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괘, 괜찮으세요?!”
안 괜찮다.
괜찮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후견인이 공작가의 전권 대리인을 겸하고 있다는, 뭐 그런 말이야?”
“네, 네……. 그런 상황이죠?”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반지까지 가져갔으니 그렇게 해도 문제가 없긴 하다.
‘아이들은…… 아니지, 직접 돌볼 이유는 없지.’
“작년에는 언제 오셨지?”
“매년 감사제 기간 전후로 한 번 오시죠. 신년 예배일 이후로도 한 번 들리시고요.”
“고작 1년에 두 번?”
“……아가씨? 괜찮으세요?”
“하하, 하, 하하하하하.”
망가진 인형처럼 삐거덕대던 힐데가르트의 웃음이 돌연 뚝 끊겼다.
웃다 보니 하나도 안 웃긴다.
“언제까지야. 그 후견인 노릇.”
힐데가르트가 차갑게 물었다.
“내년까지지? 그렇지?”
그래야만 한다.
내년이면 미하일이 열일곱.
법적으로 성년이 될 뿐 아니라 공작으로서 작위를 승계할 수 있는 나이가 된다.
후견인 같은 건 필요가 없어진다는 소리다.
그러나 힐데가르트의 간절한 마음을 배신하듯, 로빈이 고개를 저었다.
“그게…… 솔베르 백작 부인은 ‘세 남매’의 보호자라서요.”
뭔가 불길한 말을 강조하는데.
“아가씨께서 올해 열두 살이 되셨으니 성인이 되려면 앞으로 5년이 더 남았네요.”
“…….”
쩌정!
태풍에 금이 간 유리처럼 힐데가르트의 정신이 터졌다.
그러니까 뭐야.
남매 세 명이 모두 성인이 될 때까지 후견인 노릇을 할 수 있다는 건가?
‘세상에…….’
힐데가르트는 잠시 유리 온실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호랑이 없으면 여우가 왕 노릇을 한다더니.
‘어디서 얼굴도 본 적 없는 백작가의 부인이 와서 후견인이랍시고 집안을 말아먹고 있었어?!’
환생 두 번 했다가는 속 터져서 다시 죽을 노릇이다.
로빈이 새로운 찻잔을 가지고 오는 동안, 힐데가르트는 차가운 눈으로 생각을 마쳤다.
“백작 부인의 후견인 권한을 박탈시켜야겠어. 지금 당장.”
“네?”
막 새로운 찻잔을 가지고 온실에 들어선 로빈은 흠칫 놀랐다.
“저, 아가씨? 그러려면 새로운 후견인을 찾아야 하는데요?”
“찾으면 되지.”
“하지만 백작 부인께서 가만히 있지 않으실 텐데요?”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그런 게 무서웠으면 말도 안 꺼냈을 거야.”
로빈은 살짝 감탄했다.
힐데가르트의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아가씨가 정말 달라지셨구나. 우아하고, 단호해지셨어.’
가출 이후 부쩍 어른스러워졌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진지하게 가문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이란 처음이었다.
곧 청보라색 눈동자가 로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로빈.”
“네, 아가씨.”
“나는 백작 부인의 후견인 권한을 박탈하고, 새 후견인을 찾을 생각이야. 그러기 위해선 네 도움이 필요해.”
로빈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쉬운 일은 아니실 거예요. 잘못하면 아가씨가 쫓겨나실 수도 있어요.”
“쫓겨나? 내가?”
힐데가르트는 그런 말은 태어나서 처음 듣는다는 듯,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어림도 없어.”
방치도 모자라 적법한 권리조차 빼앗아서 이용하는 후견인을 그대로 보고 있을 생각은 없다.
‘한 달도 아까워. 보름 안에 후견인을 갈아 치운다.’
가늘게 눈을 접은 힐데가르트가 얼마나 그녀를 응시했을까.
“알겠습니다. 공작가를 위한 일이라면 기꺼이 도울게요.”
힐데가르트는 잠시 흥미로운 눈으로 로빈을 응시했다.
“괜찮겠어? 백작 부인이 네게 해코지할 수도 있어.”
“저는 이미 공작가에 남으면서 그분의 눈 밖에 났는걸요.”
힐데가르트는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씩 웃었다.
“백작 부인께 편지를 보내실 거라면 편지지를 준비할까요?”
“아냐. 그것보다 먼저 준비해 줬으면 하는 게 있어.”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올 정도로 탈탈 털기 위해선?
정보를 모으는 게 우선이다.
“장부랑 신문. 있는 대로 전부 다 가져다줄래?”
* * *
아무리 시간이 지났어도 공작가는 인생 전반을 보낸 곳이다.
어디에 얼마만큼 돈이 들어가는지는 대략적이나마 가늠이 간다.
때문에 힐데가르트는 로빈이 가지고 온 생활비 내역을 훑어본 순간 솔베르 백작 부인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금액으로 공작가를 좌지우지했는지 금방 알았다.
‘이게 뭐야? ……이 금액으로 어떻게 네 명이 먹고 살라는 거야?’
터무니없이 적은 저택 보수비와 유지비. 심지어 푸줏간과 과일 가게에는 외상을 주고 있었다.
‘로빈 급여도 한 달 치가 밀렸잖아?’
무엇을 예상해도 상상 이상이었다.
장부는 돌려막기와 빠듯한 예산으로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수입이라고는 미하일이 벌어오는 부수입과 백작 부인이 부쳐주는 돈이 전부.
‘속 터질 힘도 없다.’
하지만 그렇게 꾹 참고 로빈의 장부 세 권을 살핀 보람이 있었다.
그녀는 장부의 허점을 금방 파악해냈다.
‘이럴 줄 알았지. 수입금 명세가 완전 엉터리잖아?’
힐데가르트가 혀를 찼다.
“로빈, 철광석 광산은 아직도 우리가 관리하고 있지?”
“그럼요. 레온하르트 선선대 공작님께서도 그것만은 건드리지 않으셨어요.”
그건 건드리지 않았다기보다는, 사수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철광석은 무기를 만드는 주재료다.
그 때문에 무기 제조와 사병 육성으로 반역을 경계했던 초대 황제가 아카락시아 가문에 직접 철광석 관리를 일임했다.
그런데 백작 부인이 보낸 명세서에는 황실에 철광석을 납품하여 얻는 수익이 쏙 빠져 있다.
후견인이 마음대로 재정관리인 노릇을 하며 그들을 속였다는 증거였다.
‘심지어 세율 계산도 엉터리야.’
힐데가르트는 그걸로 확신했다.
‘재산을 빼돌렸어.’
당장 철광석 수익만 해도, 로빈의 급여는 물론 사용인 십수 명을 거느리고도 남을 돈이다.
장부를 살펴보니 더더욱 돈줄을 쥔 백작 부인을 공작가에서 떼어 놓아야겠다는 다짐이 깊어졌다.
“후우…….”
“아가씨, 괜찮으시면 차 한 잔 더 준비할까요?”
“응. 부탁할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로빈이 온실을 빠져나갔다.
힐데가르트는 푹신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머리가 지끈거리던 것도 잠시.
‘후견인 자격 박탈 재판을 준비해야겠어. 백작 부인을 대신할 후견인도 찾아야겠고.’
근거는 충분하다. 그러나 조금 더 강력한 한 방이 필요했다.
‘방계 가문에 후견인으로 세울 만한 사람이 있어야 할 텐데…….’
힐데가르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큰 기대는 하기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선대 공작 미카엘리스, 선선대 공작 레온하르트 모두 외동아들이라 방계 친족은 아주 먼 핏줄이었기 때문이다.
힐데가르트는 신음하다가 신문을 집어 들었다.
<특집 기사 : 이베르타의 아쿠아 알타. 이대로 괜찮은가?>
<무온 재상, 황제 폐하의 건강 이상설을 일축함.>
<검은 먹구름. 오브론 대공가를 뒤덮은 해괴한 병의 정체란?>
로빈이 가져다준 신문은 총 14일 치.
힐데가르트는 모든 신문을 꼼꼼하게 읽었다.
신문에 뾰족한 수나 정답이 있기를 기대한 건 아니었다.
다만 80년이라는 세월과 현재까지의 정보 격차를 메우는 데는 이만한 게 없었다.
“응?”
무심코 다음 장으로 넘기려던 힐데가르트의 손이 멈췄다.
그녀는 곧 신문에서 어떤 주제가 2주일 내내 빠짐없이 기사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오브론 대공가의 막내 손녀딸이 쓰러지다.>
<알 수 없는 질병 ‘검은 먹구름’ 오브론 대공가에 무슨 일이?>
“검은 먹구름?”
힐데가르트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그녀는 조금 더 자세히 기사를 읽었다.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한 달 전, 오브론 대공의 막내 손녀 일리야가 생일 파티 날에 쓰러졌는데 설상가상으로 그녀에게 이상한 일이 연달아 일어났다.
먹구름이 낀 듯, 일리야의 피부가 온통 검게 물들기 시작한 것이다.
‘……어라? 이 증상…….’
때마침 로빈이 온실로 돌아왔다.
로빈이 찻주전자와 비스킷을 내려놓는 동안에도 그녀는 신문에 코를 박은 채였다.
“아가씨? 무슨 기사를 그렇게 열심히 읽고 계세요?”
“로빈. 이거 진짜야? 오브론 대공가의 소문?”
“네? 일리아 아가씨 이야기군요. 병에 걸리셨다던데……. 한동안 떠들썩했어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을 거예요.”
로빈이 조로록, 찻잔에 홍차를 따랐다.
“꽤 많은 의원이 대공저를 드나들었다고 해요. 차도는 없었지만요.”
“차도가 없었다고? 혹시 마탑에는 연락해 봤대? 그랬으면 금방…….”
“마탑이라면 무너진 지 오래된 천공탑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
아, 그랬지.
힐데가르트는 잠시 속이 쓰리다는 단어를 실감했다.
‘다른 사람의 위기를 기회처럼 여기고 싶지는 않지만, 이게 사실이라면…….’
힐데가르트가 귀족 계보를 곰곰이 떠올렸다.
‘잠깐만. 이거…… 어쩌면 예상치 못한 사람을 후견인으로 들일 기회 같은데?’
그녀가 손가락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로빈, 편지를 써야겠으니 작은 서재를 치워줄래?”
“편지요? 어디에 보내시려고요?”
“오브론 대공가.”
“네?”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고양이처럼 치켜뜬 힐데가르트의 눈빛이 파르라니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