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131화 (131/146)

#131

연화의 손이 청난의 복부로 다가왔다. 본래 영단이 형성되는 위치. 하지만 지금의 청난은 영단을 구축하지 못했다. 연화의 손은 그곳을 지나더니 그보다 조금 더 위, 가슴의 중앙에서 조금 더 왼쪽으로 치우친 곳에서 멈추었다. 그 너머에서는 심장이 맹렬히 뛰고 있었다.

청난은 소름이 오도도 돋았다. 연화가 당장이라도 이 살점을 파헤치고 뜨거운 심장을 가로챌 것만 같았다. 본능적인 공포에 청난은 그를 뿌리쳤다. 하지만 벗어나지 못하고 그의 손목에 덥석 잡혔다. 이윽고 그가 손을 들어 올리며 일어났다.

“으윽… 윽…….”

청난은 갑작스럽게 일으켜진 데다가 발이 땅에 닿을 듯 말 듯해진 탓에 어깨가 빠질 듯이 아파 왔다.

“저번엔 내가 요령이 없었지. 아팠어? 이번엔 안 아플 거야. 우리 다음 생에 다시 만나자.”

“아악……! 아흐윽… 악!”

연화의 손끝이 뾰족한 검날처럼 파고들기 시작했다. 청난의 피가 연화의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연화의 서늘한 웃음소리가 무겁게 드리워졌다.

누가 이를 신선이라 부를까. 그는 악신이었다.

청난은 고통 속에서 눈을 감았다. 그 눈을 다시 뜨는 건 금방이었다. 이젠 그의 눈앞에는 악신만이 남았다.

청난의 팔이 힘겹게 올라오며 그의 얼굴을 향해 내질렀다. 하지만 그것은 몹시 느렸고 또한 나약했다. 한연화는 피식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작 이 정도로는 날…….”

허공에서 청난의 손이 벌어지며 그 안에 든 것이 후두두 떨어졌다. 그것은 자갈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고, 빠르게 뿌연 안개가 사방을 뒤덮었다.

청난은 그제야 한연화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청난은 한참을 뒹굴다 나무 기둥에 부딪힌 뒤에야 멈출 수 있었다. 청난이 구른 곳에는 띄엄띄엄 끊어진 피의 선이 그어졌다.

“크으윽… 큭… 하아… 하…….”

청난이 나무 기둥을 등지고 숨을 골랐다.

한연화는 독을 마신 것처럼 숨을 헐떡였다. 청난은 더 이상 도망가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한연화가 그와 눈을 마주치자 목소리를 높였다.

“진청난……!”

청난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속에 담았던 것을 입 밖에서 이어 갔다.

“아흔일곱, 아흔여덟, 아흔아홉… 백.”

첫 번째 구슬이 터지고 백 초. 그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푸드득거리며 새들이 날아올랐다. 그들은 그저 평범한 새였다. 하지만 한연화는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곧 그 느낌은 시각화되어 눈에 들어왔다.

수야산을 빼곡히 메운 나무 사이사이로 뿌연 연기가 흘러들어왔다. 그것은 시야를 가득 메꾸더니 곧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렇게 바닥은 붉게 물들었다.

“하, 하하… 진청난, 네가 살진을 쓸 줄이야.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지? 화백매의 짓인가?”

“아니.”

“그럼 힘을 숨겨 두었던 건가? 역시 당신은…….”

“아니라니까. 이건 살진이 아니야. 모르겠어?”

청난이 바닥에서 깨진 구슬 조각을 들어 올렸다.

한연화는 본디 영리한 아이였고, 신선이 되어 망각의 작용도 받지 않게 되었으니 분명 이것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었다.

“설마…….”

“맞아. 네가 내 영기를 훔쳤을 때 썼던 그 법기지. 조금 변형을 가했지만.”

“그걸 어디서 구했지?”

“알 거 없다. 그나저나 삼백 년 만에 호흡해 본 기분이 어떠느냐, 연화선.”

“하… 하하! 정말 되는 게 없네? 진짜 더럽게 맛없어.”

한연화는 굳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표정을 구겼다. 그는 그새 적응한 것인지 몸을 일으키며 자세를 잡았다.

“사헌 선자가 만들어 줬겠네. 하지만 아무리 그라고 해도 그 짧은 시간 안에 신선을 제압할 수 있는 법구를 만들진 못해. 내 힘은 곧 돌아온다는 것이겠지.”

“영리하구나.”

“그 안에 화백매가 돌아온다면 당신의 승리야. 하지만 반대라면 이번에야말로 그건 내가 갖겠어.”

“넌 여전히 착각을 하고 있어.”

청난이 허리춤에서 연검을 뽑아 들었다.

“그가 오기 전에 끝낼 거야.”

청난이 곧장 달려들었다. 청난의 움직임은 평범한 양민보다 못한 것이라 우습게 보일 지경이었다. 한연화는 그의 마지막 발악에 어울려 줄 심산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그의 몸은 여전히 무거웠으니, 느릿한 청난의 검보다도 빠르지 못했다.

“윽!”

청난의 검이 곡선을 그리며 그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지나갔다. 한연화는 일부러 중심을 무너트리고 난 뒤에야 그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그들 사이의 간격은 불과 한 자. 청난의 검이 연이어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한연화의 검이 적절하게 막아 내었다.

채앵-!

두 검이 맞붙었다. 힘을 겨룬다면 청난에게 불리했다. 청난은 곧장 몸을 빼내곤 빙글 돌며 세 번째 일격을 날렸다.

한연화는 또다시 방어했다. 하지만 그는 밀리고 있었고, 청난의 검은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한 수 한 수 막아 내는 한연화의 표정이 당혹감에 물들었다. 수 합을 겨룬 두 개의 검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멀어졌다.

한 신선과 한 인간은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골랐다.

“어떻게 당신이 나와 대등할 수 있는 거지? 그래 봤자 인간인데!”

“부끄럽게도 나약한 건 나보다 잘하는 사람도 없을 거란다.”

타닷-! 청난이 낮게 달려들며 그의 하체를 향해 포물선을 그리듯 검을 그었다.

“말도 안 돼!”

한연화는 이번에도 막아 냈다. 예상한 바였다. 청난에게 나약한 경험이 있다면 그에겐 삼백 년이라는 전투의 경험이 있었으니.

어떻게 움직여야 작은 힘으로 큰 충격을 줄까. 어떻게 구부려야 몸에 부담이 없을까. 효율을 추구해 온 청난의 기술과 더욱 빠르고 정확하게 살생하고자 하는 한연화의 기술. 두 기술이 맞붙었다.

‘하지만 그가 적응하면 내겐 승산이 없어.’

연화의 검이 점차 매서워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청난은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신체적인 조건이 너무 달랐다. 청난의 근육은 벌써부터 달달 떨려 오고 있었다.

이윽고 청난의 다리에 힘이 풀리며 몸이 기울었다. 연화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날카로운 검 끝이 매섭게 청난의 미간을 노렸다. 그가 승리를 예감하며 비죽였다.

그리고 청난 또한 웃었다.

한연화가 기이함을 느꼈을 때엔 이미 그의 검은 허공에 ‘고정’된 후였다. 마치 수십 개의 사슬에 얽매인 것처럼.

“주박술?”

한연화는 즉시 검을 포기하고 뒤로 크게 물러났다. 청난이 검날을 타고 손잡이를 쥐었다. 그것은 언제 멈추었냐는 듯이 청난의 손 위에서 자유로이 움직였다.

“옳지. 가르친 걸 잘 기억하고 있구나.”

“영력도 없을 텐데 어떻게……!”

“나는 없지.”

청난이 고개를 기울이자 그의 목선과 함께 귀걸이가 드러났다. 그것을 장식하던 보석은 어디 가고 그저 틀만 남아 있었다. 한연화는 그것에 미약하게 남아 있는 영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 장신구는 그저 영기를 담아낼 뿐이라 신선에게는 별 쓸모가 없는 것이라 하였다. 그렇다고 지금 같은 상황에서 쓰기에도 좋은 수단인 것도 아니었다. 이미 이곳은 영기를 흐트러트리는 법진 속이나 다름없었다. 장신구 밖으로 영기가 흘러나오는 순간 주변에 흡수당하고 마니 방금처럼 단발성으로밖에 쓸 수 없었다.

‘쓰고 싶지 않았는데…….’

백매가 오래도록 지니고 있던 것이었다. 그것엔 이유가 있을 테니 흠집 하나 없이 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스승이 죽는 것보단 낫겠지.

청난은 검을 한 바퀴 돌리며 다시 연화를 가리켰다.

“이제 일곱 개 남았단다.”

청난의 느릿한 검이 또 한 번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백매가 웅덩이에 들어갔을 때 수위는 고작 발목에 잠길 정도밖에 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가슴까지 차올랐다. 그가 인간이었더라면 숨쉬기 답답해 짜증이 서렸겠지만, 그는 인간이 아닐뿐더러 지금 이 순간 어느 때보다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되었다.

백매의 눈꺼풀이 사르륵 열렸다. 그의 영단을 매개로 삼은 샘물은 화사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덕분에 밤이 무르익었음에도 백매의 금빛 눈동자가 밝게 빛났다. 민가의 한 저질스러운 동화에서는 샘물에서 목욕하는 선녀를 보고 나무꾼이 반했다고 한다. 그 나무꾼이 이곳에 있었더라면 백매를 보고서도 반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곳은 백매를 보고 반하는 미적 감각을 가진 존재가 없었고, 이 아름다운 광경은 선룡의 음성이 들리면 깨지고 말 것이었다.

“이제 가도 되는 건가?”

짐승이 낮게 으르렁거리는 듯한 분노 섞인 목소리를 들으면 평범한 양민은 연모를 느끼기 전에 공포에 뒷걸음질 칠만 하였다. 다행히 이곳에 있는 생물은 수천 년 된 선룡과 그의 보살핌을 받는 존재들이었으니 두려움에 떨 존재는 없었다.

선룡은 턱없이 부족한 샘물을 보고 못마땅해하며 흥 콧소리를 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샘물은 본디 백매의 키보다도 깊었으니 고작 절반가량 찬 것에 불과했다.

-임시방편으로 나쁘지 않군. 가거라.

“…….”

백매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이유는 그와 또다시 싸움이 붙어 청난에게 가는 것이 지체될까 염려한 탓이었다. 아니었더라면 선계에서 백매에 대한 소문이 바뀌었을 것이다.

백매가 샘 밖으로 나왔다. 샘물의 근본이 그의 영기인 까닭에 그는 조금도 젖지 않았다. 백매가 주변의 기운을 살폈다. 허나 이 늙은 구렁이는 자신을 얼마나 멀리 데려온 것인지 청난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백매는 또다시 욕지거리를 속으로 삼켰다.

-잠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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