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1-7화 (140/146)

#7

‘아……. 무슨 생각을 했던 건지.’

청난은 스스로가 너무나 부끄러웠다. 백매가 독심술을 쓰지 못한다는 것이 굉장히 다행이었다.

백매는 몸을 뒤척이더니 청난의 허리 위에 살포시 양손을 올렸다. 어린애 같은 모습에 청난은 빙그레 웃었다. 아무래도 그의 미소에는 부끄러움 따윈 날려 버리는 술법이 걸려 있는 듯했다.

“오늘따라 어리광이구나.”

“싫으신가요?”

“그럴 리가. 오히려 기껍단다.”

청난은 백매의 머리카락을 들어 가볍게 입 맞추고는 결을 따라 쓰다듬었다.

“오늘 무슨 일 있었느냐?”

“아니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네 목소리는 아니라고 하는데?”

“그건…….”

“원치 않다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단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기분이 훨씬 나아질 거야.”

“……네, 잘 자요 청난.”

청난은 자장가를 부르듯 그의 등을 가볍게 토닥여 주었다.

“그래그래, 언제나 내가 네 곁에 있단다.”

늦은 밤, 불규칙한 두드림, 청난의 향기. 그의 온기. 그의 옅은 목소리와 그 자체. 이 모든 것은 신선 화백매가 오랜만에 깊은 수면을 취하게 만들었다.

백매는 자신의 꿈 속에서 눈을 떴다. 이것이 꿈임을 아는 건 그가 신선인 덕분이요, 또 숱하게 꿔 온 덕분이기도 했다.

그는 허공 위에 서 있었다. 그 아래에 있는 건 청난이 사는 아랑 마을. 한때 머물렀던 큰집 덕분에 쉬이 알아볼 수 있었다. 백매의 발이 천천히 하강했다. 지면에 다가갈수록 그 안의 삶들이 더욱 자세하게 보였고, 바삐 돌아다니는 사람들 사이에는 청난 또한 있었다.

“청난…….”

감정 없이 내려앉아 있던 백매의 입꼬리는 그를 보는 순간 슬며시 올라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청난은 마을 주민들에게 이런저런 조언들을 해 주고 있었고, 그들에게 다양한 선물을 받으며 퍽 즐거운 때를 보내고 있었다. 백매는 고개를 기울이며 그를 마냥 바라보았다. 그의 기쁨을, 그의 즐거움을. 그의 모든 것을. 그리고 백매가 손을 뻗으려고 할 때, 그들은 한순간에 백매에게서 멀어졌다.

“청난?”

그가 멀어지자 백매는 조금 더 하강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그를 감싸 안은 날개옷이 허공에 박힌 바위처럼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으니, 백매는 그 속에 갇혀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청난! 잠시만요! 가지 말아요, 청난!”

백매는 크게 부르짖었지만, 청난은 조금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대답은커녕 미동조차 없었다. 이내 그가 백매의 시야에서 사라졌고, 순식간에 모든 것이 어둠에 잠식되었다.

“허억! 허억!”

이번엔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의 소리인가.

나뭇잎이 나부끼고, 나뭇가지가 꺾였다. 밤은 어두워 스산했지만, 달빛은 밝았다. 풍경이 하나씩 생겨나고 마침내 모든 조각이 맞춰졌을 때, 백매는 그 숨소리의 주인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제 손에서 싸늘하게 식어 가는 체온이 누구의 것인지도.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건만, 백매의 두 눈동자는 이번에도 같은 모습을 비추었다.

“사, 사존! 이게 무슨… 누구 짓이죠? 아니, 제가 치료를……!”

같은 말, 같은 장면. 그리고 똑같은 마지막.

청난은 입을 벌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체온은 순식간에 식어 버렸다. 처음부터 이곳에 온기 따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청난의 몸이 바스라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눈 깜짝할 새에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매몰찬 바람이 그의 흔적을 티끌까지 훔쳐 달아날 동안, 백매는 자신의 빈손을 하염없이 바라만 보았다.

구름이 달을 가린 탓에 신당 안 침실에는 빛 한 점 들어오지 못했다. 오직 새근거리는 젊은이의 숨소리만이 이 고요한 공간 안을 채울 때, 그의 곁에서 죽은 듯 감겨 있던 눈이 숨겨 두었던 금빛 안광을 꺼냈다.

막 잠에서 깬 백매의 두 눈동자는 인간의 것이라 보기 어려운 이질감이 있었다. 그에겐 숨소리는커녕 한 줌의 숨도 없었으며, 상체를 번뜩 세우는 몸짓은 아무런 소음도 일으키지 않았다. 그 모습은 흡사 귀나 신 같았으며, 또는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보이기도 했다.

획- 고개를 돌리자 그의 곁에는 한 청년이 잠들어 있었다.

‘누구?’

침입자인가.

‘아니, 아니야.’

아니었다. 그는 백매가 그토록 찾고 헤매었던 사존, 청난이었다.

아직 악몽 속에서 채 헤어 나오지 못한 백매의 머릿속은 갖가지 것들로 엉망이었다.

‘진짜야, 진짜 사존이셔. 청난, 청난이 돌아와 주셨어.’

그를 끌어안고자 올라갔던 손은 감히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고, 그저 허공에서 바들바들 떨어 댔다.

“……청난.”

백매는 혹여라도 그가 깨지 않도록 작디작은 목소리로 황홀한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그럼에도 소리가 컸던 것일까, 청난이 어깨를 뒤척이더니 곧 가냘픈 눈꺼풀이 벌어지며 푸른 파도빛 옥구슬이 드러났다.

“으음… 언제 일어났느냐.”

“…….”

그의 목소리는 더없이 평온하였다. 아무 일도 없던 것 같았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게 해 줄 것 같았다. 그렇기에 메말라 버렸던 신선의 눈망울이 촉촉하게 젖어 갔다.

“아, 아가? 왜 우느냐. 어찌 그래. 무슨 안 좋은 꿈이라도 꿨어?”

청난이 깜짝 놀라며 허겁지겁 일어나 앉았다. 어느새 거칠어진 청난의 손바닥이 백매의 양 볼을 감싸 쥔 채, 좌우로 돌리며 그의 표정 하나하나를 면밀히 살펴보았다.

저에게 이토록 집중한 청난의 모습에 백매는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그가 제 곁에 있어 기쁘다. 그것이면 되었는데, 어찌하여 그의 시선이 오롯이 저만을 향하길 바라게 된 것일까. 어찌 그에게 소유욕을 느끼며, 어찌 세상천지에 질투를 할 수 있는 것일까.

백매선은 스스로가 너무나 추하고 추하게 느껴져 얼굴을 차마 들 수 없었다.

그러한 속사정을 알 수 없는 청난은 자신의 반려를 달래기 위해 안아도 보았고, 등을 토닥여도 보았다. 그럼에도 백매는 신상처럼 변함이 없었다.

“어찌 그러느냐. 이러다 내 속이 타들어 가겠다. 자, 손을 잡아 줄 터이니 말해 보거라. 어떤 꿈을 꾸었어? 무엇이 널 이리 괴롭힌 것이야?”

“……청난.”

“그래, 내가 여기 있다.”

“꿈을, 꿈을 꾸었습니다.”

“그래, 그래. 어떤 꿈을 꾸었어?”

“그것이…….”

청난이 백매의 손등을 두드리며 재차 달랬다. 제가 어찌 그의 말을 거부할 수 있을까. 결국 백매는 한 마디, 한 마디씩 제 입으로 슬픔을 토로했다.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청난은 혼란스러웠다. 다양한 감정들이 마구잡이로 머릿속을 가득 메꾸었다. 하지만 이 모든 감정들이 과거의 한임을 알고 있었다. 과거에 붙잡혀 있기엔 이 삶이 아깝지 아니한가. 그렇기에 청난은 갖은 감정들을 한곳에 구겨 넣었다.

청난이 살포시 웃었다. 언제나 같은 온화하며, 또 듬직한 미소였다.

“나쁜 꿈을 꾸었구나. 그래서 내가 사라질 것 같았더냐?”

백매는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청난은 솔직한 제 아이의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빗어 주며 말했다.

“아니야.”

청난이 백매의 머리카락을 살짝 잡아 들더니 자신의 입술 앞에 가볍게 맞대었다. 백매의 두 눈이 크게 벌어졌다. 백매가 만류하기 위해 두 손을 들어 올렸지만, 청난의 입이 더욱 빨랐다.

“안 그래.”

짧은 말을 뱉은 청난은 이번에는 백매의 손을 잡아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지 않을 거야.”

또 한마디. 그리고는 백매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백매는 거듭되는 청난의 입맞춤에 따라가지 못해 그대로 얼어 버리고 말았다. 상대가 아무런 호응이 없음에도 청난은 멈추지 않았다.

“난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거다.”

청난은 백매를 응시했다. 청난의 고개는 백매를 향해 기울어지고, 두 눈꺼풀은 푸른 안광을 완전히 덮었다. 이런 상황에서 백매가 그의 행동을 예측 못 할 수 있을까.

이윽고 두 코끝이 스치고, 입술이 서로 맞닿았다.

일반적인 연인들의 접문처럼 숨이 섞이며 허덕일 필요는 없었다. 백매에겐 숨이 없었으니. 대신 신선의 법력이 숨을 대신하여 입술 너머로 전해졌다.

입술은 점점 더 깊게 맞물려 갔고, 그럴수록 백매는 메마른 숨을 갈구하듯 청난의 입 안을 탐닉해 갔다. 배움이 빠른 아이는 입 안이라는 작은 영역을 탐색하는 것도 매우 빨랐으니, 눈 깜짝할 사이에 청난의 입 안 곳곳에 그의 흔적이 녹아들었다.

청난은 그의 속도를 따라가기 버거웠다. 대체 숨은 언제 쉬는 것일까. 아쉽게도 제 상대는 숨을 쉬지 않으니 그를 참고할 수는 없었다. 결국 청난은 이번에도 저 홀로 깨달아 가며 그와 깊은 즐거움을 나누었다.

삶은 배움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던가. 설마 이런 순간에도 무언가를 배울 줄은 몰랐다. 물론 남에게 전수하기엔 몹시 부끄러운 배움이었다.

민망한 소리가 빈 공간을 가득 메울 즈음이 되어서야 백매는 비로소 진정될 수 있었다. 청난이 입술을 떼어 내자 다행스럽게도 백매는 순순히 그를 놓아주었다.

이제는 그의 숨을 막는 것이 없음에도 어째서 숨은 계속 가쁜 걸까. 청난은 거울을 보지 않았음에도 제 모습이 상기되었단 것을 알 수 있었다.

청난이 부끄러움에 고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백매의 손이 더 빨랐다. 백매가 청난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방금 전까지 희락에 젖었던 화려한 눈망울이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가지, 가지 마세요.”

“아가, 내가 어딜 가겠어.”

“청난. 저는, 저는 두려워요. 산도 들도 그 모든 것이 두렵지 않건만, 당신에 대한 건 모든 게 두렵습니다. 저도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분명 당신을 믿고 있는데, 그런데 왜…….”

청난이 백매를 사뿐히 껴안으며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청난은 그의 감정을 이해했다. 자신 또한 그러하니.

인간인 자신이 신선인 그의 매 순간이 걱정된다니. 우습지 아니한가. 괴이하지 아니한가. 분명 십중지일은 그리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와의 모든 순간이 설레면서 또 걱정스러운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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