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과거에 연모를 다룬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누군가는 연모를 하면 술에 취한 것 같다 하였고, 또 누군가는 아이가 된 것 같다고 했었다. 또 다른 누군가는 매일이 열병 난 것 같다 하였고, 다른 이는 번개를 맞은 것 같았다 하였다. 그곳에 기록된 이야기들은 마치 서로 다른 감정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저마다 달랐으니, 저와 백매가 품은 감정 또한 그러한 것이다.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도 기왕이면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의 머리 위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언제나 위풍당당하길 바랐다. 자신이, 모든 사람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에게 기쁨만을 가져다준다면 참 좋을 텐데. 청난은 제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너무나 이상적인 바람을 품었다.
청난은 그를 안은 손을 풀고 눈을 마주 보았다.
“나랑 놀자꾸나. 그러면 두려움도 잊히지 않겠느냐.”
“하지만…….”
백매는 말을 끝까지 할 수 없었다. 청난의 입술이 그의 입을 막은 탓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숨결과 법력이 뒤섞였다. 두 입술이 서로 멀어지자 청난은 장난스럽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도 금지야.”
백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빼내며 청난의 입술을 탐했다. 백매의 몸에 힘이 실리고, 청난의 등이 침상 위에 닿았다. 두 사람의 머리카락이 침상 위를 어지럽혔다.
백매가 입술을 떼지 않은 채 가볍게 손목을 휘두르자, 누군가 끈을 당긴 것처럼 휘장이 샤르륵 풀리며 침상을 가렸다. 어느새 불이 붙은 촛불은 그윽한 향을 자아냈다.
‘저 초가 향초였던가……. 뭐 상관없지.’
청난이 눈을 감았다. 백매의 입술이 청난의 턱선을 타고 점차 아래로 내려갔다. 청난은 그의 입술이 닿은 모든 곳이 마치 촛농이 떨어진 듯 달아올랐다. 이윽고 백매의 입술이 옷깃에 닿자 백매가 고개를 들어 청난을 바라보았다.
“제가 당신을 다치게 하면 어떡하죠?”
“네가 날 왜 다치게 하겠어?”
“……그랬는걸요.”
백매의 시선이 청난의 입술에서 머뭇거렸다.
“아.”
청난은 그제야 첫 접문 때 제 입술에서 피가 났던 것이 생각났다. 청난이 저도 모르게 입술을 만지작거리자 백매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뒤로 뺐다.
“입술에서 피가 난다고 죽지 않아.”
“그, 그런 말 마세요.”
“그리고 좀 다치면 어때? 네가 간호해 주면 되지.”
“하, 하지만…….”
청난은 그의 뒷목에 양손을 걸치며 끌어안더니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그리고 선계에서 널 찾으면 반려가 아파 못 간다 하거라. 호통치고 내쫓아. 그리고 나와 놀자. 어때?”
백매는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청난이 “어때?”라며 재차 묻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아요. 그렇게 할게요.”
“좋아. 정말 좋아.”
◈
다음 날, 청난은 해가 무르익은 후에야 눈을 떴다. 거친 잠버릇에도 불구하고 침상은 보기 좋게 정리되어 있었다. 만약 허리 아래가 저릿한 게 아니었다면 지난밤 일을 꿈이라 착각했을지도 몰랐다. 청난이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니 곧 백매가 휘장을 젖히고 침상에 걸터앉았다.
“청난, 배가 고프시지는 않나요?”
“지금 시간이 어느 정도 되었어?”
“미시 일다경 정도 되었네요.”
“이런, 늦잠을 자 버렸구나.”
청난은 침상 머리를 짚으며 일어나려고 하였다. 하지만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관통하는 저릿한 통증에 그만 “윽.” 짧은 신음을 내뱉으며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백매가 다급히 청난을 부축해 주었다.
“무리하지 마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가까스로 침상 머리에 기대어 앉은 청난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기 어려웠다. 지난밤에는 이토록 부끄럽지 않았는데 그 일로 인해 간호를 받는 건 어찌 이리도 부끄러운 걸까.
백매가 죽 그릇을 저으며 들고 오자 청난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와 마주 보았다.
“청난……. 많이 힘드신가요? 제가 잘 조절했어야 했는데…….”
“아, 아니다 아니야. 괜찮아.”
백매의 눈썹 끝이 축 처지자 청난은 다급하게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그를 달래 주었다. 이로써 청난은 세상 모든 것은 이겨도 제 연인의 여린 표정만큼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청난은 제 손 위에 붉은 흔적이 여럿 생겼음을 발견했다. 동시에 백매의 시무룩한 낯 또한 볼 수 있었다. 그에 청난은 호탕하게 하하하 웃으며 백매를 살포시 끌어안았다.
“마치 매화가 핀 것 같지 않느냐? 정말 좋구나.”
“당신이 좋다면, 저도 좋아요.”
그날 청난은 방 밖으로 한 걸음도 나서지 않았다. 해가 저물기 전 잠시 들렀던 진영이 얇은 장지문 바깥으로 새어 나온 미묘한 기류를 느끼고는 곧장 물러났을 뿐만 아니라,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병세를 핑계로 되돌려 보낸 덕분이었다.
“사존께선 주무세요. 아무리 장로님들이라도 안 돼요!”
“수야각의 기둥께서 편찮으시다는데 어찌 내가 가만히 있겠는가. 이보게, 이 약재면 금방 일어나실 걸세.”
“안 된다니까요……! 아! 거기 들어가지 마세요!”
진영이 나무를 타고 넘어가려던 호법장로의 옷자락을 잡으며 소리를 내질렀다.
“사형에게 다 이를 겁니다아아아!”
외전 2. 혼자가 아니다
백매가 수야각에 입문한 지 오 년이 되었다.
청난은 오래간만에 서고를 정리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그 안에 틀어박혔다. 서고는 책을 보관하는 장소인 만큼 날씨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어 청난은 지금이 몇 시쯤인지 짐작되지 않았다.
‘점심은 아직인가.’
그는 식사를 할 필요가 없었지만 백매가 입문한 이후에는 함께 식사를 해 왔다. 청난이 그를 데리러 가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점점 다가오는 급박한 뜀박질과 거친 호흡 소리가 들렸다.
“사, 사존!”
“백매 왔느냐. 마침 데리러 가려 했다. 무얼 그리 서두르는 것이야? 맛있는 찬이라도 나왔느냐?”
청난이 돌아본 곳에는 막 들어온 백매가 서 있었다.
‘이래서 자식은 기쁨이라고 하는 건가 봐.’
요즘 청난은 그를 보고 있으면 어떤 감정이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 아마도 뿌듯함이겠지.
처음 만났을 때의 백매는 청난의 허리에나 겨우 닿았는데, 지금은 청난이 허리를 숙이지 않아도 눈을 마주칠 수 있을 정도로 부쩍 자랐다.
또한 어깨가 넓게 벌어지고, 근육이 붙으며 전체적인 몸 선이 두꺼워졌다. 과거의 백매는 어여쁘다는 수식어가 어울렸다면, 지금은 듬직하다, 굳세다, 찬란하다와 같은 수식어가 어울렸다.
그에 비해 청난은 크게 달라진 바가 없었다. 굳이 변화를 찾는다면 머리카락이 보다 길어진 정도일까.
“사존, 제자를 들이신다는 게 정말이신가요?”
“그것 때문에 뛰어온 것이더냐? 그렇단다. 각주께서는 내가 다섯 이상의 제자를 두기 원하시더구나. 이젠 너도 자랐으니 내 의무를 행할 때가 된 게지.”
백매는 당차게 들어온 것과 달리 어떤 대꾸도 할 수 없었다. 확실히 청난은 명성에 비해 휘하의 제자가 적었다. 더구나 그가 차기 수야각주란 것을 생각한다면 의아할 지경이었다.
그러니 머리로는 이해하나, 감정은 그에 따라가지 않았다.
오 년 전 한 공자를 구한 이후 그에게 남다른 감정을 갖게 된 백매는 청난의 애정을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다. 그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잠시도 쉬지 않고 수련했으며, 자신이 사형제와 오순도순하게 지내는 광경을 보고 싶어 하는 그를 위해 내향적인 성격임에도 다른 이들과 어울려 지내 왔다.
그리고 확실히 청난은 백매를 특별하게 대우해 주었다.
‘하지만 그건 내가 하나뿐인 제자이기 때문이야. 다른 제자가 생기면, 사존께선 그들에게도 애정을 베푸시겠지. 그러다 마음이 가는 이라도 생긴다면?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백매의 손끝이 싸늘해졌다. 백매의 표정이 점차 심각해지자 청난은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그에게 바짝 다가왔다. 그들 사이에는 한 뼘의 거리도 남지 않았다.
청난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으나, 오 년이 지나도록 백매는 적응하지 못하였다. 이번에도 그의 갈 곳 잃은 눈동자는 바닥을 굴렀다.
“아가, 어디 아프더냐? 낯빛이 창백하구나.”
“아, 아닙니다. 아니에요. 제자는 평소와 다를 바 없어요.”
청난이 거북이처럼 고개를 쭉 뻗어 백매의 바로 앞까지 다가오자, 백매는 고개까지 돌리고 말았다.
“스승이 네게 먼저 말하지 않아 속상한 게야? 그러지 말아 다오. 나도 오늘에야 들었어. 이 스승을 한 번만 봐주거라. 응?”
여전히 백매의 고개가 돌아올 생각을 않자, 청난은 결국 양손으로 그의 볼을 감싸 잡아 자신을 보게 하며 벌게진 얼굴을 마주하였다.
청난의 입 끝엔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고, 살짝 올라간 눈썹 앞머리는 미안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백매는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 같았다.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그에게 들키면 어떡하지. 백매는 자신의 심장을 움켜쥐어 강제로 멈추게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이들을 보러 갈 때 너도 함께 가자꾸나. 네 사제와 사매가 될 아이들이니 말이야.”
백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을 어찌 거부할 수 있겠는가.
청난의 손이 백매의 머리 꼭대기에 닿았다. 다정한 쓰다듬음에 백매는 편안해졌고, 동시에 착잡함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