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1-11화 (144/146)

#11

“네, 맞습니다. 장인이 세심하게 만든 예술품이지요. 보세요. 제 손바닥보다도 작은데 짐승의 갈기가 정밀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장로는 아첨을 했던 것처럼 이 작은 예술품의 진가에 대해 주절주절 설명했다. 연화가 말을 끊지 않자 이 장로는 적당히 마무리하고 본론으로 넘어갔다.

“사실 이 늙은이에게 손자가 하나 있사옵니다. 이 물건도 손자가 생일 선물로 받은 것이지요. 아장아장 걷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내년이면 연화문에 입문한다지 뭡니까. 아직 어리지만 재능이 남다르니 잘 배운다면 크게 될 것입니다. 하여……. 상선의 선술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면, 크나큰 도움이 될 것이라 자부합니다. 이 늙은이가 땅으로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 청이 있다면, 저희 집안이 앞으로도 계속 상선을 보필하는 것이옵니다.”

연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장로는 재촉하지 않고 여운의 미를 즐겼다. 그러다 연화의 시선이 한쪽에 박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토끼가 유독 마음에 드시나 봅니다.”

연화는 즉답했다.

“아니, 난 토끼는 별로야. 네 손자는 언제 한번 데려와. 선술을 보여 주는 건 어렵지 않지.”

“상선의 아량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마침 함께 왔으니 바로…….”

“지금은 안 돼. 나갈 거거든.”

“예? 그럼 언제 돌아오시는…….”

“너 죽기 전엔 올게.”

이 장로가 황당함에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연화는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연화는 불쾌했다. 문제는 왜 불쾌한 것인지 본인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기분을 달래 보려 남쪽으로 가 바닷바람을 맞았고, 북쪽으로 가 등산을 하였다. 동쪽으로 가 들판에 누워도 보고, 서쪽으로 가 절벽 끝에서 떨어져도 보았지만, 이 알 수 없는 불쾌함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왤까. 난 왜 기분 나쁠까. 한참을 고민하던 연화는 문뜩 작은 이 장로가 가져왔던 토끼상이 생각났다. 그것은 두 손가락으로 잡을 수 있을 만큼 몹시 작았는데, 그중 특히 머리는 가운데에 구멍을 뚫으면 반지로 안성맞춤일 정도로 조그마했다.

연화는 오래전 수야각에서 토끼 때문에 화백매와 싸웠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는 망각의 작용을 받는 인간이었는데, 어째서 그런 사소한 일이 잊히지도 않은 것인지.

‘그러고 보니 독사 같던 진주국의 대가 이어졌었지. 쓸 만한지 보러 가 볼까.’

연화는 가볍게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도착한 작은 마을은 지극히 평화로웠다. 연화는 이 마을의 가장 큰 집인 진가 사택의 담벼락을 사뿐히 밟고 넘어갔다. 이 집의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고용인들만이 자신의 일을 하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지난 세대 때는 바깥과의 교류가 활발했었는데, 이번 가주는 좀 다른가 보네.’

진씨 가문 사람들은 대체로 정이 넘쳤다. 사람을 좋아하고, 동물을 좋아하며, 심지어 사물마저도 애정을 갖고 다루었었다. 하여, 이 마을에 둥지를 튼 진주국의 후손들은 대체로 마을 주민들과 정겹게 어울려 왔다.

하지만 지금 가주의 성격이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이상할 건 없었다. 진주국도 오직 제 동생만 챙기지 않았던가. 간혹 성격이 대를 건너뛰고 나타나기도 한다고 하니, 진주국의 성격이 삼백 년이나 지나서 찾아왔대도 이상할 게 없었다.

연화는 모습을 숨긴 채 서성이다가 한 어린아이가 우다다 뛰어 다니는 것을 보였다. 아이의 걸음걸이는 매우 불안정하여 당장에라도 넘어질 것 같았고, 역시나 얼마 안 가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연화의 손짓 한 번이면 아이는 금세 중심을 잡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연화는 그러지 않았으니, 결국 아이는 콰당 넘어졌다.

뒤늦게 아이를 쫓아온 여성이 아이를 일으켜 세우고 옷을 털어 주었다. 아이의 손바닥이 바닥에 쓸려 빨개졌다. 아이는 눈에 힘을 주어 눈물을 참으려 했지만, 말똥말똥한 눈망울은 당장이라도 홍수가 날 것 같았다.

“아이고, 도련님 괜찮으세요? 약 먹기 싫다고 이리 뛰어가시면 어쩌신답니까.”

“하, 하지만……. 진짜 맛이 없는걸.”

아이는 투덜거리면서도 결국은 여성의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되돌아갔다.

‘흐음, 아이가 약해서 문을 걸어 닫은 거구나. 이런 대갓집의 약한 아이는 표적이 되기 쉽지. 그런데 아쉽네. 꽤 괜찮은 쌍영근이던데. 하지만 몸이 약해서야 이번 대에도 수선자는 나오긴 글렀네.’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연화는 미련 없이 가볍게 땅을 박차며 담벼락에 올라섰다.

결국 이곳에서도 제 기분이 풀릴 건 찾지 못했다. 올라가서 화백매나 찾아갈까. 하늘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연화가 고개를 돌리자, 놀랍게도 담벼락 밖에 선 한 꼬마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하네? 평범한 인간에게 보일 리가 없는데.’

연화는 과장되게 고개를 기울여 보았다. 이 꼬마가 정말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라면 어떤 반응이라도 있을 테지. 그러나 확인도 하기 전에, 어느새 다가온 한 청년이 꼬마를 번쩍 안아 들었다.

“난아, 뭘 그리 보고 있었어?”

“음, 구름이 이뻐서요.”

“정말 이쁘구나. 갖고 싶니?”

“아니에요. 구름은 하늘에 있는 게 더 잘 어울려요.”

“하하, 그렇구나. 대신 용수당을 사 줄까?”

“네, 좋아요.”

청년은 아이를 안은 채로 저잣거리의 인파 사이로 사라졌다.

연화는 그들의 모습이 꽤나 멀어진 후에야 고개를 들어 올려 하늘을 보았다. 아이가 말했던 이쁜 구름이 무엇이었을까. 연화는 알 수 없었다. 자신과 아이의 미적 감각이 달라 알아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고, 그새 바람에 흘러가 버린 것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구름은 저와 상관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아이의 시선이 머릿속에서 떨쳐지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그래, 사존을 닮았던 것 같아.’

이목구비는 전혀 달랐지만, 그 올곧은 눈빛은 그를 떠올리게 했다.

하나, 그의 시선은 제 것이 아니었다.

이내 연화는 조금 전 보았던 진씨 혈육의 아이가 생각났다.

‘제자나 받아 볼까.’

운이 좋다면 차후 쓰임이 있을 테고, 아니라 하더라도 무료함은 달랠 수 있을 터.

연화는 담벼락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그는 사람이 없는 골목을 지나며 숨기고 있던 모습을 드러냈다. 애초에 그의 복장은 꽤나 수수했기에 저잣거리 가운데에서 눈에 띄지 않고 잘 어우러졌다.

연화는 곧장 대문으로 가 문을 통통 두드렸다. 문은 열리지 않은 채로 낮은 음성이 흘러 나왔다.

“손님은 받지 않습니다.”

연화는 대답 대신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한 사람이 지나갈 정도로 열렸고, 방금 전 목소리의 주인으로 보이는 남성은 사근사근 미소 지으며 그를 반겨 주었다.

“오시기로 하신 선사님이시군요.”

“그렇소. 차군이라 불러 주시오.”

“네, 차군대인. 어르신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연화가 씨익 웃으며 대문을 넘어 들어가자 대문은 다시금 쾅 닫혔다.

외전 4. 헌화

지나는 사람도 몇 없는 이 작은 시골 마을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이 있었다. 하나 이제는 그것도 옛말. 적지 않은 짐이 실린 수레가 황량한 대로변을 조심스레 달려왔다.

히이이이-

목적지에 도착하자 지루한 여행길을 보낸 말들이 퍽 인간 같은 한숨을 내뱉었다. 터벅터벅 마부석에서 내린 이는 이제야 스물 정도 된 듯한 어린 청년이었다.

“사존!”

청년은 마치 오래간만에 가족을 만나는 것처럼 누군가에게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런 청년을 반긴 이는 키가 크며 사시사철 무표정일 것 같은 무거운 분위기의 사내였다. 그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다.

“그리 뛰어올 필요 없다.”

“허억 헉, 사존을 다시 뵌 기쁨이 이리도 크니 어찌 서두르지 않겠습니까.”

짧은 거리를 뛰었을 뿐인데도 숨을 헐떡이는 모습은 무예와 거리가 멀어 보이건만, 청년은 사내를 보며 여느 무인처럼 공수를 건넸다.

사내는 제 앞에서 차오르는 숨을 정리하는 옛 제자를 보며 얕은 미소를 지었다. 제자는 그를 따라 웃었다. 청년은 사내의 웃음 속에 숨겨진 씁쓸함을 읽어 내지 못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수야각의 수사가 아닌 진주국과 주초하였다.

수야각을 나온 주국은 진가장으로 돌아가기는커녕 재산도 포기한 채 이 한적한 시골 마을을 거처로 삼았다. 진씨 부부는 그의 결정에 몹시 슬퍼했다. 둘째 아들을 잃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앞길이 창창하던 장남마저 제 길을 버리고 떠나 버렸으니 어찌 슬프지 않았을까.

주국의 성격상 슬퍼하는 부모를 두고 떠날 리가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국이 비애에 빠져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는 것뿐이라 생각하였었다. 그렇기에 그가 기어코 시골 마을의 집을 샀을 때에는 많은 이들이 놀라워했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차남 진청난의 죽음으로 인해 성격이 바뀐 건 아니냐며 쑥덕거리기도 했다.

그 탓에 주국은 수야각을 방문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수군거림을 듣고 싸우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런 주국의 사정을 알고 몇 년 만에 연락하여 운반꾼을 자처한 것이 바로 주초하였다.

하인에게 마차가 싣고 온 것을 운반하도록 지시한 주국은 초하와 함께 실내로 들어갔다.

“차를 준비해 놓았는데, 네 입맛에 맞을지는 모르겠구나. 원한다면 곡차도 있으니 편히 말하거라. 이제 너도 성년이 되었지?”

“차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집 밖에서는 곡차를 삼가기로 약조했거든요.”

“곡차에 약한가 보구나.”

“아쉽게도요.”

접견실이 아직 정리되지 않은 탓에 주국은 초하를 자신의 방으로 안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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