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외전 . 환생했더니
청난은 끝내 수야각에 입문하지 않았다. 하지만 비승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무와 술을 중심으로 수련하는 수야각의 방식이 청난의 조건과 맞지 않았을 뿐이었다.
청난은 각지에 있는 온갖 비승에 대한 문헌들을 샅샅이 조사했다. 그간 청운이 제 취향에 맞는 다양하고 독특한 서적들을 모으느라 형성했던 인맥이 큰 도움이 되었다.
조사하면서 알게 된 것인데, 한연화는 무예와 술법에 뛰어나기도 했으나, 그보다는 수야각이 힘을 잃고 혼란해진 수선계를 안정시킨 것이 비승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그런 그가 대봉인을 깨트리고 사악한 실험을 하며 선계와 인계에 재앙을 가져온 것이다. 한연화가 봉인된 지 몇십 년이 흘렀건만 청난은 끝까지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청난은 수야각과 연화문의 잃어버린 술법을 복구하고, 각지를 돌아다니며 빈민을 구제했으며, 온갖 지식을 설파하여 많은 이들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하였다. 청난의 이름은 널리 퍼져 나갔고, 심지어 일각에서는 그를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신선이라 하여 지상선이라 부르며 사당을 세우기도 했다. 그의 신봉자라 자처한 이들은 자신들의 신선이 하늘에 닿길 갈망하며 포교 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청난은 전생보다도 더 많은 업적을 이루었지만, 끝내 비승할 수는 없었다. 비승했다면, 이토록 구슬픈 곡성이 들릴 일은 없었을 테지.
백매는 한참 동안이나 앉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킨 석상처럼.
곡성은 그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차마 이 방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이들이 문밖에 모여 한 생명의 죽음을 슬퍼했다.
이윽고 해가 저물어 대지가 보랏빛 노을로 물들었을 때, 백매는 한 노인을 품에 앉고 밖으로 나섰다. 그의 가슴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잠을 자는 것처럼 편안해 보였다.
굳은살조차 없이 가녀렸던 그의 팔은 어느새 자글자글 주름이 졌고, 붉은빛을 띠었던 피부는 하얗게 창백해졌다. 이제는 그의 다정한 쓰다듬음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단 것을 다시금 상기한 이들은 악문 이 사이로 애처로운 비명을 질렀다.
청운의 아들, 진청난의 환생, 지상선, 청난.
그는 향년 46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청난의 장례는 수야각에서 진행되었다. 사망 당시 수야각에서 요양 중이기도 했거니와,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수선계의 미래를 걱정했던 수선자였기 때문이었다.
대신 수야각은 아랑 마을의 이웃들을 위해 마차와 호위를 지원해 주었다. 하지만 아랑 마을의 주민들은 대부분 생업이 있어 자리를 비우는 게 어려웠기에, 꽃집을 운영했지만 이제는 은퇴한 녕녕을 비롯한 친분이 깊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대표로 수야각을 찾아왔다.
이윽고 장례 행렬이 진행되었다. 청난의 시신은 관에 담기지 않고 여전히 백매의 품에 안겨 있었다.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그 누구도 반문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고인이 그와 깊은 관계였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신선의 품이 더욱 거룩하다 생각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곧 펼쳐진 광경은 작은 의문까지 사멸시키고, 감탄을 자아냈다.
청난을 안고 수야산을 오르는 백매의 모습이, 마치 시신을 태운 배가 바다 사이를 가로지르는 수장(水葬)처럼 느껴진 것이다.
그런 백매의 뒤로는 수야각과 다른 문파의 수선자들, 그리고 아랑 마을을 비롯하여 그에게 은혜를 입은 양민들이 질서정연하게 따라 오르며 망자를 배웅했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역대 수야각주들이 묻힌 묘역(墓域)이었다.
굳이 따지면 ‘청난’은 수야각주가 아니었지만 명맥이 끊길 뻔한 것을 가까스로 복구한 것이 그였으니, 두 번째 개파 조사라 보아도 이상할 게 없었다. 수야각의 개파조사는 선계에 올랐으니, 결국 청난이 가장 좋은 자리에 안치되게 되었다.
백매는 미리 준비된 청난의 묫자리를 내려다보았다. 땅이 깊게 파였고, 그 안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도 우스워 보였건만, 이 구덩이는 어찌 이리 깊어 보이는 것인지.
백매는 모든 이들이 이곳에 당도하길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그는 망각이 없는 신선이었기에 지난밤의 일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콜록 콜록. 청난의 마른 성대가 고통을 토로했다. 가냘픈 숨소리가 울리며 공기마저 엄숙하게 만들었다. 수야각의 모두가, 그리고 청난 스스로도 이 육체의 끝을 예견하고 있었다.
청난은 그리 나이가 많은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병약한 몸으로 무리한 생활을 보낸 대가로 남들보다 노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반년 전부터는 타인의 도움 없이는 침상에서 내려오는 것도 어려워졌다. 다행이라면 다행일지, 그를 가뿐히 안아 들 수 있는 연인이 있어 간간이 바깥바람은 쐴 수 있었다.
하나, 이제는 숨을 쉬는 것마저도 버거워 보였다. 백매는 그런 연인의 입에 약을 흘려 넣었다. 청난은 그 또한 버거운지 삼키는 것보다 뱉어 내는 것이 더 많았고, 결국은 고개를 돌리며 거절하였다.
백매는 억지로 먹이지 않고 그저 청난의 입가를 조심스럽게 닦아 주었다.
청난의 눈동자가 그런 백매의 손을 따라 움직이다 이내 눈을 감았다. 청난의 입술이 바들바들 떨리더니, 작게 벌어진 틈 사이로 안쓰럽게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매아.”
백매는 뛰지 않는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슬펐고, 두려웠으며, 또 세상에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 모든 감정을 꾹 참아 내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네, 청난. 필요한 게 있나요?”
“아니… 옆에 있어 다오.”
청난이 백매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푸석해진 머리카락이 뺨 위에 흐트러졌다. 백매는 이슬의 표면을 건드리는 듯이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다.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청난을 위해 귓가로 다가와 속삭이는 백매의 목소리는 더없이 다정했다.
“어디 가지 않아요.”
“응, 좋아……. 계속 여기, 수야각에 있어 주렴.”
“……제가 있을 곳은 수야각이 아니라 청난의 곁이에요.”
“하지만 나는 곧 사라지잖니.”
“청난……. 청난, 그런 말 하지 말아요. 그런……. 그런 말은…….”
결국 백매는 제 감정을 참지 못하였다. 차마 끝을 맺지 못하는 목소리가 애처롭게 떨렸다. 아쉽게도 청난은 그를 달래 줄 만큼 여력이 남아 있지 못했다. 청난은 남은 힘으로 차근차근 말을 이었다.
“네가 이곳에 있으면……. 내가 찾아오마.”
청난의 느릿한 목소리처럼 백매의 눈이 천천히 벌어졌다. 청난은 그런 그를 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기다려 줄 거지?”
“네, 네, 그럴게요. 반드시. 반드시 그럴게요.”
청난을 따라 미소를 짓는 백매의 눈망울에서 가느다란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청난은 그가 우는 것을 알았지만, 여느 때처럼 달래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그 모습을 눈에 담을 뿐이었다.
관 뚜껑이 닫혔다. 장례식에 온 이들의 손으로 함 움큼씩 쌓여 간 흙이 마침내 관의 마지막 흔적까지 완전히 감추었다. 이윽고 묵념을 끝으로 장례가 마무리되었다. 여전히 슬픔을 갈무리하지 못한 이들이 훌쩍거리며 묘비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그곳에 있는 모든 이들은 한 존재를 위해 자리를 비켜 주었다.
백매는 불룩 솟아오른 흙더미를 한없이 바라보더니 작게 읊조렸다.
“기다릴게요.”
백매는 눈을 감았다. 그와 처음 만난 순간이, 그와 함께한 날들이, 그를 그리워했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과연 청난이 돌아올 수 있을까? 그 누구도 쉬이 대답할 수 없을 터였다. 그는 너무나 이례적인 존재였으니.
하지만 백매는 확신했다. 그는 돌아올 것이다.
분명히 그럴 것이다.
그가 그렇게 말했으니.
◈
부호와 거지, 상인과 농부. 각기 다른 삶을 살아온 다양한 이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수야산을 올랐다. 그들의 목적은 같았다. 바로 수야각에 방문하는 것.
오래전 멸문하였다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힘을 잃었던 수야각의 기적적인 재개는 실패를 겪었던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살면서 실패를 겪지 않는 이들이 어디 존재하겠는가. 부호에게는 부호의 실패가, 거지에게는 거지의 실패가 있는 법이었다. 하여 수야각은 그 어떤 문파보다도 방문객이 많았다.
남녀노소 가지각색인 방문객이지만, 굳이 공통점을 찾자면 대부분이 성년이 넘었다는 점 정도일까. 간혹 어린아이들이 보이긴 하였지만, 부모 혹은 형제의 손에 이끌려 왔을 뿐이었다. 수야각이 다른 수선 문파에 비해 지리적으로 양민과 비교적 가깝다 하여도, 어쨌든 이곳 또한 산 중턱에 위치해 있었으니, 어린아이들은 쉬이 접근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로 수야산을 폴짝폴짝 기세 좋게 오르는 아이가 있었다. 이제야 열 살 정도 되었을까. 아이의 힘찬 발걸음은 지나는 이들의 시선을 잡았다.
“영차!”
마침내 아이의 양발이 수야각 대문 앞에 도달했다. 까마득하게 높은 대문도 아이의 활기참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긴 기다림에도 아이의 미소는 기대감에 벅차 있었다.
이윽고 아이의 차례가 되었다. 방명록을 기록하던 수야각 제자는 제 눈높이에 아무도 보이지 않자 익숙하게 상체를 내밀어 책상보다 작은 아이와 눈을 마주쳤다. 비교적 체모가 옅은 그 아이는 살포시 미소를 짓고 서 있을 뿐인데도 어쩐지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수야각 제자는 점심에 사형제들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생겼다 생각하며 나긋하게 물었다.
“이름과 방문 목적을 알려 주겠니?”
아이가 두 손을 올려 익숙하게 포권을 취하며 대답했다.
“성은 진, 이름은 청난입니다. 여기서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어요.”
-수야각 서기관 기록 中-
자신을 ‘진청난’이라 소개한 아이가 방문했다. 이제 신선 화백매가 영묘산에서 내려와 그를 맞이했다.
…
‘진청난’이 성년이 된 날, 장로 취임식이 진행되었다. 역대 수야각 장로 중 가장 어린 장로였다.
…
수야각주 진청난이 사망했다.
…
…
…
‘진청난’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등장했다. 각주께서 서신을 보내 그를 초대했다.
…
…
…
‘진청난’이…….
환생했더니, 옛 제자가 신선이 되어 찾아왔다 외전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