하루라도 빨리 옛 모습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사용인을 복귀시키는 게 급선무였다.

재정 회복과 미하일의 후계자 교육. 거기에 가주 인장 반지까지.

산 넘어 산이라지만, 힘들다고 피할 수는 없는 법.

나 아니면 누가 하나 싶어 힐데가르트는 더욱 단단히 마음먹었다.

‘다섯 별 공작가 자존심이 있지!’

드롯셀마이어 제국에는 ‘다섯 별 가문’이라 불리는 공작가가 있다.

백석(白石)의 오브론.

스칼렛 이베르타.

사냥개 랑케르트.

수평선의 몬테를로.

그리고 무지개의 아카락시아다.

황제와 함께 제국을 세운 공신 가문. 긴 제국의 역사를 함께해 온 유서 깊은 공작가들.

미하일은 내년이면 그런 가문의 주인이 된다.

하지만 엉터리로 쓰인 장부 하나 간파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었다.

미하일이 이대로 공작 위에 오르면 수많은 사람에게 비웃음을 사는 건 물론, 공작가의 명예도 땅에 떨어지고 만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아카락시아 공작가에 대한 험담은 못 참아.’

버림받다시피 했던 저를 레온하르트와 공작가가 알뜰하게 보살펴 주었다.

힐데가르트는 제가 욕을 먹는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공작가의 위신이 실추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백작 부인을 쫓아내고 말리라.

그리고 미하일에게 제대로 된 후계자 교육을 시켜야지.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은 가문의 체계를 정상으로 되돌리는 일이다.

미하일은 그 중심에 서야 할 인물이었다.

“그만 가자, 로빈. 혹시 모르니…… 왜 그래?”

“아, 아가씨.”

그때였다.

로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로빈? 왜 그래?”

“솔베르 백작 부인의 마차예요.”

그녀의 손가락이 언덕 아래를 가리켰다.

시선을 따라 움직이자, 저편에서 한 대의 마차가 흙먼지를 날리며 저택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편지가 아니라 직접 왔구나.’

힐데가르트의 눈빛이 삽시간에 차가워졌다.

* * *

또각. 또각.

회랑에 울려 퍼지는 힐데가르트의 발소리는 빠르면서도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로빈은 그녀를 따라 걸으며 흔들리는 은발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로빈은 사람이 언제 어른이 된다고 생각해?’

그녀는 좀 전에 막내 공녀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난 말이야, 사람이 아무리 자그마한 생명이라고 해도 그걸 책임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어른이 된다고 생각해.’

그녀가 아카락시아 공작가에 들어온 건 10년 전.

영양실조로 쓰러져 있던 그녀를 아카락시아 공작 부부가 데려왔을 때부터였다.

‘아가, 정신이 드니?’

‘가엽기도 하지. 이렇게 어린데.’

부부는 그녀를 정성스레 돌보아주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로빈 또한 공작가를 위해 일해왔다.

건강해진 그녀는 정성을 다해 공작 부부를 모셨다.

공작 부부가 나란히 병으로 세상을 떴을 때는 몹시 슬펐고, 남은 세 남매를 잘 돌보자며 다른 사용인들과 함께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공작가의 분위기는 조금씩 달라졌다.

기어코 공작가의 실권을 쥐게 된 솔베르 백작 부인이 해고장을 날렸을 때는 올 것이 왔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백작 부인은 사용인들에게 무섭게 을러대기 시작했다.

퇴직금을 받고 나가든가, 한 푼도 받지 않고 맨몸으로 쫓겨나든가.

‘너희가 알아서 선택하렴.’

결국, 로빈 또한 다른 메이드들처럼 떠나기 위해 짐을 쌌다.

그랬던 그녀를 마지막까지 공작가에 남게 한 건 죄책감도, 동정심도 아니었다.

바로 어른으로서의 의무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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