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연화의 발언에 다섯의 이목이 순식간에 집중되었다. 어찌할 바 모르는 표정이 넷, 그리고 화백매는 기분이 나빠 보였다. 왜 저런 표정을 짓지? 나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게 아닌가? 연화는 이해 못 할 상황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매는 구겨진 제 이마를 눌러 펴면서 싸늘하게 대답했다.
“한 공자, 말조심하세요. 여긴 엄연한 도문입니다.”
“하지만 수야각도 불살주의는 아니잖아요? 사존 아니, 은사님도 고기 좋아하시던데.”
제 스승이 거론되자 애써 폈던 백매의 이마가 다시 구겨졌다.
“살생은 그렇게 가벼운 게 아닙니다. 쉽게 말하지 마세요.”
“사형의 말이 맞습니다. 이 토끼가 무슨 죄가 있다고 공자께선 그리 가혹한 말씀을 하시나요.”
청용이 백매의 말에 호응하며 나서자 연화의 시선이 자연히 돌아갔다. 연화는 그녀의 말이 불쾌했다. 어째서일까. 스스로도 이유를 모르겠으나, 제 기분이 상했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런 감정이 표정에서 드러난 것인지. 백매가 한걸음 앞으로 나오며 청용을 몸 뒤로 숨겼다.
“사매에게 무슨 짓이죠?”
“제가 뭘요?”
“겁줬잖아요.”
“흠? 화 공자, 저는 아무 말도 안했는데 어찌 겁을 줍니까?”
연화가 어깨를 으쓱하며 빈정거렸다. 백매는 불쾌함을 전혀 숨기지 않고 매섭게 노려봤다.
“얼굴로 겁줬잖아.”
“이거 너무 억지 아니야? 이렇게 생긴 걸 어떡해?”
“그래? 내가 보기엔 아닌 것 같은데. ‘내’ 사존 앞에서는 순한 양처럼 굴잖아.”
“그분은 내 은인이신데 어찌 예우에 부족함이 있을 수 있겠어?”
“그럼 연화문주 앞에서 말 한마디 없이 얌전했던 것도 같은 이유겠네?”
백매의 입에서 ‘연화문주’가 거론되자 연화의 신경이 날카로워졌고, 이내 그의 말이 끝났을 때엔 연화의 주먹이 백매의 왼쪽 볼을 강타하고 있었다.
백매는 평소에도 한연화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주먹까지 받았으니 그 감정이 더욱 고조되어 ‘두루두루 잘 지내는 대사형’의 역할도 잊게 만들었다.
백매는 잃었던 중심을 빠르게 가다듬고는 오른손을 길게 뻗으며 마찬가지로 연화의 볼을 덮쳤다.
연화는 방어하지 않았다. 백매가 공격하면 그대로 몸을 내주었고, 그만큼 더욱 강한 힘으로 반격했다. 그런 수를 수차례 반복하더니, 주먹다짐이던 싸움은 어느새 물과 불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막내 사매는 울먹이고, 다른 세 명의 사매와 사제들은 싸우는 둘을 말리려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 둘은 같은 세대 안에서 두 손가락 안에 드는 이들이었으니, 진정시키는 것이 수련보다도 어려웠다.
연화와 백매가 정신없이 치고 박고 있을 때, 새롭게 나타난 한 인물이 버럭 소리 질렀다.
“화백매!”
백매는 익숙한 고함에 신경이 쏠린 탓에 연화의 주먹을 피하지 못하고 결국 바닥을 뒹굴었다. 백매가 고개를 들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자신을 때린 한연화가 아니라 목소리의 주인이었다. 그곳에는 청난이 소매를 나부끼며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사, 사존…….”
“사조온……!”
막내 사매가 청난에게 달려가 품안의 토끼를 보여 주었다. 청난이 살펴보았지만 토끼는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 청난이 안타까운 낯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막내 사매의 눈에는 기어코 물방울이 매달렸다. 청난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더니, 백매를 바라보며 날카롭게 말했다.
“백매는 방에 들어가 있거라. 내 따로 부르겠다. 그리고 한 공자.”
청난의 시선이 연화에게로 돌아갔다. 연화는 청난이 말을 잇기 전에 잽싸게 대답했다.
“화 공자랑 함께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하아, 그래요. 부디 싸우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말을 끝낸 청난은 막내 사매의 손을 잡고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연화는 백매를 따라 그의 방으로 들어왔다. 백매는 책상 앞에 단정히 앉아 언제 찾아올지 모를 스승을 기다렸다. 그 모습으로 보아 말을 건다 하여도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았다. 대화상대가 없어 무료해진 연화는 태평하게 거닐며 방 안을 구경하였다.
연화는 문뜩 제 아버지가 떠올랐다. 그는 제 아들과 같은 천영근이며 동년배이기까지 한 화백매를 매우 경계하며 매일같이 이렇게 말했다.
-수야각의 화백매를 이겨야 한다. 진청난 그자는 인간의 재능이 아니니 거기까지는 바라지 않겠다. 하나, 화백매는 다르다. 고아인 그와 달리 너는 집안이 좋아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을뿐더러, 수련도 그보다 몇 년은 더 빨리 시작했지. 이런데도 그를 이기지 못하면 넌 폐물과 다를 바가 없다. 알겠느냐?
불쾌감이 몰려온 연화는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털어 냈다. 그러자 이번에는 방금 전 일이 떠올랐다.
‘화백매의 이름만 부르셨지.’
화난 목소리였으나, 어찌되었든 청난이 부른 건 화백매뿐이었다.
‘나도 옆에 있었는데.’
몹시 맘에 들지 않았다. 화백매도. 은사님도.
연화는 몸속에서 불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진정하자. 어찌됐든 셋이 선계에 가면 영원토록 마주 봐야 할 텐데, 잘 지내야지.’
연화는 긴 호흡과 함께 화를 달랬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백매가 일어나 문을 열자 그곳에는 막내 사매가 서 있었다. 스승이 잘 달랜 모양인지 그녀는 더 이상 울먹거리지 않았다. 그녀가 백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각주께서 사존을 찾으셨어요. 그 탓에 조금 늦어지신대요.”
“그래? 알려 줘서 고마워, 사매.”
백매가 허리를 낮추더니 사매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연화는 어처구니가 없어 피식 웃었다. 방금 전 방 안을 장식했던 동상 같던 이는 다른 사람인가? 어찌 한순간에 저리 바뀔 수 있는 것인지.
그러다 문뜩, 또다시 아버지가 떠올랐다. 그라면 분명 갑작스러운 손님이 찾아와 늦어진다 해도 아무런 기별을 하지 않았을 터였다. 어째서 그의 스승만 이토록 다정하지? 어째서 질투하게 만드는 것이란 말인가.
연화는 정말 불쾌했다.
연화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백매는 제 사매를 달래었다.
“토끼에 대해서는……. 정말 미안해.”
“괜찮아요 사형. 사존께서 말씀하셨는데, 상처가 너무 깊어서 치료해도 살지 못했을 거래요.”
“그래도 최선을 다한 것과 그러지 못한 건 달라.”
“그건……. 그건 그래요.”
백매는 화병에 꽂혀 있던 줄기가 얇은 꽃을 꺼내더니 막내 사매의 손가락에 반지처럼 엮어 주었다. 두개의 줄기가 튀어 나온 모습은 토끼를 떠올리게 하였다.
“내가 잘못했어.”
“와- 사형 손재주 좋으시네요. 좋아요. 용서해 드릴게요.”
기분이 풀린 막내 사매가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그러다 연화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백매가 고개를 돌려 연화를 바라보았다. 연화는 두 손을 들며 자신의 무해함을 어필했다.
“이번엔 정말 아무것도 안 했어.”
백매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고, 대신 사매를 되돌려 보냈다. 연화가 어깨를 으쓱이며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왜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미움받는 거야? 너는 똑같이 아무것도 안 해도 사랑받는데.”
“아무것도 안 하지 않았고, 사랑받은 적도 없어.”
“와, 화백매 너 진짜 재수 없는 거 알아?”
“너만 할까.”
◈
피이이- 피이이- 연화는 휘파람을 불며 무료한 날을 달래고 있었다. 연화문에서 가장 큰 방인 이곳은 좌측, 우측, 심지어 천장까지도 귀중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으나, 그에 비해 연화의 복장은 간소하기 그지없었고, 막 잠에서 깬 사람처럼 앞섶이 벌어져 있기까지 하였다.
똑똑.
“상선, 이 장로입니다.”
“응, 들어와.”
연화의 허락에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나이가 지극한 노인이었다. 노인은 연화에 앞에 넙죽 엎드려 큰절을 하였다.
많아 봐야 삼십 대 정도의 외모인 연화에게 이토록 극진한 예의를 차리는 모습은 퍽이나 기이해 보였다. 하나 이 젊은이가 실제로는 노인보다 더 오래 산 신선임을 모르는 이가 없었으니, 이런 광경은 어느덧 연화문의 일상이 되었다.
“이 장로, 일어나.”
“감사합니다 상선.”
상체를 일으킨 이 장로는 괴이해 보일 정도로 입꼬리를 길게 찢으며 웃더니 시원하게 말을 이었다.
“상선께서는 여전히 풍채가 남다르십니다. 오늘도 이렇게 창생을 살펴 주시니, 이 노인이 만인을 대표하여 감사 인사 드리겠습니다.”
입에 기름을 바른 것처럼 아첨의 말들이 막힘없이 쏟아지자 연화는 기가 막혔다. 누가 창생을 돌봐? 눈이 어떻게 삐어 있어야 그렇게 보이는 건지.
물론 그의 말이 진담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번에도 부탁을 하러 온 것이겠지.
연화는 손을 내저으며 이 장로의 말을 끊었다.
“알았어, 알았어. 서론은 그쯤에서 끝내. 오늘은 또 뭐 때문에 왔어? 누가 괴롭혀? 어떻게 도와줄까?”
“괴롭힘이야 언제나 있었지요. 어찌 그런 사소한 것으로 상선을 귀찮게 하겠습니까. 그저 며칠 전 저희 집안에 괜찮은 물건이 들어왔지 뭡니까. 이 작은 물건이 잠시나마 상선의 무료함을 달래 드릴 수 있을까 하여 가져왔을 뿐입니다.”
“흐음. 그래? 보여 줘 봐.”
이 장로가 가볍게 손짓을 하자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청년이 상자 하나를 가지고 들어와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열두 개의 금덩이가 들어 있었다.
“십이지신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