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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132화 (132/146)

#132

“뭐! 또 뭐!”

-어린 인간처럼 굴지 마라. 이 아이들이 네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은 모양이군.

샘 근처에 있던 동물들뿐만 아니라 선룡의 뒤에서, 나무 위에서, 땅굴 아래에서 영물들이 고개를 삐쭉 내밀었다. 백매는 그들이 무얼 하든 상관없었다. 애당초 그의 선행은 베풂에서 끝이 나는 것이었고, 더욱이 지금은 일 초가 다급할 때였으니.

-네 스승을 위해서라도 보는 게 나을 텐데.

선룡이 청난을 거론하자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듯했던 걸음이 멈추었다. 백매는 그가 청난을 인질로 협박한다고 생각해 살기를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하지만 선룡은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그의 영물들에게만 향했다. 이토록 무시를 당하니 자연히 시선이 돌아갔다. 그리고 영물들은 샘 위에서 춤추고 있었다.

나는 존재들은 곡선을 그리며 선회하였고, 땅 위의 존재들은 샘 주변을 빙글 돌았으며, 샘에 사는 이들은 가장 낮은 곳에서 헤엄쳤다. 이 둥근 웅덩이 안에서 반복하는 그들의 움직임은 일정한 법칙이 있어 보이기도 하고,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물에 사는 생물과 땅에 사는 생물 하늘에 사는 생물이 각자의 영역에서 움직였으나 간간이 서로 맞부딪치기도 하였다.

백매는 마치 이 광경이 명계, 인계, 선계를 축약해 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건 원.

아니, 구(球).

-인선이여, 깨달았느냐.

백매가 묵례하고는 금방 고개를 들었다. 깨달음을 준 것은 감사하나 하필이면 감사를 표하기엔 분노가 더욱 컸다. 백매가 빠르게 산을 내려갔다. 이번에는 선룡도 영물도 그 누구도 그를 막지 않았다.

한연화의 오른쪽 몸은 얼어붙으며 썩어 갔고, 왼쪽은 뜨겁게 타오르다 곪아 갔다. 청난이 거대한 술법을 쓴 건 아니었다. 하지만 섬세한 조절로 적재적소에 부작용을 뿌려 대었다. 이는 영기를 쓸 수 없는, 인간과 다를 바 없는 한연화의 몸에 큰 타격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청난에게 남은 법기는 단 하나.

“큭… 크……. 쿨럭!”

한연화가 피를 토했다. 그의 입술은 부들부들 떨렸고 목에는 핏대가 섰다. 마치 주화입마에 걸린 사람 같았다. 그의 몸 상태로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할 터. 하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회광반조였다. 당연하게도 청난은 그와 동귀어진을 할 생각이 없었다.

청난은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온 힘을 다해 그를 들이박을 뿐.

“커헉!”

청난을 피하지도, 막지도 못한 한연화가 바닥을 등지며 또다시 피를 토해 냈다. 그의 몸 위에 올라탄 청난이 촤악, 제 머리에 꽂힌 비녀를 뽑아내었다. 마지막 술법. 한연화는 양손과 양발이 못 박힌 듯 움직일 수 없었다.

그와 동시에 밤이 끝났다. 일출이었다. 산등성이 위에 고개를 내민 태양 빛이 세상에 퍼졌다. 하지만 청난의 넓게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한연화에게서 빛을 가렸다. 마치 무대의 막이 내려진 것처럼.

참으로 공교롭지. 한연화는 그렇게 생각했다.

‘마치 세상이 당신을 빛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네요.’

한연화가 말을 할 수 있었다면 분명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청난의 검이 한연화의 목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거죽도 채 뚫지 못하고 전에 멈추었다. 한연화가 파- 소리를 뱉었다. 피를 뱉으려던 것인지 헛웃음을 뱉은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는 고장 난 성대를 괴롭히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동정해?”

“아니.”

청난은 그를 죽이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다. 하지만 결코 정 때문은 아니었다. 그가 두려운 것은 신선을 살생한 대가였다.

그는 하늘이 선택한 존재였다. 자신이 그의 목숨을 취함으로써 천기가 어그러진다면 그 대가는 누가 받게 될 것인가.

과거의 청난이라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 한 몸 바쳐 의를 행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혼자가 아니었다.

청난이 죽으면 백매는 또다시 타인과 거리를 두고 아무것도 없는 빈 신전에서 홀로 지낼 것이다. 그 모습을 어찌 견딜 수 있을까. 그의 지난 삼백 년은 청난의 약점이 되었고, 스스로를 지키게 하는 주술이 되었다.

청난이 머릿속에서 과거의 문헌을 찾았다.

‘신이 살해된 적이 있었던가.’

‘아니면 적어도 예상치 못하게 죽은 적은?’

‘자연적인 소멸은 안 돼.’

‘있었어. 그런 기록을 읽은 적이 있었어.’

이윽고 청난이 답을 향해 갔을 때, 한연화의 손이 청난의 검 끝을 덥석 잡았다.

“……!”

청난은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했다. 한연화의 손은 중앙에서부터 새끼손가락 끝까지 찢어져 너덜너덜해졌다. 검을 잡은 것만으로도 놀라울 따름이었다.

“……미련한 놈.”

“키… 키킥… 컥… 컥.”

한연화가 실성한 듯 웃음을 흘렸다. 그 와중에도 검을 잡은 손은 굳건할 뿐 아니라 점점 밀어 내려 하고 있었다. 청난은 아직 옛 문헌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다음 구절이 어떠했었던가. 하지만 청난에겐 골똘히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한연화에겐 작은 틈도 허용해선 안 되었다.

청난은 어쩔 수 없이 검에 힘을 실었다. 부디 이 선택이 잘못되지 않길 바라며.

쿠구구구구구궁!

그 순간, 청난과 한연화를 지지하고 있던 땅이 무너졌다. 청난의 몸이 부유했다. 죽기 직전엔 세상이 느리게 보인다고 했던가. 과거에 죽었을 땐 그러지 않았기에 믿지 않았던 속설이었다. 하지만 청난은 그 잠깐의 순간이 길게 느껴졌다.

한연화는 주박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차라리 그러지 않는 게 나았을지도 몰랐다. 허공에 버려진 그의 몸은 땅이 무너지며 생긴 덩어리들의 폭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바로 위에 있던 청난의 운명 또한 마찬가지겠지.

이렇게 끝나면 안 되는데.

마지막 순간에 떠오른 것은 우습게도 그와 함께 닭꼬치를 먹었던 그날이었다.

그리고 간신히 버티던 청난의 정신이 점멸했다.

“청난? 괜찮아요, 청난?”

귓가를 울리는 또렷한 목소리는 참으로 감미로워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곧 시원한 바람이 온몸을 가득 채웠다. 청난은 그제야 지친 눈꺼풀을 일으켜 세웠다.

그의 앞에 있는 건 당연하게도 백매였다. 청난이 그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매아 왔구나.”

청난은 그제야 주변을 살폈다. 절반은 익숙한 풍경이었고, 절반은 그러지 않았다.

익숙한 건 방금까지 자신이 있던 곳이었고, 익숙하지 않은 건 아까는 있었지만 지금은 무너져 내린 곳이었다.

“내가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어?”

“아주 잠깐이었어요.”

“그렇구나.”

청난은 백매의 부축을 받으며 절벽 끝으로 다가갔다. 청난의 몸은 이미 한계에 도달했기에 거의 백매에게 안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청난은 이대로 그의 품에서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일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한연화의 마지막을 보는 것.

산이 무너져 내린 그곳에는 본래 있던 것 대신 다른 것이 자리 잡고 있었다. 허공에 뜬 거대한 구. 청난은 그런 것은 처음 보았지만 동시에 익숙했다.

“이건 봉진이더냐?”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역시 청난이에요.”

“이건… 정말 대단하구나. 내가 알던 봉진은 평면이었는데 이건 입체구나. 그 덕분에 다른 술식도 집어넣을 수 있게 되었어.”

“네, 맞아요. 십 년 전 그날 사존께서 떠나시고 저는 바로 봉인석을 만들었어요. 하지만 원래 있던 것보단 기능이 떨어졌죠. 잘해 봤자 임시방편에 불과했었어요.”

청난이 끔벅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랬어? 왜 말을 안 했어?”

“그땐……. 제가 부족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

청난의 표정이 안 좋아지자 백매가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아, 알아요. 이젠 제가 부족하지 않다는 걸 알아요. 청난이…. 받아 주었잖아요.”

백매가 살포시 웃었다. 그의 양 귓불은 붉게 물들었고, 긴 속눈썹이 낮게 내려앉았다. 그 모습이 얼마나 청순가련해 보이는지 그는 모를 것이다.

“알았으면 되었다.”

청난이 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청난과 눈이 마주치자 백매가 말을 이었다.

“제 생각엔 애초에 이 술법은 두 번 익히도록 설계된 게 아닐까 싶어요. 혹은 초대 수야각주가 뒤늦게 이치를 깨닫고 덧붙였거나요. 제가 막 비승했을 땐….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으니 알려 줄 수 없었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은…….”

“알려 줄 존재가 모두 사라진 것이지. 네가 깨달아 다행이다. 어찌 깨달은 건지 나중에 알려 주겠니?”

“네. 제가 겪은 일들을 다 알려 드릴게요. 저와 같이 화내 주세요.”

“아이고야. 누가 우리 애를 괴롭혔을까.”

백매가 청난의 정수리에 머리를 기대고 비비적거렸다. 다 큰 연인의 어리광은 참 반가운 것이었다.

청난은 봉진 사이에서 부유하는 한연화를 보았다. 그의 몰골은 처참하였다. 이것이 생을 가두는 봉진이라는 걸 몰랐다면 죽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매아야, 내가 궁금한 게 있단다.”

“무엇인가요?”

“내가 그를 죽였다면 천기의 천벌을 받았을까?”

“아니었을 거예요. 인간이 인간을 죽였을 때 인간의 법도가 처벌할지언정 하늘이 노하진 않잖아요. 신선도 매한가지죠.”

“그렇구나.”

“하지만 다행이었어요. 그가 삼켰던 영단을 추출하면 자연을 회복하는 데에 보탬이 될 테니까요. 그가 죽었으면 그러지 못했겠죠.”

“그렇구나. 그것참 좋은 소식이야.”

청난의 굳어진 표정이 사르륵 풀리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맞아요. 좋은 소식이죠.”

백매는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토록 다정다감한 그가 돌보았던 아이를 제 손으로 죽였다면 평생 그 사실을 잊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망각의 작용을 받는 존재들인데 왜 나쁜 것만은 잊지 못하는 것일까. 자신 또한 인간일 적에 그랬었다. 청난을 잃은 그 밤은 비승하는 날까지도 잊지 못했고, 결국 삼백 년의 시간 동안 저를 쫓아오는 악몽이 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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