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1-9화 (142/146)

#9

약속대로 산문이 열린 날 청난은 백매와 함께 이동했다. 다른 문파의 수사들이 본다면 귀한 천영근이 둘이나 있다며 쑥덕댈 만도 하였지만 수야각 수사들은 이미 그들과 한 지붕 아래에서 생활하며 수도 없이 봐 온 까닭에 충분히 익숙해져 있었다.

산문이라 함은 수야산의 산기슭을 이른다. 그곳에는 넓은 공터가 있었는데, 평소에는 다니는 사람이 없어 한적한 곳이었다. 백매는 그곳이 그리 넓은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산을 내려오며 멀리서부터 보았던 무수한 점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수야각 입문을 바라는 소년 소녀들이었다.

공터의 한쪽에는 다소 높게 지어진 보각이 있는데, 제자를 받길 원하는 수사들은 모두 그곳에 앉아 있었다. 청난은 가장 끝자리에 백매와 함께 앉았다.

해가 중천에 뜨자 입장을 마감하며 입문 시험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해가 점차 기울어지고 땅이 붉게 물들 때까지 아무런 조짐도 보이지 않았고, 어떤 수사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아래 모인 이들이 의구심에 지쳤을 무렵, 한 수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공터 가운데를 가로질렀다. 그는 한 소년의 앞에 멈추었다.

그는 소년과 몇 마디 주고받더니 대화가 끝나자 소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손목을 짚었다. 그러곤 자신의 제자가 될 것인지 물었다. 소년이 기쁘게 받아들이니, 오늘 첫 입문 제자가 나왔다. 소년은 방금부터 모시게 된 사존의 안내에 따라 다른 쪽에 마련된 보각에 가 앉았다.

이후로 비슷한 것이 반복되었다. 사제 관계가 맺어지기도 하며, 또 일부는 아이들에게 거부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남은 아이들은 이 입문 시험의 정체를 알지 못한 채 의아해하였다.

백매는 그런 광경을 몇 번 보더니 청난을 돌아보며 말했다.

“선골, 그리고 영기의 순정함을 보는 것이군요.”

“그래 맞다. 그들의 재능을 보는 것이지. 이 정도 거리에서도 영기가 느껴진다면 그는 필히 수선의 재능을 가졌을 테니 말이야. 그리고 무골과 맥을 짚어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니 시험을 치르는 건 아이들이 아닌 스승이라 할 수 있겠구나.”

청난은 설명을 하면서도 아이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구석구석 살피던 그의 눈동자는 이윽고 한 아이에게 멈추었다.

“백매야, 사매를 잘 챙길 자신이 있느냐.”

백매는 여전히 그에게 다른 제자가 생기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그의 스승이 바라는 대답이 아닐 테지. 그는 차분히 대답했다.

“사존을 실망시키지 않을 거예요.”

“좋구나. 동생을 데려오마.”

청난이 내려가 공터를 가로질렀다. 빠르고 가벼운 발걸음은 인기척 또한 내지 않아 그가 다가왔다는 것을 알아챈 이들은 손에 꼽았다. 청난은 한 소녀의 앞에서 멈추었다.

“소저, 잠시 실례를 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선사님.”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소매를 걷어 그에게 척 내밀었다. 청난은 그녀의 맥을 짚어 보고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이 사람 아래에서 수련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소녀를 선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사님의 별호는 어찌 되십니까?”

소녀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히 물어 왔다. 청난이 조곤조곤 대답하였다.

“성은 진, 이름은 청난을 씁니다. 주로 초무검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청난의 말이 흐를수록 시선들이 점차 모여들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이곳에 모인 이들 중 대다수가 그의 명성을 들었을 테고, 그중에는 그의 제자가 되기 위해 온 이들도 적지 않았다.

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더니 곧 빙그레 웃으며 양손을 포개었다.

“소녀 하청용, 사존께 인사드립니다!”

“오냐.”

장래가 기대되는 한 사제 관계가 성사되는 훈훈한 장면이 벌어지는 와중에, 보각에 남은 백매는 사숙, 사백의 한숨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진 사형이 내려가기 전에 제자를 받았어야 했는데…….”

“걱정 말게, 사제. 사제도 자신의 주제를 모르는 아이를 받고 싶진 않았을 것 아니야.”

“하아… 그래도…….”

백매는 그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내었다. 청난이 새로운 제자를 반대편 보각에 데려다주고 다시 백매의 옆에 앉아 방금 들었던 소녀의 이름을 알려 주었다.

이날, 청난은 세 명의 아이들을 더 선택했고, 당연하게도 그들은 거절은커녕 날뛰며 기뻐하였다. 그렇게 백매에게는 두 명의 사매와 두 명의 사제가 생겼다. 그중 백매만이 기뻐하지 않았다.

외전 3. 한연화

강은 핏물이 흐르고, 산은 시체로 뒤덮였다. 인간의 발소리도, 짐승의 울음소리도, 작은 새의 날갯짓 소리까지 들리지 않았으니, 마치 이 세상에 홀로 남은 것 같았다. 철퍼덕 철퍼덕 핏물로 질척해진 산기슭을 걸어 올라가니, 이내 아는 얼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배 한가운데에 칼이 꽂힌 연화문도를 지나고, 검은 피를 토한 한가장의 하인을 지났다. 그렇게 남녀노소 다양한 이들을 지나 마침내 본 것은, 짐승에게 팔다리가 물어뜯겨 너덜해진 낯익은 시체.

“헤에-.”

연화는 죽은 제 아버지를 보며 그저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눈꺼풀이 올라가며 붉은 눈동자를 드러냈다. 막 잠에서 깼음에도 불구하고 나른한 기색이 전혀 없는 연화는 그저 눈동자만 굴리며 주변을 살폈다. 익숙한 천장, 익숙한 벽. 언제나 같은 지루한 자신의 방이었다.

방문 앞에는 저와 비슷한 연배의 청년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보나 마나 아버지께서 보내신 것이겠지. 연화는 한숨을 내쉬는 대신 나지막하게 청년을 불렀다.

“사제.”

“어……. 어억! 사형, 기상하셨습니까!”

연화와 눈을 마주친 사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우렁차게 인사했다.

“응.”

연화는 짧게 대답하며 이불을 젖혔다. 뒤늦게 장문인의 명령인 ‘대사형 수발들기’의 역할을 떠올린 사제는 한편에 걸려 있는 옷을 가져와 연화의 착의를 도왔다.

이 어린 사제는 자신이 진짜 시종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잡다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연화의 기분을 살폈다. 그런 사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연화는 ‘응’, ‘그래’ 같은 짧은 대답만 할 뿐이었다.

이 간단한 대답마저도 오후가 되면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겠지.

당장 외출해도 손색없는 단정한 차림새가 되자, 기다리고 있던 중년의 선사가 문을 열고 들어오고 사제는 조용히 나갔다. 연화가 책상 앞에 앉자 선사는 짧은 인사말도 없이 수업을 진행하였다.

그렇게 묘시에 시작된 연화의 수업은 미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이제 식사를 마치면 이후로는 검법 수련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런 일정은 일상적이었으니 평소의 연화라면 얌전히 식당에 들어가 검법 스승을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예사롭지 않은 꿈을 꾼 탓일까. 오늘따라 제 발은 다른 곳을 원했다.

발걸음을 옮기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결심 같은 강한 의지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마음이 가는대로 움직일 뿐이었다. 다만, 연화문의 대문 쪽에는 한씨 가문의 눈과 귀가 되어 줄 사형제들이 많았으니, 연화는 구석진 곳으로 가 조용히 담을 넘었다.

뒤에서 저를 찾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으나, 연화는 아랑곳하지 않고 검날을 밟아 하늘을 날아갔다.

연화가 도착한 곳은 수야각이었다. 방명록을 적는 어린 제자에게 아랫마을에서 사 온 만두를 건네곤 익숙하게 대문을 넘었다. 푸른 의복 사이에 섞인 붉은 의복은 꽤나 눈에 띄었지만, 연화가 이렇게 찾아온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기에 수야각 제자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수야각 안쪽으로 들어온 연화가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리자, 익숙한 미역 같은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비록 목적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인사를 할 만큼은 관심이 있는 상대였으니, 연화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화백매 공자!”

제 이름이 불리기도 전에 기척을 알아차린 백매는 목소리가 들린 것과 동시에 몸을 틀어 연화를 바라보았다. 그런 백매의 표정에는 미처 지우지 못한 당혹감이 묻어 있었다.

‘음?’

연화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기울이자 뒤늦게 백매와 함께 있던 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청난 사존의 다른 제자들이네.’

백매를 포함하여 다섯 명. 그중 막내는 올해로 열두 살이 된 여자아이였다. 연화는 그제야 그 막내 사매가 품에 안고 있는 하얀 털 뭉치를 발견했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어린 토끼가 가쁜 숨을 내뱉고 있었다.

“웬 토끼?”

“다쳐서 쓰러져 있는 걸 제가 발견했어요.”

막내 사매가 나지막하게 대답하자, 그녀의 옆에 있던 청난의 둘째 제자인 하청용이 말을 보탰다.

“의약장로님께서는 동물을 싫어하셔서 분명 약을 내주지 않으실 테니,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수야각 사람도 동물을 싫어하는 줄은 몰랐네요.”

연화의 머릿속에서의 수야각원은 이 땅의 모든 생명체를 아끼고 사랑하는, 자신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아니, 그건 청난 사존이었던가. 다른 사람들은 관심이 없어서 어떤지 모르겠네.’

연화의 시선이 백매에게로 돌아갔다. 생각해 보니 화백매도 청난 사존의 앞에서만 내숭을 부리지 진심으로 만인을 사랑하는 것 같진 않았다.

“장로님께서 소싯적에 늑대에게 물리셨었대요.”

“흠, 그렇구나.”

연화의 시선이 다시금 토끼에게로 향했다. 어떻게 보아도 이 토끼는 죽을 운명이었다. 코끝을 맴도는 피비린내가 꽤나 짙었다. 저 작은 몸집에서 이만한 혈액이 쏟아졌으니, 어떤 약을 바르든 소용없는 짓일 터이다.

‘화백매는 알 텐데 왜 저러고 있지?’

그는 소용없는 짓임을 알면서도 사제, 사매들과 머리 맞대고 장로 몰래 약을 빼 올 궁리를 하고 있었다. 차마 말하기 어려워서 그런가. 자신에게는 할 말 못 할 말 다 하지만, 제 스승에게 완벽하게 내숭을 부리려면 동문의 제자들에게도 잘 보일 필요가 있겠지.

연화는 몇 안 되는 친구를 위해 그가 하지 못한 말을 대신 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거 내가 처리해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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