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1-12화 (145/146)

#12

주국의 방은 필요한 가구만 갖춰 매우 단조로웠다. 아직 짐을 정리 중이라지만 초하는 제 사존의 방은 앞으로도 변함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수야각 시절 사용하던 방도 이처럼 단조로웠기 때문이었다. 그의 취향은 정말 일관적이었다.

하지만 이 방은 수야각의 방과는 다른 구석이 많았다. 가구 배치는 물론이거니와 자잘한 소품까지도. 마치 고의로 그때와 같은 것을 피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초하가 그의 방에 수시로 드나든 게 아니었다면 주국의 취향이 변한 것이라 생각했을 정도였다.

초하는 주국이 건네준 차를 홀짝거리며 곁눈질로 주국을 살피었다. 수야각의 사제가 전한 서신에 의하면, 산을 내려갈 때의 주국은 잠도 제대로 자지 않았고, 무예를 익히지 않은 것처럼 걸음걸이에 힘이 없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다소 피곤해 보이는 정도였다.

초하는 그가 진청난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안정을 취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안심하였다.

“사존, 이제는 무얼 하실 생각이신가요?”

“앞으로도 살아가야겠지.”

“그럼 계속 찾아와도 될까요?”

“물론이야. 언제든지 와.”

“감사합니다, 사존!”

주국와 초하는 해가 저물도록 쌓인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하룻밤은 못 나눈 이야기를 청산하기엔 너무나 짧았으니, 주국은 그에게 정리된 방을 안내해 주며 다음 날을 기하였다.

주국이 방으로 돌아왔다. 그의 방에는 어느새 찾아온 손님이 제집처럼 편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먹구름이 달을 가렸음에도 그는 달빛을 받은 것처럼 은은하게 빛났다.

머리에서부터 내려온 면포가 그의 눈과 코를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 아래로 보이는 턱은 주국을 닮은 것 같기도 하였고, 청난을 닮은 것 같기도 하였다. 주국은 그의 모습이 자신을 닮은 것이란 걸 알았지만, 그럼에도 저 면포 너머에 있는 것이 제 동생이길 바랐다.

그가 입을 열었다. 당연하게도 그 목소리는 청난의 것이 아니었다.

“행동이 참 빠르더구나.”

주국이 방문을 닫고 들어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 아이를 위한 일이니까요. 도와주신 은혜는 평생토록 잊지 않겠습니다. 천명선인.”

천명선인.

천명을 기록하며, 그것을 탐하는 이들을 피해 월궁 즉, 달로 떠난 신선. 그가 주국을 보며 미소 지었다.

“평소처럼 불러. 이제 와 말을 바꾸지 않을 테니까.”

“……천명.”

주국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오랜 친우를 살갑게 불렀다. 주국이 큰 손으로 제 눈가를 짓누르며 낮게 한숨 쉬자, 천명선인은 찻잔을 탁 내려놓으며 말했다.

“걱정 말게나, 주국. 자네 동생의 혼은 무사히 윤회의 굴레에 들었다네.”

“고마워.”

“자네는 당연히 고마워해야 하네. 내 마음이 얼마나 슬펐는지 아는가? 삼십 년 지기가 처음으로 한다는 부탁이 자신의 금단을 사용해서 윤회의 바퀴를 굴려 달라는 것이라니. 난 자네를 월궁으로 데려가려고 온 것이었는데 말이야.”

“삼십 년이라, 벌써 그리 되었나.”

“아무리 인간이라지만, 벌써부터 망각증인가?”

“천명 자네는 잊었겠지만, 인간에게 삼십 년은 길어.”

“그것 참 신선에게 안 어울리는 말이네. 나는 자네를 처음 본 그날이 어제처럼 기억나거든.”

오래전, 천명선인은 천명첩에서 기이한 운명을 발견하였다. 과연 어떤 아이가 이런 운명을 타고난 것일까. 오래도록 월궁에 칩거하여 무료했던 그는 호기심에 지상으로 내려왔다.

천명은 다른 이를 만날 때 인간의 모습을 빌렸었다. 하지만 상대는 어린아이인 데다가 굳이 모습이 보여야 할 필요도 없었기에 그저 법력을 몸에 두름으로써 인간의 시야에서 벗어나기만 하였다.

그때의 주국은 막 태어난 동생과 고생하신 어머니를 위해 수발을 들고 있었다. 천명선인은 쫑쫑거리는 어린 주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기이한 운명의 아이인 청난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려 하였었다. 한데, 그 어린아이가 자신을 발견하고 만류할 줄이야. 그는 주국의 남다른 특별함에 깜짝 놀랐다.

그날 이후 천명은 종종 인계로 내려와 주국과 친분을 나누었다. 주국은 오랫동안 그가 자신의 친척인 줄 알고 있다가 선도를 닦고 나서야 고매한 신선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주국은 그와의 친분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천명선인이 시달림에 지쳐 월궁으로 간 사실은 수선자라면 쉬이 들을 수 있는 이야기였으니.

짧은 추억 회상을 끝마친 천명이 주국을 바라보며 말했다.

“후회하지 않는가? 이렇게 끝내기엔 자네의 재능 또한 뛰어났잖은가.”

“내 미약한 힘이 억울하게 죽은 그 아이에게 기회를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만족해.”

“어째서 억울하다 생각하나?”

“그 아이가 말하기를 뇌공, 즉 자네를 만났다고 했지. 한데, 자네는 곧 죽을 이에게 발걸음 할 존재가 아니잖아. 그러니 자네의 천명부에는 난이의 죽음이 아닌 다른 미래가 적혀 있었을 테지.”

“태어났을 때 보았으니 마지막도 보려 했을지도 모르지.”

“…….”

“어휴, 그리 침울한 낯을 하니 뭔 말을 못 하겠구나. 그래, 자네 말이 맞네. 난 그럴 위인이 못 되지. 난 그를 인도하러 간 게 맞아.”

안도의 한숨과 함께 어느새 경직되었던 주국의 어깨에 힘이 풀렸다.

“그럼 됐어.”

“그걸로 끝인가? 원래의 운명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하지 않아?”

“궁금하지. 하지만 네가 싫어하잖아. 이것이 그 아이를 위한 최선의 선택인 게 맞는다면, 다른 건 몰라도 돼.”

“아이고야, 자네는 어찌 이리 다정한가. 과하다네.”

타닥탁탁. 수분을 잔뜩 머금은 먹구름이 기어코 물방울을 쏟아 내었다. 거센 빗방울이 지붕을 때리며 일으킨 잔잔한 소음과 서늘한 바람은 사람의 마음을 한층 가라앉혀 주었다.

주국은 시선을 창밖으로 고정한 채 천명선인에게 말을 걸었다.

“미래를 다 알면, 지루하지 않나?”

“그랬었지. 하지만 최근엔 너희 형제가 날 즐겁게 해 주었네. 이제 자네가 죽으면 또다시 지루한 삶이 계속되겠지.”

“나 같은 자는 많아, 천명.”

“아니, 없어.”

짧게 대답한 천명선인은 손가락을 움직이며 인을 맺었다. 그러자 허공에서 ‘천명부’라 적혀 있는 오래된 서책이 생겨나 그의 손 위에 떨어졌다. 몇 장 넘긴 천명은 한편에 쓰인 글귀를 읽었다.

“‘진청난, 명계의 신.’”

“뭐……?”

천명은 서책을 닫고 대화를 이었다.

“알다시피 명계는 기능을 멈춘 지 오래야. 설사 아니라 하더라도 지상에서 태어난 존재는 명계의 신이 될 수 없어. 그래서 그자가 태어날 때부터 눈여겨보았네. 천겁까지 따라갔었지. 그럼에도 의문은 해소되지 않았어. 자네 동생이 죽기 전까지는.”

“…….”

“천겁을 겪었으니 신선이 되어야 마땅해. 하지만 그는 육체에 갇혀 죽음을 맞이했지. 그때서야 알았네. 그가 어떻게 명계의 신이 될 운명을 가진 것인지. 알겠나? 자네 동생의 죽음은 전혀 억울하지 않았어. 그것이 운명이다. 한데 그 이후에 바뀌고 말았지. 바로 자네가 날 찾아온 게야. 자네가 윤회의 바퀴를 알고 있을 줄은 몰랐어.”

천명이 시선을 올려 주국을 바라보았다. 주국의 살짝 벌어진 입은 더 다물리지도, 더 열리지도 않았다. 동생의 죽음이 예정된 일이었다는 게 그리도 충격적이었던 걸까. 하지만 이제 와 충격받는다 하여 무어가 달라질까. 그는 이미 본인에게 있어 최선인 선택을 했거늘.

천천히 마음을 정리한 주국이 질끈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며 대답했다.

“……천운이었지. 자네가 수야각 출신이라 다행이었어.”

“생전에 윤회를 비롯한 옛 명계에 대해 연구했던 기록 중 한 권을 두고 비승했다는 것을 그렇게 오랫동안 몰랐다니. 그동안 다른 후손들이 발견하지 못했던 게 참 놀라워.”

“그야 자네의 필체를 몰랐으니 당연하지. 어떻게 그 오랜 시간 동안 조금도 나아지지 않을 수 있지?”

주국은 자신이 장서각 구석진 곳에서 발견했던 오래된 서책을 떠올리고 피식 웃었다.

그 표지에 그어진 선들은 글씨보단 붓을 처음 쥐어 본 어린아이가 장난쳐 놓은 것처럼 보였었다. 누가 그걸 보고 오랜 선조가 남긴 기록이라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만약 주국이 천명선인과 친분을 나누며 그의 필체에 익숙해진 게 아니었더라면, 동생을 잃은 슬픔에 막연히 장서각을 정리하지 않았더라면, 그것은 끝까지 발견되지 못했을 것이다.

“내 서책은 나만 보는데 글씨를 연습할 필요가 있겠나. 아니면, 네가 그걸 볼 운명이라 그랬던 것일지도 모르지.”

“난 운명을 믿지 않아. 난이의 운명도 바꾸었잖아.”

“이 친구야, 그건 천명을 다루는 내가 실수로 서책을 두고 갔던 탓이지. 원래 같았으면 자네 같은 인간들은 운명을 바꾸긴커녕 다가가지도 못했을 게야.”

천명선인은 잠시 침묵하더니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더 이상 이런 부탁은 하지 말아 주게. 이번에는 나도 자네의 생사를 알 수 없었어. 자네의 금단이 무사히 분리되어 망정이었지. 자넨…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를 걸세. 이런 건 정말이지, 너무나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감정이야. 자네, 정말로 나와 월궁에 가지 않을 건가? 인간들 사이에서 사는 것보다는 더 편안하게 지낼 수 있을 거라 약조하네.”

주국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안은 고맙지만 이번에도 내 대답은 같아. 동생을 기다려야지.”

“자네가 살아 있는 동안 환생한다는 보장은 없어.”

“상관없어. 그 아이는 의외로 미숙한 구석이 있거든. 내가 기다리지 않은 걸 알면 서운해할지도 몰라.”

“하아……. 알았네.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얘기하게나. 한달음에 달려올 테니. 건강 관리도 하고. 오래 살아야 내가 즐겁지 않겠나.”

“그러지. 이제 갈 텐가?”

“그래야지. 나는 수면이 필요 없지만 자네는 아니지 않나. 또 봅세.”

“또 보지.”

달을 가리던 구름이 사라지고 달빛이 창가를 비추었을 때, 천명선인의 몸이 달빛과 하나 되듯 천천히 사라졌다. 이윽고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주국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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