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다 왔어요.”
백매가 조심스레 그를 내려 주었다. 청난은 두 눈을 너무 꽉 감고 있던 나머지 눈을 뜨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아무것도 안 보여.”
“아, 잠시만요.”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하얀 빛이 허공에 떠올랐다. 손톱만 한 그 빛은 주변을 훤히 비춰 주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동굴 안이었다. 청난은 이곳이 낯이 익었다. 동굴 벽에 그어진 여러 개의 선들 또한.
“여기……. 혹시 내 집 뒤니?”
“맞아요.”
여기서 말한 ‘내 집’은 전생의 얘기였다. 수야각에서 지냈던 안쪽 처소. 그 근처에는 크지 않은 폭포가 있어 더운 여름날이면 제자들과 함께 피서를 가곤 하였었다. 이 선들은 제자들의 키를 그어 놓았던 것이었다. 지금의 청난과 비슷한 위치에 그어진 선 옆에는 작은 꽃이 그려져 있었다.
이곳이 어딘지 알게 되자 그제야 솨아아아, 시원한 폭포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확실히 마당같이 여기던 집 뒤였다.
“선룡께서 여기에 계시다고?”
집 뒷마당에 오랜 선조 격인 선룡께서 주무시고 계셨다는 사실은 청난을 민망하게 만들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매는 질문에 성실히 답해 주었다.
“여기 가장 안쪽에 연못이 있잖아요.”
“그렇지.”
“그 안에서 사세요. 입구는 좁은데 그 안쪽은 더 넓거든요. 저도 옛 생각에 왔다가 우연히 알게 되었어요.”
“그렇… 구나…….”
청난은 더욱 낯 뜨거워졌다.
청난은 어릴 때부터 기대를 한 몸에 받아 왔고, 그에 걸맞은 행실이 요구되었었다. 그 탓에 울고 싶어도 울지 못했던 어린 시절에는 이곳에 와 연못에 비친 자신을 상대로 울분을 토로하곤 했었다.
‘설마 그걸 다 들으신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청난은 부끄러워 죽을지도 몰랐다.
“안쪽에서 강렬한 힘이 느껴져요. 하지만 누군지는 모르겠어요.”
“연화이거나, 깨어난 선룡이시겠구나.”
“차라리 전자면 좋겠네요.”
마침 청난도 같은 생각을 했기에 의문이 들었다.
“어째서?”
“성격 안 좋기로 소문났거든요.”
“그런 소문도 나?”
“그럼요. 신선들은 다들 시간이 넘쳐흐르니 별의별 소릴 다 하죠. 듣기 싫어도 안 들을 수가 없어요.”
백매는 불쌍한 척 고개를 갸웃거렸다. 청난이 손을 올리자 그가 비비적거렸다. 청난은 반려자가 생긴 것인지 반려견이 생긴 것인지 혼란이 스쳐 지나갔다. 다행히 그는 반려견으로 착각하기엔 몹시 인간적인 미모가 뛰어났다.
“그럼 조심스럽게 가… 우왓!”
“청난!”
갑자기 땅이 우르르 울려 대었다. 청난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넘어질 뻔했지만 백매가 무사히 붙잡아 주었다.
-부우웅.
뱃고동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순식간에 주변의 기온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청난은 곧 그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촤아아.
동굴 안쪽에서부터 엄청난 파도가 덮쳐 왔다!
청난이 의문을 입에 담을 새도 없이 파도가 두 사람을 집어삼켰다. 백매가 청난을 부둥켜안은 덕분에 동굴 벽에 부딪히는 것은 면했지만, 파도가 흐르는 대로 휩쓸려 가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그들은 곧 동굴 밖으로 뿜어져 나오게 되었다. 달빛이 밝았던 덕분에 청난은 볼 수 있었다. 동굴을 가득 메꿀 정도로 거대한 흰 용이 비상하는 것을. 그리고 그가 백매의 발목을 물어 끌고 가는 것을.
“……!”
백매가 곧바로 손을 놓았기 때문에 청난은 멀어지는 그를 바라만 보아야 했다. 허공에 손을 뻗어 보았지만 붙잡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청난은 그저 인간에 불과했으니.
퍼벙!
당연하게도 폭포 아래에는 깊은 계곡이 있었다. 계곡에 빠진 청난은 밀려오는 수압에 정신을 잃을 뻔했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심해처럼 깊은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제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린 것뿐일까. 분간할 수 없었다.
푸르르륵.
얼마 남지 않은 숨이 떠나갔다. 청난은 무작정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어떻게 움직였는지도 몰랐다. 그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계곡가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쿨럭, 허억, 헉, 헉… 헉…….”
얼굴에 있는 일곱 개의 구멍이 성실하게 물을 토해 냈다. 청난은 자신의 심장마저 뱉은 기분이 들 때쯤에야 정신을 추스를 수 있었다. 지친 몸을 움직여 털썩 주저앉자,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청난이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아주 익숙한 자가 있었다.
“사존, 안녕?”
한연화였다.
백매는 자신의 선택이 실수였음을 깨달았다.
그는 선룡에 대해 아는 것이 적었다. 그렇기 때문에 선룡이 빠르게 용솟음치며 제 다리를 물었을 때 자신을 공격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청난을 위험에 빠뜨릴 수 없었기 때문에 그를 놓아야만 했다. 다행히 아래는 계곡이었고, 청난은 결코 그따위 것에 지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하필 그곳에 한연화가 있을 줄이야!
백매가 뒤늦게 쫓아가려 했지만 이 거대한 이빨은 제 다리를 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이거 놔! 놓으라고!”
백매의 검이 이빨 사이를 들쑤셨다. 그의 검은 삼백 년간 갖가지 법기로 강화하였기에 몹시 단단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가 나가는 것은 그의 검이었다. 선룡의 이빨은 조금의 흠도 나지 않았다. 애당초 하나로 연결된 바위 같았다.
백매는 이런 방식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다행히 그는 힘만 센 깡패로 자라지 않았다. 백매는 방금까지 검으로 이빨을 들쑤신 사람이라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예를 갖추어 말했다.
“선룡께서는 대체 왜 이러십니까. 후손이 노하게 만들었습니까? 차후에 죄를 청하러 방문하겠습니다. 제 사존께서 위험하시니 이 제자가 도움을 드리러 가 봐야 합니다. 선룡! 제 말 좀 들어 주세요!”
백매는 부디 그가 말이 통하는 상대이길 바라며 끊임없이 말로 회유해 보았다. 하지만 선룡은 거대한 눈으로 흘겨보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속력을 내기까지 했다.
“선룡!”
백매는 이 덩치 큰 용이 고집불통이기까지 하단 것을 알게 되자 다시금 검을 들고 내려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선룡이 그를 퉤 뱉어 내었다.
백매는 허공에서 몸을 둥글게 돌리며 안정적으로 착지하였다. 그는 주변을 살필 겨를도 없이 곧바로 청난이 느껴지는 곳으로 내달리려 하였다. 하지만 곧 그의 앞에 육중한 꼬리가 파악-! 떨어져 내려오며 땅이 깊게 파였다.
선룡의 입이 열리더니 동굴을 울렸던 것 같은 뱃고동 소리가 울렸다. 그와 동시에 백매의 머릿속에 그 뜻이 전달되었다.
-네 책임을 다하여라.
그리고는 부연 설명도 없이 다시 입을 닫았다. 백매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버럭 내질렀다.
“내 책임? 내 책임이 뭔데! 선룡이 되어 한연화의 꼬드김에라도 넘어간 건가? 너 따위를 섬긴 과거가 부끄러울 지경이야!”
선룡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다급한 백매에 비해 그의 말은 느릿하여 답답하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움직임은 재빨라 백매가 빠져나갈 틈이 없었다.
-그가 내 영단을 훔쳐 갔노라. 그러니 그와 같은 인선으로서 네 책무를 다하여라.
“하!”
백매는 이보다 더 화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죄를 대신 갚으라고? 죄를 지은 건 그인데 대체 내가 왜!?
가진 자들은 늘 그랬다. ‘고아들은 다 도둑질을 하지.’, ‘너희는 사회악이며 쓰레기야.’ 그저 떠넘기기 위한, 화풀이를 하기 위한 일반화에 고통받았던 어린 시절은 아무리 좋은 기억을 덧대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무얼 했지? 영단은커녕 빵 하나 훔친 적 없었다. 하지만 열 살도 채 되지 못했던 자신은 몰매에 생사를 넘나들었고, 지금은 삼백 년 만에 되찾은 사존을 또다시 잃을 위기에 처했다.
백매는 생각했다.
내가 왜 참아야 하지?
청난은 자주 말했었다.
가진 게 많을수록 참아야 한다고.
하지만 지금 그가 무엇을 가졌지? 그가 유일하게 소중히 여기는 것은 오직 청난뿐인데 또다시 뺏기고 있지 않은가.
백매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는 파앗- 솟아올랐다. 허공에 숨은 수분이 가득했다. 이러한 환경이 유리한 것은 선룡뿐만이 아니었다. 백매가 검을 뽑았다. 이가 빠진 검날에 얼음이 차오르더니 곧 전과 다른 빙검의 형태가 되었다.
백매는 선룡의 몸을 밟고 그의 머리로 치고 올라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선룡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선룡의 육중한 몸이 빙글 돌자 백매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허나 백매는 굴하지 않았다.
몸집이 크다는 것은 공격할 수 있는 부분이 넓다는 것.
백매는 청난과 약조했다. 그가 안전한 이상 살생하지 않겠다고. 지금 청난을 위협하는 건 선룡이 아니었다. 하지만 백매에겐 한연화나, 자신을 방해하는 선룡이나 매한가지였다. 백매의 검에 살기가 넘실거렸다.
백매의 두 다리는 땅에 박힌 듯 굳건했고, 그 주변으로 파문이 일렁였다. 물이 아닌 땅 위에서. 영산인 이 땅은 그의 악의를 거부했다. 그리하여 땅이 무너져 내리려는 찰나에 그가 파앗 튀어 올랐다.
경공의 대가였던 그의 스승을 수백 년간 되뇌고, 또 되뇐 결과 자신의 것으로 변화시킨 몸짓.
스승과 같은 경지에 이룩하진 않았다. 그것은 제 스승의 것이었으니. 대신 허공에 흩날리는 나뭇잎을 밟았다. 나뭇가지 끝을 밟았다. 무작정 허공에 몸을 띄운 것과는 달랐다. 그렇게 밟을수록 속력은 더욱 빨라졌다.
백매의 몸이 선룡의 입으로 발사되듯 튀어 나갔다.
-부아아아!
선룡의 입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닥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