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문지기도, 기사도 없는 공작가.
그것만으로도 놀라운데…….
마구간? 무너짐.
지붕? 엉망진창.
“기, 기사단 초소를 헛간으로…….”
심지어 관리하기 힘든 건물은 아예 나무판자를 교차해 박아서 출입을 막아버리고 있었다.
‘꿈일 거야…… 이건 꿈…….’
힐데가르트는 과거의 잔상을 쫓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옛 영광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금으로 만든 분수대는 어딜 갔지?
제일 많은 돈을 들여 아름답게 지은 유리 온실은 왜 저렇고?
정원수로 만들었던 미로 정원은?
그리고…… 내가 세운 마탑은?
“이게 뭐야. 우리 집 어디 갔어?”
없다.
아무것도 없다.
“우리 집이…… 마탑이…….”
‘광산? 과아앙사아안? 우리 집안에 그런 게 어딨어?!’
마침내 힐데가르트는 인정했다.
네, 좋습니다. 알겠습니다. 인정합니다.
80년 후가 맞긴 한 거 같네요.
집도 좀 가난해진 것 같고요.
그런데 이건 너무하잖아!
‘좀’ 가난해진 수준이 아니잖아!
마침내 힐데가르트의 분노가 폭발했다.
“이런 미친놈들이! 세상에 말아먹을 게 없어서 집안을 말아먹어?!”
때아닌 괴성에 놀란 까마귀가 황급히 날았다.
“거짓말……. 다 거짓말이야아!!”
“힐데!”
힐데가르트는 결국 당나귀 등에서 굴러떨어졌다.
아프지는 않았다. 정확하게는 아픔을 느낄 새가 없었다.
“세상에, 아가씨! 오셨어요?”
벌컥, 저택 문이 열리더니 호들갑스럽게 사용인이 달려 나왔다.
그리고 그 속에서 유독 귀에 남는 목소리가 있었다.
“힐데? 레디스?”
“미하일 형! 괜찮아, 들어가.”
하지만 레디스의 만류에도 상대는 잰걸음으로 달려왔다.
나이는 열여섯, 열일곱쯤 될까.
레디스와 똑같은 푸석푸석한 은발.
미처 정리하지 못한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피곤함을 드러냈다.
한 뼘쯤 되는 축 늘어진 꽁지머리를 느슨하게 묶은 소년은 마찬가지로 청보라색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레디스보다는 조금 더 유순하고 다정해 보이는 눈매.
“힐데? 괜찮니?”
미하일은 한걸음에 달려와 힐데가르트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타이밍 좋게 배에서 울린 소리가 대답을 대신했다.
꼬르르륵!
미하일은 안도한 얼굴로 함께 달려 나온 사용인에게 말했다.
“배가 많이 고팠구나. 얼른 식사를 준비해야겠다. 로빈.”
“당장 준비할게요, 도련님!”
“왜 망한 건데……. 우리 집 왜 망한 건데…….”
“너 자꾸 아까부터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냐?”
레디스는 핀잔을 주면서도, 나라 잃은 표정으로 바닥을 짚고 있던 힐데가르트를 소중하게 안아 들었다.
“형, 얘 아무래도 오늘 이상해. 일단 들어가. 얘는 내가 안고 갈게.”
“힐데도 힘들었던 거야. 얼른 들어가자.”
미하일이 다정하게 웃으며 여동생의 무릎이며 팔에 묻은 흙을 털어주었다.
레디스는 짓궂게 웃었다.
“쯧쯧. 집 나가면 개고생이지. 열두 살은 그걸 몰라요.”
‘아냐! 그게 아니라고!’
힐데가르트는 눈물을 머금고 부정했다.
“아무 일 없었으면 됐어. 어서 밥 먹고 푹 자자.”
“얼른 아버지한테도 인사 좀 드려. 아빠, 일일 가출 공녀 힐데가르트 다녀왔습니다, 하고.”
레디스가 로비에 걸린 초상화를 향해 인사하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안겨 있던 힐데가르트의 눈에 이름표가 들어왔다.
[14대 공작 미카엘리스 아카락시아.]
“아…….”
찬물로 뺨을 맞으면 이런 기분일까.
‘고모가 금방 다녀와서 신발 가게 사 줄게!’
초상화 속, 초췌한 안색의 상대는 바로 갓난아기였던 조카였다.
* * *
그러니까 나는 하필이면 조카의 딸로 다시 태어난 거다.
거기까진 알겠다. 그런데 왜.
‘왜 집안이 이 꼴인 거야.’
긁힌 자국 가득한 난간이며 계단, 금이 간 대리석 벽.
듬성듬성 이 빠진 샹들리에는 환한 빛을 잃어서 저택을 더욱 으스스하게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었다.
식당은 더욱 상태가 심각했다.
“아가씨 조금 더 드시겠어요?”
“……괜찮아.”
“감자도 있어요!”
“……고마워.”
너무 많이 우려서 묽어진 수프.
꼭꼭 씹어 먹어야 겨우 목구멍으로 넘길 수 있는 질긴 빵.
그나마 먹을 만한 것이라고는 살구잼뿐인데, 그마저도 거의 다 먹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서러운 게 가난한 식탁이다.
그런데 이게 80년 뒤의 아카락시아 가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란 말인가.
“힐데, 더 먹어. 배고프잖아.”
“괜찮아……. 많이 먹었어.”
솔직히 말하면 무슨 정신으로 대답했는지 모르겠다.
‘미하일이랑 레디스랬지?’
한 사람은 미카엘리스를, 한 사람은 레온하르트 오빠를 쏙 빼닮은 내 조카의 아들들.
집안 꼴이 이따위면 ‘당장 삐뚤어져 버릴 테야!’ 하고 소리치며 나가버릴 만도 한데.
‘애들이 착해서 그런가……. 아니 그래도 그렇지!’
아무리 다정함이 여유에서 나오고, 마음이 부자라고 해도 그렇지!
‘마음만 부자인 게 무슨 소용이냐고!’
대충 굴러가는 상황은 알 것 같았다.
공작가의 식솔들을 줄였다.
아마도 먹여 살려야 할 입을 줄이기 위해서였으리라.
빈말로도 좋지 못한 재정 상황이라는 소린데…….
‘미치겠네…….’
청렴결백은 좋은 미덕이다.
하지만 미덕도 미덕 나름 아닌가.
감자에 야채수프라니!
‘어떤 놈이 우리 집 재산 말아먹었냐.’
아무 권한도 없는 애들이 집안을 팔아먹었을 리는 없다.
‘그럼 누구야?!’
고요한 분노에 몸을 떨고 있을 때였다.
“동생아, 이 콩알 호박아. 속상한 건 알겠지만 이젠 고집 좀 그만 부려라.”
“레디스.”
“말리지 마, 형. 힐데도 이제 알 건 알 나이가 됐어.”
에흠, 하고 가볍게 헛기침한 레디스가 말했다.
“힐데, 네가 검술 대회에 나가고 싶단 건 알겠어. 하지만 이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기회야.”
“……기회라니?”
“말 그대로야.”
레디스가 나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우린 어떻게든 이번 대회에서 우승해야 해. 못해도 준우승은 해야 상금으로 밀린 빚도 갚지.”
“빚?!”
빚도 있단 말이야?!
손에서 요란하게 스푼이 떨어졌다.
“얼마나 되는데?!”
“그렇게 많은 건 아니야.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미하일이 다급히 덧붙였다.
아무래도 내가 충격받을 게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100만 케루블 정도야. 어머니가 지셨던 빚이지만 거의 다 갚았어.”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빚진 채 지낼 순 없어. 내 말 알아들었지?”
힐데가르트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는 말을 실감했다.
하필이면 위에 담아둔 게 묽은 수프라서 잘도 끓는 걸까.
아니면 수프 대신 피가 끓고 있는 걸까.
“이번 대회에는 내가 나갈 거야. 그래야 상금으로 빚도 갚고……. 하여간 다 해결해야지.”
“…….”
“솔베르 백작 부인에게 네 참가비까지 내달라고 할 순 없잖아. 너무 속상해하지 마. 나중에 네가 좀 더 크면 그때 나가면 돼.”
검술 대회 참가비조차 남이 내줘야 할 상황이란 건가.
“…….”
“힐데?”
힐데가르트는 접착제를 바른 것처럼 꾹 닫고 있던 입을 뗐다.
“나…… 방으로 돌아갈래.”
전략적 후퇴였다. 일단은.
* * *
삐그덕, 삐그덕.
계단이 흔들리는 소리가 난다.
맹세컨대 전생에서는 저택에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소리다.
“하하.”
심각한 정신적 대미지를 입고 후퇴를 선택한 힐데가르트는 흐린 눈으로 현실을 부정했다.
삐걱대는 소리 한번 요란하구나.
“으하하하.”
하녀의 안내를 받아서 방에 들어오자마자, 그녀는 실 끊어진 인형처럼 침대 위에 드러누워 버렸다.
“으하하하하!”
해탈한 사람처럼 웃던 힐데가르트의 웃음이 돌연 뚝 끊겼다.
‘이럴 거면 차라리 계속 죽어 있는 게 낫겠다. 아니면 지금이라도 다시 죽든가.’
하지만 어떻게 죽겠는가.
죽었다 깨어나 보니 조카라는 것들은 빗물 새는 게 아닐까 걱정되는 저택에서 낑낑대며 살고 있다.
집에는 돈이라곤 한 푼도 없어 보이고, 심지어 빚까지 내서 살고 있는데…….
“이대론 편한 마음으로 죽는 것도 글렀잖아! 꺼흐흐흑……!”
부정-분노-협상-우울-수용.
힐데가르트는 죽음을 수용하는 다섯 단계 중 첫 번째 단계에 돌입했다.
“거짓마알! 다 거짓말이야! 거짓마아알!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으아아앙!”
삐그덕! 삐그덕! 삐그덕!
힐데가르트는 방금 막 바다에서 잡아 올린 생선처럼 침대 위에서 펄떡였다.
“으아앙! 으아아아앙!”
그녀는 현실을 부정하며 땅딸막한 몸으로 침대를 팡팡 차며 데굴데굴 굴렀다.
“아니이! 부자는 망해도 3대를 가는데에! 적당히 펑펑 돈 쓰면 사돈의 팔촌까지 잘 먹고 잘사는데! 어떻게 그걸 홀라당 말아먹어! 그걸! 그걸 다 말아먹냐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이것들아! 어쩜 이럴 수가 있냐구!”
하지만 하늘이 무너진 사람처럼 분노하고 울부짖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무려 80년이다.
아는 사람들은 모두 죽었을 테고, 레온하르트 오빠조차 이미 죽어서 땅에 묻혀 있을 세월.
‘그러니 무사히 돌아와라. 알았지?’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내가 약속을 안 지켜서 그래? 그래서 이러는 거야, 오빠?”
보고 싶은 오빠의 얼굴이 떠오르자 자연스레 눈물이 났다.
“레온 오빠…….”
이제부턴 어떻게 해야 할까.
조카들이 저 꼴로 사는데 계속 두고만 볼 수는 없다.
가문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무슨 수로 쫄딱 망한 집안을 다시 세워?”
나 혼자서 가문을 다시 세우라고?
“차라리 마성신을 다시 봉인하겠다!”
이 꼴로 뭘 하란 말이야?
이 어린 몸으로, 거지 같은 집안 꼴로!
‘이럴 거면 차라리 영지를 반납하고 작위를 내려놓는 게 낫겠어. 집안 꼴을 보니 곧 그렇게 될 거 같긴 하지만.’
부정과 분노를 끝낸 힐데가르트는 죽음을 수용하는 세 번째 단계에 돌입했다.
협상 상대는 자신이었다.
‘그냥 아카락시아는 망했다고 생각하자. 응? 망했다고 하고 작위를 반납하는 게…….’
하지만 결렬될 게 뻔한 협상이었다.
아카락시아라는 가문을 내려놓기엔 그녀가 이곳을 너무 사랑했다.
이곳에서 자랐으며, 이곳에서 죽겠노라 맹세했다.
슬픔도 기쁨도 이 땅에서 배웠다.
영지를 반납하면 그다음엔?
그 뒤엔 어디로 간단 말인가.
무지개의 아카락시아.
아름다운 힐데가르트.
비록 옛 영광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존귀한 공녀로 살게 한 추억과 칭송받은 긍지가 이곳에 남아 있다.
“흑…….”
협상은 빠르게 결렬됐고, 힐데가르트는 별수 없이 현실을 받아들였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마지막 단계.
짧은 우울과 수용이었다.
“흐어어엉! 레온 오빠 거짓말쟁이! 돌아오면 요람에서 무덤까지 수발들어줄 제국 최고 미남들을 박박 긁어모아서 두 줄로 싹 깔아놓겠다고 했으면서……!”
힐데가르트는 베개에 얼굴을 폭 파묻으며 울부짖었다.
무덤에 누운 레온하르트가 들었다면 날조된 약속에 기가 막혀서 벌떡 일어날 소리였다.
* * *
터벅, 터벅.
힐데가르트가 방으로 돌아간 뒤, 식당에 남은 두 사람은 어두운 얼굴로 마저 식사를 들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힐데가르트의 뒷모습을 눈에 담은 지 얼마나 됐을까.
미하일이 스푼을 내려놓았다.
“레디스, 역시 힐데를 수도로 보내주는 게 좋을 것 같아.”
“형.”
역시나. 우려했던 말이 나왔다.
레디스는 안 된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안 돼, 형. 우리 집 형편은 형이 제일 잘 알잖아.”
“내가 일을 더 늘리면 돼.”
“하지만……!”
“힐데가 저렇게 실망하면서 가출까지 하는 일은 없었잖아.”
미하일이 보기엔 저토록 슬퍼하는 여동생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마치 몇 개 없는 산속 도토리마저 인간 놈들에게 빼앗긴 다람쥐 같았달까.
귀여움과 슬픔이 함께 묻어나오는 모습에 미하일의 마음이 절로 약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