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오, 지원군이 왔구나.”
“일은 저희가 끝냈는데 말이에요.”
땅이 무너지며 넓게 펼쳐진 하늘에서는 이제껏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신선들이 하나둘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 명 한 명이 대군과 같은 존재감을 뽐내었지만 그들이 둘러싸는 것이 막강한 적이 아닌 봉인된 봉진이었기에 다소 우습게 보였다.
백매는 그것이 꽤 불만인 모양이었다. 하기야 지금껏 고생하며 생사를 넘나들었는데 이제야 나타난 이들이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청난은 백매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었다.
“되었다, 되었어. 그래도 뒤처리를 맡길 수 있어 좋지 않으냐. 너도 피곤하지 않아?”
“청난은 피곤한가요?”
청난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난이 양손을 뻗어 백매의 목을 안자 백매가 그의 무릎 뒤를 안아 올렸다. 백매는 청난이 불편하지 않게 천천히 움직이며 절벽과 계곡을 벗어나 숲 사이로 들어갔다.
“동료들에게 인사 안 해도 돼?”
“동료 아니니까 괜찮아요.”
“들으면 서운해하지 않겠느냐.”
“삼백 년이면 제게 익숙해져야죠.”
백매는 더 이상 청난에게 보이기 위해 억지로 사교하지 않았다.
‘좋은 변화지. 좋은 변화야.’
사람과 관계를 하며 안정감을 느끼는 청난이 그런 면모를 이해하기란 어려웠다. 하지만 백매는 그가 아니었으니 이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난 좀 자야겠다. 내려 줘.”
“주무세요. 흔들리지 않게 할 수 있어요.”
“싫어. 너랑 같이 자련다. 싫어?”
“…….”
백매의 발걸음이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청난이 시선을 들었지만 백매의 고개가 먼 곳으로 돌아가 있어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청난은 그제야 자신의 말이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청난은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손만 잡고 말이야. 네가 어릴 때처럼.”
“아, 네. 좋아요.”
백매는 주변을 살펴보다가 나무 두 그루가 서로 얽혀 있는 것을 보았다. 두 나무는 종이 서로 달라 보였지만 오래도록 같은 자리에 있던 덕인지 꽤나 잘 어울렸고, 무엇보다 두 그루 모두 기둥이 굵고 가지를 넓게 뻗은 덕에 아래로 넓게 그늘이 펼쳐져 있었다. 저곳이라면 막 떠오른 햇빛을 피해 선잠을 자기 좋을 터였다.
백매가 청난을 기대어 앉혀 주었다. 청난은 어느새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백매는 조심히 그의 옆에 앉았다. 청난의 고개를 어깨에 기대어 주고는 마냥 그를 바라보았다.
신선은 수면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청난이 잠들었을 때 백매는 그의 모습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의 모습을 하나하나 눈에 아로새길 수 있었다.
“…….”
백매가 청난의 손을 잡았다. 만약 이 탓에 그가 잠에서 깨어난다고 해도 손 주인을 확인하고는 다시 잠들 터였다. 이윽고 백매의 속눈썹이 서로 맞물렸다.
이른 아침부터 부산한 부지런한 새들의 푸드덕거리는 날갯짓도 그들을 깨우지 못했다.
청난이 다시 눈떴을 때 그의 옆자리는 비어 있지 않았다.
“좋은 아침이야.”
“좋은 아침이에요, 청난.”
백매는 청난보다 먼저 일어나 있었다. 얼마 잔 것 같지도 않은데 청난의 옷은 물기 하나 없이 바짝 말라 있었다. 청난이 나무 기둥에서 등을 떼고는 팔을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흐아암. 흠… 지금쯤 뒷정리가 되었을까?”
“아닐걸요. 신선들이 그래 보여도 나름 일 처리는 꼼꼼하긴 하지만 시간이 얼마 안 지났으니 벌써 끝내진 못했을 거예요. 가 보시겠어요?”
“좋아. 수야각에 있던 사람들도 걱정이 되는구나.”
백매가 먼저 일어나 청난을 부축해 주었다. 청난은 푹 잔 덕분인지 한결 개운해졌다. 한연화와 싸우면서 입은 자잘한 찰과상들은 어느새 아물어 있었다. 신선이 여럿 내려와 이 산 전체가 영기로 가득 찬 덕분일 것이다.
백매가 자연스러운 손길로 청난의 매무새를 정리해 주었다. 비녀나 끈이 없는 탓에 청난의 머리카락을 두껍게 땋고는 얇은 꽃줄기를 따다 끝을 가볍게 고정시켜 주었다. 옷에 묻은 흙은 털었지만 피는 닦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백매의 손길이 지나자 처참했던 몰골은 소박한 수선자로 탈바꿈되었다.
청난은 조금 불만스러웠다.
“매아야.”
“네.”
“나 스승 관두지 않았느냐?”
“그랬죠.”
“그런데 넌 왜 아직도 제자인 거야?”
백매가 그의 허리끈을 매듭지으며 푸흐흐 웃었다.
“아니에요. 저도 제자 그만두었습니다. 저는 제 연인을 돌보고 있는 것인걸요.”
“말재주가 좋아졌구나.”
“제게 그렇게 말하는 건 청난뿐인걸요. 제 말재주가 듣기 좋으셨다면 그건 제 재주가 좋은 게 아니라…….”
“‘아니라’?”
“청난이… 절…….”
“그래, 그래. 내가 널 좋아하기 때문이지. 이 말을 하려던 거 맞지?”
“으음… 음… 네……. 네, 맞아요.”
백매는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모자라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청난은 그의 손과 가슴 사이로 끼어들어 가 그의 손등을 쥐었다.
“왜 그 고운 얼굴을 숨겨?”
“아, 안 돼요. 하지 말아 주세요.”
백매는 차마 청난을 밀쳐 내지 못하고 끙끙대었다. 청난은 그를 놀리고 싶을 뿐이었는데, 어째서 자신이 그를 희롱하는 것 같아진 거지? 청난은 애써 하하 웃으며 그의 품 안에서 빠져나왔다.
“장난이다 장난.”
백매는 그제야 손을 풀었다. 그럼에도 벌게진 낯을 미처 수습 못 해 여전히 귀 끝이 붉었다.
청난이 그에게 손을 내밀자 그의 손이 올라왔다. 백매가 청난의 옆으로 와 같은 발걸음으로 천천히 걸었다.
“수야각이 이쪽이었지?”
“네, 맞아요.”
“어디 무너진 곳은 없었으면 좋겠구나.”
“안 무너트렸어요. 제가 청난에게 주기로 한 곳이잖아요.”
한연화와 결전을 벌였던 장소가 수야각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기에 그들은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과연 백매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가 일으킨 산사태는 온 산이 영향을 받을 만한 것이었음에도 수야각의 건축물들은 아무 일도 없던 듯이 멀쩡하였다. 간간이 부서진 곳들이 있긴 하였지만, 그것들은 괴뢰와 싸웠을 때 청난이 부순 것들이었다.
괴뢰였던 사람들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거나, 조경물을 붙잡고 속을 게워 내고 있었다. 아직 깨어나지 않은 이들이 모두 살아 있다 할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한연화에게 당한 이들이 회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청난은 안도했다.
이곳에 있는 것은 사람들뿐은 아니었다. 그들을 감시하는 것처럼 호랑이만 한 짐승이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하지만 청난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막 깨어난 이들은 그들의 사나운 발톱과 이빨을 보고 또다시 혼절하거나 잔뜩 겁을 집어먹어 도망갈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다행히 그들은 영기가 상해 있는 탓에 섣불리 공격하지 않았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 짐승들은 모두 영물인 해태였다. 그리고 중앙에서 손짓으로 해태들을 지휘하고 있는 신선이 있었다. 바로 사헌 선자였다. 쓰러졌던 이들마저도 쉬이 그를 발견하였다.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느낄 수 있는 거룩한 신성. 이들은 모두가 수선을 하는 이들이었으니 더더욱 몰라볼 수 없었다.
“신선이시여……!”
그들은 자의로 고개를 조아렸다.
사헌 선자는 그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대신 다가오는 백매와 청난을 향해 가볍게 묵례하고는 다시 자신의 일을 하였다.
이 위대해 보이는 신선이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자 수선자들은 고개를 들어도 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제 발로 수야각에 왔던 것까지는 선명하게 기억했지만 그 후는 몹시 모호해서 꿈을 꾼 것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분간하지 못했다. 그렇게 어쩔 줄 모르고 있었을 때 신선이 강림했으니 분명 그가 자신들을 돌보기 위해 내려온 것이라 생각했다. 한데 이렇게 찬밥 신세라니.
그들은 고개를 들어 서로를 바라보며 눈치를 살폈다. 그러던 와중에 청난과 백매가 들어온 것이다. 그들은 백매 또한 신선임을 눈치채었다. 하지만 그의 곁에 바짝 붙어 있는 저 청년은 어떻게 보아도 자신들과 같은 인간이었다. 수선자들이 머리를 굴려 가며 그들의 관계를 짐작하고 있을 때 청난이 입을 열었다.
“선자께서 고생이 많으십니다.”
수선자들의 신경은 자연히 사헌 선자에게로 향했다. 그들은 사헌이 자신들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시했었으니, 이 청년의 말 또한 무시할 것이라 생각했다.
사헌은 청난을 바라보기만 하였기에 수선자들은 ‘역시’라고 생각했다. 그런 찰나에 사헌 선자가 가볍게 손을 마주 대며 간소하게 인사를 건네었다.
“제 일이니 당연합니다. 두 분께선 무탈하신지요.”
“예, 선자 덕분입니다. 빌려주신 법기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만, 돌려드리긴 어렵게 되었네요.”
“어차피 그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사헌은 잠시 입을 멈추더니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그에 대해서는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그는 불과 몇 걸음만 옮겼을 뿐 여전히 같은 공간 안에서 자신의 일을 하였다. 하지만 그가 대화를 끝냈으니 청난도 굳이 말을 잇지 않았다.
사헌 선자가 말한 ‘그’는 한연화이겠지. 사헌은 신선이라는 동류에 대한 애착이 큰 편이었다. 그러니 동년배의 신선들과 달리 여전히 다른 신선들과 교류하며 사는 것이겠지. 그리고 그는 연화문 출신이었다. 동문의 후배에게는 그 애정이 더욱 애틋했겠지.
청난은 그의 마음을 이해하였다. 하지만 그뿐. 위로의 말을 건네는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었다.
청난은 자신을 향한 수많은 시선들을 느꼈다. 그들은 신선과 아무렇지 않게 대화하는 이 청년이 몹시 궁금한 모양이었다. 청난이 예의상 가볍게 미소 지었다. 선잠을 잤다지만 여전히 피곤했으니 이곳은 사헌 선자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청난이 발걸음을 돌리려던 찰나에 가장 가까이에 있던 수선자가 사족 보행으로 그에게 다급히 다가왔다. 그 모습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고 비루하기만 하였기에 백매는 막아서는 대신 싸늘한 눈초리만을 던져 주었다.
눈빛만으로 위축이 된 수선자는 백매의 눈치를 보면서도 결국 입을 열었다.
“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청난에게 향한 질문이었다.
신선이 둘이나 있는데 왜 자신에게 질문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신선과 태연하게 지내는 양민이 더 희귀하기 때문인 걸까. 아니면 신선에겐 차마 물을 용기가 없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 이유까지야 청난은 알 바가 아니었다.
청난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또다시 태연한 미소를 지었다. 곧 벌어진 입에서 나온 그의 음성은 온화하였다.
“성은 진, 이름은 청난입니다.”
환생했더니, 옛 제자가 신선이 되어 찾아왔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