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털썩.
백매의 손이 느슨해지는 것과 동시에 청난이 주저앉고 말았다. 그의 다리는 단 한 번도 사용해 본 적 없는 것처럼 조금도 힘이 실리지 않았다. 사실 다리뿐만이 아니었다. 만약 백매가 다급하게 붙잡아 준 게 아니었더라면 청난은 온몸을 흙모래 범벅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사존, 사존, 괜찮으세요?”
청난의 낯이 불그스름해졌다. 백매는 자신을 깎아내리지 않더라도 이것이 연모의 정 탓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청난의 숨이 얕았다.
청난은 새근거리는 와중에 손을 들어 올리며 자신의 무사를 알렸다.
“괜찮아. 그냥 좀 나른할 뿐이야. 하하……. 응?”
무언가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것은 두 개로 갈라졌지만 청난은 이것의 원형을 알아볼 수 있었다. 백매가 그것을 주워 청난의 눈앞으로 가져갔다.
“진영이 주었던 그것 아니냐.”
“사존을 덮었던 그 나무의 씨앗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이게 씨앗이라고?”
아무리 봐도 평범한 옥으로만 보였다. 심지어 갈라진 단면도 씨앗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진영은 이것을 제 스승에게 받았다고 했다.
“역시 진영의 스승이 연화선이었나 보네.”
“진영은 현존하는 이 중 가장 사존과 가까운 혈육이에요. 한연화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나 봐요.”
“진영은 스승에 의해 본가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했어. 그의 본가가 나와 같은 마을에 있는 건 우연이었을 거야. 아마 이게 나한테 넘어온 것도 계획에 없던 것이겠지. 그러니 그가 즉흥적으로 계획을 수정했다고 생각해.”
“진영이 고의로 건넨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응.”
청난이 짧게 대답했다. 백매는 못마땅했다. 살가운 것과 믿는 것은 다르고, 백매가 아는 청난은 일방적으로 애정은 할지언정 쉽게 믿지는 않는다. 고작해야 스무 해를 산 인간이, 그것도 청난과 알고 지낸 지 이제 한두 해가 되었을 뿐인 그가 저리 굳건한 믿음을 샀다는 게 믿기지 않기도 했다.
마뜩잖다는 백매의 심정이 면면에 드러났다. 청난은 그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내가 진영을 믿어 그러는 것 같아?”
“아닌가요?”
“나쁜 아이는 아니라고 생각하긴 해. 하지만 목숨을 걸 정도는 아니지. 내가 너 말고 누구에게 목숨을 맡기겠어?”
“…….”
백매는 생각했다. 청난은 정말 대단한 존재라고. 어떻게 단마디의 말로 모든 불만을 사륵 녹이는 걸까. 또 어떻게 이렇게 부끄럽게 만드는 걸까. 청난은 백매가 고개를 숙이든 말든 자신의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믿는 건 너였지. 날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너라는 인격체와 비승을 한 너의 실력을 말이야. 만약 그가 한연화에게 홀린 거라면 네가 알아차렸겠지?”
“음, 맞아요. 하지만 제정신으로 그랬을지도 모르잖아요.”
“하하하, 누가 날 원하겠어? 뭘 얻는다고. 한연화야 괜히 어린 시절에 붙잡혀 집착하는 것뿐이… 윽.”
“일어나지 마세요. 제가 도와드릴 테니 운기조식하시는 게 좋겠어요.”
“나중에 몰아서 할게. 우선 연화를… 으앗!”
청난이 일어나려고 하자 백매가 그의 허리를 붙잡고 다시 제 품으로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더니 평평한 바위 위에 그를 앉혀 주었다.
“제가 사존을 발견했을 때 한연화는 바로 도망쳤어요. 저는 그를 추적할 정신이 아니었어서 기척이 끊기고 말았죠.”
백매는 모래로 된 조각을 만지듯 조심스레 청난의 자세를 고쳐 주더니, 그의 몸에서 손을 떼자마자 거침없는 손길로 영기를 조형하기 시작했다. 그의 영기로 만들어진 새는 눈을 찍는 것으로 완성되자마자 푸드덕 날갯짓하며 허공으로 날아올랐고, 그것은 다시 여러 마리의 새로 분열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저들이 한연화의 흔적을 찾아 줄 거예요. 그때까지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좋아. 그럼 나도 할 일이 없다는 얘기구나. 그럼 어쩌겠어. 네 말대로 쉬어야지.”
청난이 장난스레 한숨을 내뱉자 백매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불과 작년만 하더라도 자신을 말리지 못했던 백매가 이제는 자신의 휴식을 두고 조건을 겨루고 있었다. 이것도 성장이라 봐야 하는 걸까. 내 맘대로 하는 삶은 그른 것 같지만, 애초에 좋은 습관도 아니었고 뭣보다 그가 자신을 대할 때 자신감이 생겼다는 것이 더없이 기뻤다.
청난이 가부좌를 틀고 앉자 백매가 그의 날개뼈 위에 양손을 올렸다. 그 순간 강렬한 기운이 그의 손을 타고 넘어왔다.
“으읏……! 조… 좀 천천히… 해……!”
“아, 아니 이렇게…….”
백매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였지만 청난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던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렇게 좁을 줄은 몰랐다는 것이겠지……!’
청난의 신체 조건은 일반인 미만이었기에 영기를 받을 수 있는 영맥 또한 일반인보다도 좁고 볼품없었다. 그러니 그가 화들짝 놀란 건 이해했지만, 그래도 억울했다. 원래 이렇게 태어난 걸 어떡하겠는가.
‘아니, 이렇게 태어난 건 아니었지…….’
하지만 그의 몸이 약해진 건 한 살도 되기 전의 일이었다. 그때는 뒤집기도 못 하던 시절이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던 건 매한가지다.
청난의 몸이 약한 것은 이미 알고 있던 것이겠지만, 그는 옛날부터 청난에 대해서는 좋은 것만 기억하는 안 좋은 습관이 있었다. 청난이 다시 태어난 이후로 그에게 영기를 전수받은 적이 없었으니, 전생의 기억이 갱신되지 않은 모양이다.
백매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말없이 위력을 대폭 줄였다. 그 양이 매우 미비하여 마치 비가 온 다음 날 처마 밑에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 같을 지경이었다. 누군가 볼 수 있었다면 답답하게 여겼겠지만, 청난에게는 아주 딱 좋았다.
“그런데 백매야, 너는 술법 안에서 괜찮았느냐?”
청난이 아는 백매는 심성이 여린 아이였기에 사실 이것을 가장 먼저 묻고 싶었다. 상황이 이러니 차후에 미룰 생각이었지만, 몸은 따로 할 일이 있으니 쉬고 있는 입에게 일을 시켰다.
“네, 제자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금방 나왔어요.”
“흠, 그래? 무력으로 깨지는 거더냐?”
“그건 아니에요. 이 나무는 마종계 식물이에요. 이것은 정신에 침투하는데, 그때는 이미 정신이 갇힌 후라서 무력은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신선들도 애먹는 개체라서 이백 년쯤 전에 대대적으로 토벌 대상이 되었었죠. 그때 전방에 있던 신선 중 하나가 한연화였어요.”
“그럼 넌 어떻게 이겨 내었어?”
“음, 저한테는… 별거 아니었어요.”
“별거 아니었다고?”
“저는 악몽보다 무서워하는 게 있었거든요. 아, 그리고 사존께서 잡히신 지 반 각도 채 안 되었습니다. 길게 느껴져도 실제론 얼마 안 지난 거죠.”
“그렇구나.”
청난은 그가 어물쩍 말을 돌렸다는 걸 눈치챘지만 그가 원하는 대로 넘어가 주었다. 그가 말하는 ‘악몽보다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얼핏 알 것 같았다.
“한연화는 이 땅에 대해서는 몰랐나 봅니다. 마종이 발아한 것만 보고 바로 사라졌거든요.”
“다행이었구나.”
“아무리 저라도 마종을 저지하는 동시에 그를 상대하긴 어려웠을 거예요.”
어째서 수야각은 민가와 가깝게 위치해 있을까. 개파1) 조사가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이었을까? 그것만은 아니었다. 수야각은 민가에 살았던 평범한 양민이 기연을 얻어 세운 문파로, 그 기연을 얻은 장소에 문파를 세웠다. 평범한 양민이 산 깊숙한 곳까지 들어갈 일은 없었으니, 발길이 편한 장소인 건 당연지사였다.
초대 각주가 만난 기연은 바로 수룡. 그가 물에 빠진 나무꾼을 구해 주었다. 사실 그 연못은 그리 깊지 않았기에 수룡이 없었다 하더라도 목숨을 잃진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수룡을 온 마음을 다해 섬기며 신당을 지었다. 그것이 수야각의 시작이었다.
수룡의 서식지가 영기가 충만한 영산인 것은 당연지사였고, 그것을 인간과 나눠 쓰는 것은 탐탁지 않을 것이었다. 하나 평범했던 나무꾼이 이 사실을 알 리 없었고, 수룡 또한 선한 숭배에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결국 영기가 충만하고 수룡의 수호까지 받게 된 덕분에 이 땅에는 마가 침입하기 어려워졌고, 침입한다 하더라도 힘이 반감되었기 때문에 수야각의 제자들은 안전 속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다음에 선룡(仙龍)께 제사라도 지내야겠어.”
“제가 대신 감사를 표할게요.”
“아는 사이야?”
“사는 곳은 알아요. 하지만 밖으로 나온 적이 없어 대화해 보지는 못했어요.”
“그렇구나. 그럼 혼례를 치르고 삼배를 올릴 때 가 보자꾸나.”
오래된 인선(人仙)들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하였다. 영물이 비승을 할 때엔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지능을 가진 후이다. 결국 영물이나 인간이나 하늘에 오르면 그렇게 되는 모양이었다.
‘무엇이 그들을 세상을 등지게 만든 것일까.’
청난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런 생각에 잠기기에 적절하지 않았으니. 그러다 문득 백매의 말이 끊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기는 여전히 전해지고 있었다. 청난은 뒤돌아볼 수 없었기에 대신 턱을 들었다.
“매아?”
“아, 아니, 그게… 그…….”
‘음? 왜 갑자기 우물쭈물하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번뜩 무언가가 떠올랐다. 청난은 기어코 몸을 돌려 백매와 마주 보았다. 그 탓에 백매의 손끝에서 전해지던 영기가 목적지를 잃고 허공에 붕 뜨고 말았다. 하지만 청난은 아깝다는 생각을 할 여력도 없었다. 이건 정말 정말, 정말! 중요한 문제였으니까!
설마 이 아이…….
“너… 너지? 그랬지……?”
“무… 무엇이… 말인가요?”
“그곳에 있던 어린 너 말이다. 너였던 것이지……?”
청난은 줄곧 백매가 제 꿈에 간섭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자신을 구해 낸 것이라고. 그래서 그 안에서 나눈 대화만큼은 진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이 ‘삼배’를 입에 올리자 이 아이는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
설마… 설마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청난의 눈동자가 강렬하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