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정말 피곤했던 모양인지 유독 아양을 부리는 제 반려의 모습이 청난은 퍽 반가웠고, 동시에 난감하기도 했다.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미인이구나.’
짙은 눈매는 한 필의 붓글씨 같고, 오뚝한 코는 바위를 깎아 만든 듯 뚜렷했다. 그리고 그런 이목구비에서 특히나 눈길이 가는 곳이 있다면 당연히 입술이었다.
청난은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내가 이리도 파렴치한 사람이었다니! 청난은 애써 시선을 돌리려 했지만, 제 어미를 찾는 병아리처럼 고개가 자꾸만 돌아가며 제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청난의 시선이 갈피를 잡지 못하자 백매가 의아함에 고개를 기우뚱거렸다.
“청난? 무슨 걱정 있나요?”
있지.
하지만 내가 어찌 네게 말하겠어…….
청난은 차마 할 수 없는 말을 속으로 삼킨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 아니 없어. 다만…….”
“무슨 일이신가요. 제게 말해 주세요.”
“으음……. 그것이, 내가… 내가…….”
아까는 약한 척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건만, 막상 하려니 쉬이 나오지 않았다. 청난은 큼큼 헛기침을 내뱉고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허리가 아픈데 누워서도 널 볼 수 있으면 좋겠구나. 오늘은 같이 자는 건 어떻느냐?”
“아, 그런 거라면 제가 몸을 더 낮추어 앉겠습니다. 저는 잘 필요가 없는 데다가, 제가 함께 잔다면 청난이 불편하실 거예요.”
“내가 왜 불편하겠어?”
널 안고 잘 건데.
청난은 이번에도 말하지 못할 말을 삼키고 다른 말을 꺼냈다.
“으음……. 네 몸은 따뜻하지 않느냐. 조금 추운 것 같아서…….”
“얼마 전이 춘분이었기에 아직 밤공기가 찬가 봅니다. 그럼 제가 따뜻하게 공간을 데워…….”
“아, 아니! 아니야, 아니다. 나는 그냥……. 그냥 너만 있으면 돼.”
“청난…….”
“매아…….”
두 사람은 매우 가까이 붙어 있었는데, 청난의 미묘한 말까지 더해지자 마치 고혹적인 향초를 피운 듯 야릇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들은 더욱 더 가까워졌고, 두 입술 사이의 거리는 손가락 두 마디도 채 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청난의 눈꺼풀이 샤르륵 내려앉으려고 할 때, 돌연 백매가 고개를 뒤로 빼더니 휙 하니 시선을 돌려 버렸다.
“매아?”
“제가 데워 드리겠습니다. 이만 쉬시지 않으면 몸이 상하실 거예요.”
백매는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이 다급하게 청난의 침구를 정리해 주었다.
이렇게 대놓고 거부하니 어찌 청난이 버틸 수 있겠는가. 청난은 가릴 수 없는 아쉬움을 드러내며 조용히 그가 원하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완전히 누운 청난을 두고, 백매는 방을 지키지도 않았다. 근처를 순방하겠다는 핑계를 대며 나가 버리기까지 한 것이다. 청난은 도무지 그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으며, 서글프기도 하였다. 청난은 머리 위까지 이불을 덮어 버리고 불편한 밤을 보냈다.
다음 날, 청난이 평소처럼 해류진군 신상 앞에 찾아가니, 그 앞에는 익숙한 이들이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대인, 어찌 되셨습니까?”
“어땠어? 이번에는 성공했어?”
지난밤을 조언해 주었던 세 어르신과 녕녕이 청난을 기다리고 있었다. 청난은 가까스로 입꼬리를 올렸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명확하게 드러난 실망감에 네 사람은 듣지 않아도 결과를 알 수 있었다.
녕녕이 청난의 어깨를 토닥이며 달래었다.
“너무 실망하지 마. 다른 방법을 써 보자.”
“맞습니다. 아직 방법은 많아요.”
어르신들도 하나둘 말을 보탰다. 그들은 다시금 머리를 모아 이런저런 방안들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자신과 백매의 진도를 위해 이토록 진지하게 임하는 모습을 보니, 청난은 민망하였다. 하지만 이미 주사위가 굴러갔으니 어쩔 도리가 있는가. 청난은 다시금 회의에 집중하며 이번에야 말로 기필코 성공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다음 날, 신상 앞으로 걸어 들어오는 청난의 발걸음은 터덜터덜 힘이 없었다. 언제나 청난의 자리였던 그곳에는 이미 녕녕과 세 장로들이 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수야각 제자들까지 모여 있었다.
‘아니, 저들은 왜…….’
왜 점점 규모가 커져 가는 거지?
하아, 청난은 한숨을 삼켰다. 이유가 짐작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아마도 자신의 호감을 사기 위해 장로들이 데려온 것이겠지. 그들은 청난의 고민을 단순히 개랑 친해지고 싶은 것이라고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설마 자신들이 한 부부의 잠자리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라고 어찌 생각할 수 있을까.
청난이 다가오는 걸 본 이들은 이번에도 그의 표정으로 결과를 읽어 냈다. 그들은 인사 대신 위로나 응원을 건네었고, 의욕 넘치는 어린 제자들은 밤새 조사해 온 갖가지 방법들을 늘어놓기도 하였다. 그렇게 오늘도 앞뒷면이 다른 ‘작전 회의’가 이어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백매였다.
백매는 오늘 아침 청난의 모습이 신경 쓰였다. 그는 별일 없는 척 미소 지었으나, 그 속에 담긴 고민을 백매가 어찌 못 알아볼까. 하여 그의 고민을 덜어 주고자 달콤한 찻잎을 챙겨 그에게 가려던 차였다. 그런데 우연히 본 청난은 아침의 기운 없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웃고, 한숨 쉬고, 찝찝해하며, 심지어 꽃을 든 여인 앞에서는 어쩔 줄 몰라 하기도 하는, 평범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런 분이셨지. 청난은.’
지금까지 단둘이 지내 왔기에 잠시 잊고 있었다. 그의 곁은 언제나 사람들로 가득 찼다는 것을.
심지어 이제는 선계에도 그의 이름이 알려져, 그가 선계를 밟는다면 많은 신선들이 그에게 몰릴 테지. 언제나처럼.
그가 여러 사람과 교류함으로써 즐겁다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이 땅을 밟고 사는 이들은 위험한 인물들도 아니니 걱정할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왜 이리 불편한 걸까.’
제 속에 마가 스며든 것처럼 거북했다. 당장에 제 몸에 손을 넣어 이 불편함을 끄집어내고 싶었다. 어찌 이런 감정이 드는 것일까.
‘질투?’
하지만 한연화에게 느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차라리 한연화라면 마음껏 미워할 수도 있었을 텐데…….’
원인을 찾지 못한 감정에 백매는 결국 발길을 돌려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청난은 끝까지 백매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 북적북적 모였음에도 청난은 뾰족한 수를 얻지 못한 채 밤을 맞이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지. 애당초 부부 사이의 애정 행각을 단순한 친교, 그것도 동물과의 친교로 비유해서 방법을 찾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청난이 노천탕에 몸을 푹 담근 후에야 방으로 돌아오니, 어느새 백매가 돌아와 있었다.
“언제 왔어?”
“방금 왔어요.”
저 짧은 다섯 글자가 어찌나 다정하게 들리는지, 청난은 저도 모르게 푸흐 미소 지었다.
뚝뚝. 청난의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백매는 어느새 꺼내 든 넓은 천으로 청난의 머리를 감싸더니 그대로 끌어안았다.
“이러면 너까지 젖는데?”
“제가 따뜻하다 하셨잖아요. 이러면 더 빨리 마를지도 몰라요.”
“하하하, 좋아. 좋아. 그럼 더 붙어야겠구나.”
청난은 물을 가르듯 그의 품으로 더욱 깊게 파고들었다. 백매의 술법 덕분인지 머리카락도 착실히 물기를 뱉어 내었고, 바닥에 고인 물방울은 순식간에 바닥에 스며들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렇게 그와 마주 안고 있으니 청난은 최근 했던 고민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다른 연인들과 다르면 어떠랴, 제 욕구를 채우지 못하면 어떠랴. 그저 그가 제 옆에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모든 부족함이 채워지는 것 같았다.
조금 아쉬운 게 있다면 그가 바쁘단 것. 그리고 제게 남은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조급했던 걸까. 하지만 괜찮아.’
너를 다시 만난 것으로 이 생의 행운을 다 썼을 테니, 더 이상 욕심부려 천벌을 받지 않겠노라.
청난이 홀로 그런 생각으로 자신을 달래고 있을 때, 백매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청난, 저……. 저 부탁이 있어요.”
“음? 말해 보렴.”
청난이 그에게 파묻힌 채 얼굴을 들어 그를 마주 보았다.
백매는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고, 입술은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하더니 이내 조심스러운 소리를 뱉어 냈다.
“저… 오늘 같이 자도 될, 까요……?”
왔다!
잊고 포기하려하니 이제야 원하던 순간이 온 것이다.
사제는 닮는다고 하던가. 이런 고민을 한 것이 저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청난은 기쁘게 호응했다.
“물론이지! 내 이불이 내 것이더냐. 네 것이기도 하지. 굳이 허락받을 필요가 없다!”
청난은 당장에 안고 있던 팔을 풀고 백매의 손을 잡아 침상으로 끌어당겼다.
“벌써 주무시려고요?”
“응, 몸이 따뜻할 때가 안을 때도 좋지 않겠어?”
“……맞아요. 그렇죠.”
백매는 잠시 침묵하는가 싶더니 곧 대답을 이었다. 청난은 그 침묵 동안 그가 무엇을 떠올렸는지 알지 못한 채 침상 위에 몸을 실었다. 다 마른 머리카락을 다소곳하게 정리하며 백매가 누울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청난의 시선은 천장을 향했지만, 백매가 자신의 옆에 누웠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이윽고 백매의 큰 손이 청난의 가슴팍을 지나더니, 넓고 부드러운 것이 청난의 가슴을 눌렀다. 그것은 부드럽고 또 나풀거렸다.
이불이었다.
백매는 평소처럼 청난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는 그 옆에 가지런히 누웠다.
정말, 정말 같이 자기만 할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