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그… 그렇기는 해요…….”
‘후…….’
청난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백매는 오히려 고개를 푹 숙이고 시선을 피하기까지 하였다.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청난은 그를 재촉할 이유가 사라졌으니 차분히 그를 기다렸다.
다행히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백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제가 아니기도…….”
청난의 심장이 철렁이는 듯했다. 그이면서 그가 아니라니. 혹시 은애한다고 했던 건 내 감정의 영향을 받아서였던 걸까? 오만 가지의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청난의 낯이 점점 창백해져 갔다.
“자세히 말해 주렴.”
백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왔을 땐 이미 마종이 사존의 정신을 가둔 후라 제가 개입하기 어려웠어요. 아시는 것처럼 마와 신성은 서로 양립할 수 없잖아요. 부딪친다면 그 파급력은 주변마저 해치죠.”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질 일이지.”
“그래서 전력을 다할 수 없었어요. 작은 알을 집어넣는 게 겨우였죠. 그 알은 사존의 꿈에서 태어나는 거라 마에 반발하지 않거든요.”
“그럼 그곳에 있던 너는 그 알에서 태어난 존재겠구나.”
“맞아요. 제 기억은 없어요. 하지만 본질은 저였어요. 자란 환경이 다를 뿐인 거죠. 그래서 그가 하는 행동과 말은 마종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순전히 저의… 제…….”
“제?”
청난은 단지 그의 말을 이어받아 준 것이었는데, 백매는 자신을 탓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겨우 들었던 그의 고개는 아예 어깨 사이로 파묻혀 버렸다.
“제가, 제가 잘못했어요. 고의가 아니었어요. 사존을 구경하려거나 했던 건 아니에요. 알았으면 바로 깨워 드렸을 거예요…….”
“날 계속 봐 왔다고?”
백매는 고개를 끄덕이며 두 어깨를 털썩 내려놓았다.
“미워하지 말아 주세요…….”
청난은 꿈속에서 만났던 열다섯의 그가 생각났다. 그는 결국 그였다.
“미워하지 않아. 그러면, 그때의 일을 기억하느냐?”
백매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로 해야지.”
“으음… 네, 네 기억하고 있어요.”
“그럼 다시 말할 수도 있겠구나. 해 줄래?”
“제가… 저는……. 응, 당신을 은애하고 있어요. 설사 당신이 나무에 불과하더라도, 그저 지저귀는 새 한 마리일지라도, 그럼에도 저는 당신에게 시선을 빼앗겼겠죠. 그것은 곧 연모의 정이 될 거예요. 그랬으니까요. 당신의 모습도 역할도 그런 건 아무 상관없어요. 그저, 그저 당신이라서 좋아요. 그것뿐이에요. 당신이 좋아요.”
그것은 청난이 말했던 ‘다시 한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청난이 원했던 말이었다. 그는 굳게 닫혔던 수문이 열린 양 끊임없이 제 감정을 쏟아내었다.
“제가 당신에게 발견되어 제자가 된 것은 크나큰 축복이었어요. 그 덕분에 저는 누구보다도 당신의 가까이에 있을 수 있었죠. 당신의 곁에 있을 수 있었어요. 당신의 목소리에, 당신의 손길에 이끌리며 자랐어요. 하지만 당신께서 제 스승이기 때문에 연모하는 건 아니에요. 당신께서 절 봐 주시는 시선이 좋았고, 웃어 주시는 게 좋았고, 당신이 던지는 다정한 말이 너무나도 좋았어요. 그건 오직 당신만의 것이에요. 청난 당신이 제게 그렇게 해 주셨잖아요. 그래서 좋아요. 청난 당신이라서요.”
청난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많고 많았다. 부모님, 유모, 친척, 형님, 사형제, 청난의 사존인 유회평, 그리고 수많은 이들이 그를 칭송하며 이름을 입에 올렸다. 그의 생은 진청난으로 시작해 진청난으로 끝났다. 그랬건만. 그럼에도 그가 부르는 이름이 이토록 특별하게 들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어째서 이토록 달콤하며 중독적인 걸까.
그의 입에서 제 이름이 나올 때면 자신의 이름은 이 순간을 위해 지어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의 입술이 벌어지고 다물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청난은 갑갑함을 느꼈다. 이 날뛰는 심장을 담아 두기엔 청난의 흉통은 매우 좁은 모양이었다.
청난과 백매는 서로 마주 보고 있었기에 청난이 상체를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둘 사이의 공간은 손쉽게 좁아졌다. 청난은 그의 숨소리를 들었다.
본래 신선에게는 숨결이 없었다. 호흡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발소리도 없었고, 심장이 반복 운동할 필요도 없었다. 겉모습은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인간과 크게 다를 바 없었지만, 그 본질은 완전히 다른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백매는 청난의 곁에서 숨을 쉬었고, 청난이 잠들 때면 가벼운 발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그의 심장은 청난이 다가올 때마다 급히 요동쳤고, 그의 피부는 마주 잡은 손을 데워 주곤 하였다. 이것은 모두 청난을 위한 그의 세심한 배려였다.
이제는 알았다. 이것은 효심 같은 게 아니라는 것을.
“한 번 더 말해 주렴.”
“청난을 은애해요.”
“또.”
“은애해요.”
“나는 화백매가 좋아. 응, 은애해. 네가 내 제자가 아니었다고 해도, 그저 스쳐 가는 인연이었을 뿐이라고 해도, 너와 나눈 짧은 대화를 평생 잊지 못했겠지. 너만을 그렸을 거야. 너와 만난 건 축복이었어. 너와 함께하여 네 여러 모습을 볼 수 있음에 감사해. 응, 응, 네가 좋아. 은애해. 은애해 백매.”
삼백 년간 헤매었던 감정이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기분이었다. 청난은 멈추지 않고 반복하였다. 은애해, 은애하고 있어. 그의 입이 움직일 때마다 그들은 더욱 가까워졌다. 이윽고 그들의 입술이 맞물려서야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목소리가 멈추었다. 입술이 벌어지며 청난의 눈꺼풀이 감겼다. 두 입술이 떨어지자 청난의 눈꺼풀이 올라갔다. 그 너머로 보이는 백매는 믿을 수 없는 듯 벌어졌던 입술을 다물지 못하였고,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저것도 자신을 위한 흉내일까. 아무렴 어때. 청난의 몸이 기울어지며 또다시 붉은 입술이 서로 맞물려졌다.
두 번의 접문이 지나자 청난은 그제야 현실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지금이 전시가 아니었다면 분명 이 수야각을 다섯 바퀴쯤 돌았을 것이다. 청난은 이미 다섯 바퀴를 다 돈 것처럼 숨이 차올랐다. 심장은 너무나도 빠르게 뛰어 이젠 제자리에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갈비뼈가 시끄럽다며 뛰쳐나간다고 하더라도 이해될 지경이었다.
‘후…….’
청난이 길게 심호흡하였다. 아쉬웠으나 그의 연인 진청난에서 수야각주 진청난으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하지만 그 생각은 실천되지 못했다. 그가 일어나기 위해 고개를 돌리려던 순간에 방금 전까지 물고 있던 입술이 다시금 그를 덮쳐 온 탓이었다.
이번에는 청난도 놀랐다. 백매는 마치 사냥감을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거침이 없었다. 그는 입술만으로는 부족한 모양이었다. 그의 목마름이 청난에게도 전해졌다. 그는 청난의 등이 땅에 닿을 때까지도 멈추지 않았다.
“으읍… 읍……!”
“사… 사존…….”
“읏… 아니… 아니, 그거 말고.”
“청난, 청난… 청난…….”
백매가 보채듯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흐트러진 청난의 머리카락이 땅 위에 그려진 바다 같았다. 백매가 먼 과거에 묻어 두고 온 야망이 삼백의 시간을 넘어 고개를 내밀었다. 그만큼 청난의 붉게 부푼 입술은 매혹적이었다.
이윽고 그 입술의 얇은 살결이 갈라지며 피가 새어 나왔다.
“……!”
백매가 숨을 멈추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뒤늦게 자신이 한 행동을 깨달은 것이다. 그를 상처 내고 말았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빽빽하게 차올랐다.
청난도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아려 오는 입술을 손등으로 흩고 나서야 피가 난 것을 알아차렸다.
청난이 상처 난 입술을 물고 씨익 웃었다.
“괜찮다. 내가 누군지 잊은 건 아니겠지? 이 정도는 끄떡없지. 아, 아니다. 끄떡없지 않은 편이 더 좋으냐?”
“아니, 절대 아니에요! ……아프시죠?”
“아파도 좋아.”
청난이 한 걸음 다가가 또다시 사이를 좁혔다. 백매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이 낸 상처를 바라보았다. 한데 하필이면 그 부위가 입술이라, 억누른 감정이 다시금 요동쳤다. 백매가 고개를 휙 돌리며 마음을 다스렸다.
“너라면 언제나 좋지. 하지만 지금은 해야 할 게 있어 보이는구나. 그렇지?”
“……맞아요.”
-피에에에에에엑!
백매가 고개를 끄덕이자 때마침 멀지 않은 곳에서 새 울음소리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저건……. 좀 소리가 크구나.”
“원래는 소리 내지 않아요. 아무래도 누군가에게 들킨 모양이에요.”
“그 누군가는 연화겠지. 장소는 어디야?”
“……아.”
무언가 골똘히 보는 듯하던 백매가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어딘데 그래?”
“……선룡의 처소요.”
“가 보자!”
“네!”
청난의 말이 끝나자마자 백매가 그를 번쩍 안아 들었다. 언제나 청난이 먼저 안기는 시늉을 해야 받아 들었던 그였기에 청난은 순간 놀라고 말았다.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 자신감이 생긴 것이 기뻤지만, 아무래도 그 기쁨을 누리기엔 좋은 시기는 아니었다.
“절 꽉 잡으세요.”
“응.”
청난이 그의 목에 손을 걸고 가슴 사이로 고개를 파묻었다. 백매의 몸이 낮아지는가 싶더니 단숨에 튀어 올랐다. 청난은 온몸에 부딪히는 압력에 입을 열 여력이 없었다. 하여 청난은 홀로 골똘히 생각했다.
한연화는 이 땅의 비밀을 몰랐다. 그런데 수룡의 처소는 어떻게 안 것일까.
아니, 수룡의 처소를 모르기 때문에 실패할 일을 벌인 것일지도 몰랐다. 그는 자신이 마종에 먹히자마자 바로 자리를 벗어났다고 했다. 백매가 두려워서? 곧 선계의 공적이 될 터인데 신선 한 명이 두려워 일을 그르칠까? 아니라면 그가 자리를 벗어난 이유는…….
한눈에 보기 위해서.
백매가 수룡을 언급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땅의 영기의 흐름을 파악한다면 알아낼 수 있을 테니까. 왜 수야각 수사들이 뛰어난지, 왜 유독 수야각에서만 수계의 재능이 대물림되는지, 그 비밀의 소재를.
다른 이도 아닌 책략으로 하늘에 오른 이라면 더더욱.
‘굳이 수야각에 와 이목을 끈 것도 집착 때문이 아니야. 처음부터 노림수가 있던 것이지.’
그와는 생각하는 방향성 자체가 다른 탓에 깨닫는 것이 늦고 말았다. 청난의 양손에 힘이 들어가며 가볍게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