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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130화 (130/146)

#130

백매가 검을 고쳐 쥐고는 허공을 세로로 내질렀다. 그 순간 물체가 베어진 것처럼 강한 바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죄 없는 나무에 부딪혔다.

그 순간 선룡이 허공으로 용솟음쳤다. 그리고 곧 몸을 선회하며 순식간에 경로를 바꾸었다. 아래로. 엄청난 속도로 백매를 향해 떨어져 내려왔다.

-우매한 것! 막 태어난 주제에 감히 날 이길 수 있다 생각했느냐!

“해 보지도 않는 것보단 낫지!”

다시 그 고통을 겪지 않으리라.

그를 잃었던 슬픔은 그를 강하게 만들었다. 슬퍼서가 아니었다. 슬프지 않기 위해 자신을 갈고닦았다.

과거에는 그가 남긴 말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이제는 그를 위해.

하지만 그래 봤자 그는 이제야 삼백 년을 보낸 신선. 체내에 쌓인 영기는 수천 년 된 영물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콰과과과광!

선룡은 크나큰 입으로 백매를 집어삼키는 대신 강한 풍압으로 밀어 내었다.

백매는 중심도 잡지 못하고 바닥을 뒹굴었다. 그가 다시 일어났을 때는 이미 선룡의 긴 몸체가 또다시 하늘을 뒤덮은 상태였다. 백매는 공격에 대비하였다. 하지만 선룡은 허공에서 몸을 꼬아 댈 뿐 방금 전처럼 쏘아져 내려오지 않았다.

선룡의 몸이 움직이며 곡을 그리자 구름이 몰려들었다. 구름 사이에서 빛이 번쩍였다. 금방이라도 번개가 내리칠 것만 같은데, 번개 대신 뿌연 안개가 사방을 뒤덮었다.

“……!”

안개를 경계한 백매가 뒤로 크게 도약했다. 눈앞은 온통 하얗게 물들었다. 백매는 쓸모없어진 시야를 완전히 포기하고 소리에 집중하였다.

파스슷.

풀잎이 부대끼는 소리에 백매의 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함정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선룡은 자신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자신은 유일한 수 계통 신선이었으니. 아무리 성격 나쁜 용이라도 쉬이 해치긴 어렵다. 살아만 있다면 돌아갈 기회는 많을 것이다.

백매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마치 다른 공간에 들어온 듯 안개가 끊기고 시야가 훤히 비쳤다.

그곳에는 거대한 웅덩이가 있었다. 마치 달에 사는 토끼가 절굿공이로 찧고 간 것 같은 거대한 웅덩이가. 절반 정도는 물이 차 있었다. 하지만 한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물이 사라지며 그곳에 살고 있던 생명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거북, 공중을 선회하는 붕어, 땅을 파고든 뿌리 식물.

“영물이…….”

-그래, 영물이다.

웅덩이 주변을 빙 두르고 있던 선룡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작은 영물들이 놀랄 것을 염려한 것인지 입을 열지 않고 생각을 전달해 왔다.

-이 샘은 본디 내 영단으로 만든 곳이었다. 지금은 영단이 없으니 이곳 또한 사라질 운명이지. 삼백 년간 물의 명맥이 약해지며 영물의 수 또한 줄었다. 이곳에 있던 이들은 종의 마지막이라 볼 수 있지. 이 아이들은 너무나 어리다. 보호받지 못한다면 목숨을 잃는 건 시간문제일 터. 자, 물의 후손이자 인간의 후손아. 네가 이 샘을 채우거라.

백매는 선룡이 자신을 잘 아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말들을 쓸 수 있을까. 청난의 손에 구원받으며 그의 사상을 교육받은 백매는 보호가 필요한 어린 자들을 버릴 수 없었다.

“그럼 사존을 먼저 모시고…….”

백매가 몸을 돌려 떠나려고 하자 선룡의 육중한 꼬리가 다시금 그의 경로를 방해하였다. 이제는 그에게 검을 겨눌 수 없었다. 그는 청난을 떠올리게 하였다.

-꼬마야, 이게 부탁 같더냐?

“…….”

-네 스승인 그 아이를 걱정하는 연유를 모르겠구나.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자네 또한 알고 있을 터.

“하지만…….”

백매는 더 이상 변명할 수 없었다. 알고 있었다. 그는 잘 해낼 것이다. 그런 인물이었고, 그럴 준비마저 마쳤다. 허나 속을 옥죄어 오는 불안함은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토할 것 같아.’

이런 생각을 한 것이 얼마 만일까.

선룡의 꼬리가 움직이며 백매를 다그쳤다. 그는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다행히 원하는 바는 이것 하나뿐인 모양.

‘서둘러 끝내고 사존께 돌아가자.’

백매가 저벅저벅 웅덩이 한가운데에 들어가자 남은 샘물이 그의 영기와 반응하기 시작했다.

일순간 청난의 머릿속에 오만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저를 향해 방긋방긋 웃고 있는 이 살인마가 나를 죽일지 놓아줄지. 하지만 확률을 계산하는 것은 청난의 전문 분야가 아니었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알 순 없으리라. 청난은 쓸데없는 생각을 접고 자신의 전문 분야를 행하기로 했다. 바로, 생존.

청난은 그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굴리려 하였다. 당연하게도 그것은 곧장 저지되고 말았다. 연화가 청난의 어깨를 단단하게 붙잡았다.

“무리하지 마. 몸도 약하잖아. 여긴 잘못 구르면 머리를 크게 다칠 거야. 자, 일어나자.”

연화가 퍽 다정한 손길로 부축해 주었다. 청난은 순순히 그의 말을 따랐다.

“미쳤구나.”

“설마 이제 알았어?”

“무엇을 원하지?”

“나도 몰라.”

“뭐?”

청난은 황당했다. 그가 모르면 대체 누가 아는가?

그의 낯은 지금 이 순간에도 시도 때도 없이 움찔거렸다. 그는 정말로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는 마실 나온 것처럼 조금도 경계하지 않았다. 이 모습만 본다면 그가 자신을 해칠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돌변의 귀재였다. 저 생글생글한 낯으로 제 배를 찔러 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치 삼백 년 전 그날처럼.

연화가 청난의 옷매무새를 정돈해 주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을뿐더러 청난은 온몸이 푹 젖은 탓에 아무리 만져도 지저분한 모습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흠, 뜨겁게 말려야 하려나.”

청난이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이번엔 그도 순순히 놓아주었다.

“네 도움은 필요 없어.”

“왜? 난 화백매가 아니라서? 아니면 수야각 제자가 아니라서? 아, 아니다. 내가 수영근이 없어서구나! 그렇지?”

그의 표정이 다시 괴이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과장된 연극 같았다. 그렇다면 그가 맡은 역은 비극을 겪는 가련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의 손에 목숨을 잃은 이들이 수백 수천이었다. 그런 주제에 스스로를 동정받을 대상으로 꾸민다니. 청난은 역겨움에 토악질을 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청난이 표정을 구기며 대답했다.

“아니, 너이기 때문이고. 네가 벌인 일들 때문이다.”

“그게 내 탓이야? 방법이 없는 걸 어떡해?”

“너는 진짜 날 원하던 것도 아니었지 않으냐.”

“원해. 갖고 싶어! 나도 당신 같은 스승을 갖고 싶어!”

연화가 화를 버럭 내었다. 하지만 공격은커녕 거리를 좁혀 오지도 않았다.

마치 어린아이의 아집 같았다. 하지만 평범한 어린아이와 달리 그는 이 순간에도 사정거리를 계산하고 있겠지. 그것이 한연화였다.

만약 여기 있는 것이 백매였다면 혼란 따위는 뒤로하고 공격에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벗어날 수 있을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해.’

그를 벗어날 수 없고, 그가 다가오지도 않았다.

‘이대로 시간을 끌까? 아니, 그의 상황을 모르니 이건 도박이야. 차라리…….’

청난이 손목을 주물럭거렸다 변화가 필요했다. 이대로는 그의 판 위에서 놀아날 뿐이었다.

“불쌍하구나.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도 몰라.”

“그딴 건 몰라도 돼.”

“하하, 아가야, 내가 알려 주마. 네가 원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지. 넌 그저 싫어할 핑계를 댈 뿐이야. 네가 무엇을 애정한다 말할 수 있지? 애정을 배우지 못한… 크윽……!”

무거운 추에 짓눌리듯 갑자기 밀려온 압박감에 청난은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계곡가의 둥근 자갈은 청난의 여린 피부를 긁으며 상처를 내었다. 청난의 피는 물에 희석되며 사방으로 흘러갔다. 손이 저려 왔다. 청난이 제 상처를 확인하기도 전에 쓰러진 그의 몸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분명 아까처럼 웃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낯은 어떤 감정도 담아내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만이 분노하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당신이 뭘 알아? 네가 얼마나 살았지? 고작 백 년도 못 산 주제에……!”

온몸이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청난은 그가 발길질이라도 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거친 행동은 하지 않았다. 대신 무릎을 굽혀 앉아 청난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이해해. 사존은 인간이니까. 우릴 이해 못 하는 건 당연하지.”

“‘우리’? 웃기는 소리 말거라. ‘너’겠지.”

“사존은 신선도 아니면서 다 아는 양 말하다니 참으로 오만해. 그리고 우습지. 우물 안 개구리라고 알아?”

연화가 청난의 손을 매만지자 상처가 빠르게 아물었다. 하지만 청난은 뜨겁게 밀려 들어오는 그의 영력이 불쾌하기만 하였다.

연화는 태연하게 말을 이어 갔다.

“개구리는 참 하찮아. 그런데 그 하찮은 것 하나로 산과 바다를 지킬 수 있다면 그러는 게 세상을 위한 일이겠지?”

“…….”

“있잖아, 인간들의 영근도 가지고 수룡의 영단도 가졌어. 그런데도 아직도 허전한 건 왜일까? 아무래도 처음 맛보았던 그 맛이 아니기 때문이겠지? 사실 나, 처음 만난 수계 수사가 사존이었어. 그날이 아직도 기억나. 그때 정말로, 정말 뜨거웠는데 당신이 나타나자마자 시원해졌거든. 세상에 막 나온 기분이었지. 어째서 그때의 기분을 또다시 느낄 수 없는 걸까? 응?”

“욕심이 많구나.”

“하하하, 맞아! 난 욕심이 많아. 그럼 안 돼? 전대 문주가 그랬어. 신선이 되면 뭐든 가질 수 있다고.”

“그가 헛소리를 한 게지.”

“하하하하, 맞아. 완전 헛소리였어. 하지만 상관없어. 내가 이루면 되니까.”

그는 폭소하더니 갑자기 뚝 멈추고 정색했다.

“그러니까 이거 나 줘. 사존은 또 태어나면 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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