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사제, 사제, 정신 차려 봐. 괜찮아?”
동행했던 막내 사제가 익숙한 목소리에 힘겹게 눈을 떴다.
“으윽… 사형… 괜찮아요. 죽을 정돈 아닌 것 같아요…….”
“그래, 다행히도 괜찮아 보이는구나.”
청난의 청아한 영기가 그의 몸을 살폈다. 다행히 삿된 것이 닿은 흔적은 없었다. 청난은 그에 영기를 나누어 주었다.
“일어날 수 있겠어?”
“으음, 네.”
막내 사제가 청난의 품에서 일어났다. 그가 두 발로 무사히 선 것을 확인하자 청난이 고개를 휘저었다. 그는 일 초가 아까운 사람처럼 다급하게 물었다.
“사제, 그 아이 못 봤어?”
“누구를 말하는 거죠?”
“천영근인 그 아이 말이야.”
“아, 사질이라면 불이 나기 전까진 저쪽 창가에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 사형!”
청난은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바닥을 박차며 화살처럼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러면서도 주변을 살피는 걸 잊지 않았다.
‘뭐지?’
그러던 와중에 한 무리가 한곳으로 헐레벌떡 몰려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청난이 발걸음을 멈추고 그곳에 집중했다. 놀랍게도 출구다. 사람 셋이 겨우 나갈 만한 크기의 출구!
그 앞에는 한 문파의 수장 격으로 보이는 이들이 사람들을 이끌고 있었다. 그들의 옷차림이 중구난방인 것을 보니 자신의 문파만 챙기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청난이 품속에서 빈 부적을 꺼냈다. 그것을 허공에서 세 번 흔드니 새 모양이 되어 방금 전까지 막내 사제와 있던 곳으로 날아갔다. 저 작은 새가 막내에게 출구를 알려 줄 터였다.
‘그 아이는 나간 건가? 그럼 다행인데.’
회장 안의 사람은 점차 빠져나가고 있었기에 전보다는 사람을 찾기에 용이했다. 슬슬 뜨거운 연기가 청난의 품을 달구기 시작했다. 이제까지는 몸 전체에 얇은 막을 쳐 보호했지만, 다른 이들을 도우면서 소모한 영기가 컸다. 자칫 잘못하면 이곳에서 쓰러질 수도 있었다.
“어디 있느냐!”
청난은 다시금 이름 모를 아이를 불렀다. 분명 그의 이름을 알았는데 왜 기억나지 않는 것일까.
“어디 있어!”
그저 반복해서 그를 찾았다. 핏빛으로 붉어진 손은 이젠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가!”
“소각주님!”
청난이 울부짖다시피 소리를 내질렀을 때, 원하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난의 고개가 획 하니 돌아갔다. 그곳에는 그가 찾던 소년이 제게로 달려오고 있었다.
“허억, 헉헉, 소… 소각주님, 제가 출구를 만들었어요. 저랑 함께 가요.”
“네가? 어떻게…….”
“그때 밖에 있었어요. 매개체를 이용해 길을 열고 벽을 부쉈습니다.”
청난은 문파의 술법을 적절히 사용한 그의 설명을 듣고는 화가 나고 말았다.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청난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자 자랑스레 내뱉었던 소년의 입이 움츠러들었다. 그는 작아진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변명했다.
“다… 당신이 여기 있어서… 다치실까 봐…….”
소년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말을 덧붙였지만 발음이 명확하지 않아 뜻을 알긴 어려웠다.
청난은 자신의 이마를 눌렀다. 마음이 급해서 실수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여전히 화가 나는 건 매한가지였다. 그는 최대한 제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난 다치지 않는단다.”
“알아요. 아는데… 그래도 걱정이 되었어요. 그냥 잘 모르겠어요. 당신… 소각주님 생각을 했더니, 올 수밖에 없었어요.”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썹 앞머리가 치켜 올라가며 불안함이 역력해 보였다. 누가 그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청난의 불같던 화는 그제야 누그러들기 시작했다.
“그냥, 그냥 왔어요……. 이젠 절 미워하게 되셨나요……? 이제는 절 바라보지 않으실 건가요……?”
그는 마치 빗속에 버려진 강아지 같았다. 청난은 당황했다. 대체 누가 아이에게 저런 말을 뱉게 만든 것인가. 그런데 그게 본인이다. 내가 화를 냈기 때문에 그가 저런 처량한 말을 하게 된 것이다. 죄책감이 몰려왔다.
“아니, 아니야. 내가 널 왜 미워하겠어? 절대 아니다. 우선 나가자. 그리고 다시 이야기해 보자꾸나. 알겠지?”
“네, 네에…….”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난은 축 처져 있던 그의 손을 들어 올렸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그 순간 그의 몸이 기울어졌다. 눈앞의 모든 움직임이 느리게 보여 청난은 아이가 자신을 밀쳤음을 알 수 있었다. 그 탓에 몸이 뒤집혀 자신의 등 뒤에서부터 검이 날아오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 검은 곧 저를 밀친 소년의 가슴에 박히며 옷을 붉은 선혈로 물들였다.
청난의 두 눈이 커졌다. 그러나 벌어진 입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고 도로 다물어졌다. 여전히 소년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은 탓이었다.
털썩.
소년의 몸이 바닥에 떨어졌다. 멀리서 타다닥 도망치는 발소리가 들렸다. 청난은 그를 쫓을 생각 따윈 들지 않았다. 대신 소년을 안았다.
청난은 손끝이 떨리는 와중에 그의 가슴을 살폈다. 이 검을 뽑으면 그는 과다 출혈로 죽을지도 몰랐다.
“조, 조금만 힘을 내 보렴. 내가 필히 널 구해 주마.”
청난은 그에게 영력을 부었다. 하나 소년이 흡수하는 것보다 주변으로 흩어지는 게 더 많았다. 그것은 청난이 효율적으로 운용할 만큼 제정신이지 못한 것도 있었지만, 이 아이가 받을 힘조차 없는 탓이기도 했다. 그의 작은 입술이 가까스로 열렸다.
“소… 소각주…….”
“아니, 말하지 마. 상처가 벌어질 게다.”
“화내지… 미워하지 말아 주세요…….”
“말하지 말래도.”
“저, 저는 다정한 당신이 좋아요……. 그래서 그랬… 어요. 저, 전 당신을 은애하고 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었어요…….”
청난이 가슴 한편에 몰아넣었던 것이 울컥 솟아올랐다. 청난의 눈가가 물기를 머금었다. 청난은 혼란스러웠고, 그의 입은 또다시 감정을 토해 냈다.
“나는 네 사존도, 아버지도 아닌데…….”
“저는… 저는 당신이… 청난이 나무에 불과하더라도… 그래도 좋아했을 거예요……. 분명히 다정한… 나무셨을 테니까요……. 청난, 당신이 좋아요. 청… 난…….”
“아, 아가, 그러지 마. 그러지 마렴. 날, 날 두고 가지 마. 매아, 이 스승이 잘못했다. 응? 그러지마. 그러지 마…….”
더 이상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고,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방금까지 부둥켜안고 있던 소년은 사라지고, 무엇도 없는 빈 공간에 오직 청난만이 남게 되었다.
청난은 자신이 정체불명의 공간에 홀로 떨어졌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채 그저 한 단어만 반복했다.
“그러지 마…….”
여태 소년을 안고 있던 자세에서 변함없던 청난의 손이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청난이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대신 한 사람은 알았다.
“백매야…….”
“네, 사존.”
익숙한 목소리.
찾고 찾았던 그 목소리.
청난이 고개를 쳐올렸다.
그곳에는 ‘그’가 있었다.
그의 옷은 수야각의 것이 아니었다. 열다섯의 모습도 아니었다. 그는 청난이 그리워하던 그 사람이었다.
청난은 일어서는가 싶더니 그의 목을 와락 감싸 안았다. 누군가 뺏어 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는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굳게 붙잡았다. 곧 백매의 큰 손이 그의 등을 감쌌다.
“사존, 절 아시겠어요?”
“그럼, 그럼. 당연하지.”
“그럼 이제 돌아가요.”
“돌아가? 어디로?”
“집으로요.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요.”
“……그래도 돼?”
“네, 그래도 돼요.”
청난은 자신이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았다. 그의 말에 안도했다. 그가 모든 걸 해결해 줄 것 같았다. 그의 다정함에 온몸을 비비고 싶었다. 청난은 이런 감정을 표현해 본 적이 없었으니, 지금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기에 청난은 그의 목에 고개를 파묻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응, 좋아. 그렇게 하자.”
“좋아요.”
청난은 눈을 감았다. 온몸을 감싸 안는 느낌과 몸이 허공에 뜨는 듯한 부유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구불구불한 실. 아니, 머리카락이었다.
“매아? 매아! 화백매!”
청난은 그를 흔들어 깨우려 했지만 제 몸이 어딘가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청난이 자신의 팔을 돌아보자 그곳에는 우람한 나무 기둥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나무는 청난의 어깨 부근까지 올라와 있었다. 오른쪽도, 왼쪽도, 그리고 다리까지. 마치 자신이 나무에게 먹혀 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나마 가슴 위쪽이 무사할 수 있던 것은 이렇게 백매가 저를 안은 채로 버텨 준 덕분이었다.
“……사존.”
“깨어났구나. 괜찮으냐.”
백매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백매의 눈꺼풀은 얇게 떨어졌다 붙기를 반복하였다. 그는 어쩐지 비몽사몽 해 보였다. 고요히 흘러나오는 음성이 퍽 나른했다.
“사존, 저희 집에 갈까요?”
“응, 좋아. 그렇게 하자.”
백매는 다시 졸린 듯 눈을 감았다. 청난은 이 아이가 이렇게 잠들어 버리는 건 아닐지 걱정되었다. 하나 그것도 잠시, 그는 곧 종이를 찢어 내듯 나무껍질을 북북 벗겨 내었다.
그의 손아귀는 조금의 자비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청난을 끌어안은 반대쪽 손길은 부드러웠다. 만약 청난이 그의 품에서 벗어나길 원한다면 언제든 그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청난의 몸이 나무 기둥에서부터 완전히 떨어졌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허공에 있었다. 그를 안은 백매가 아직 땅에 내려앉지 않은 탓이었다. 청난은 문득 그와 다시 만났던 십 년 전이 생각났다. 그 이후 이 아이는 그때와 같은 법력을 뿜어내지 않았다. 나약한 제 스승을 걱정한 탓이겠지. 때문에 청난은 그와 붙어 지냈음에도 이제야 제 아이가 신선이 되었음이 실감 났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청난이 팔을 뻗어 올렸다. 그의 뒤통수를 감싸듯 손을 대어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러자 백매의 고개가 기울어지며 청난의 손에 기대었다. 청난이 쓰다듬는 동안 백매의 발은 점차 땅 위로 내려앉았다. 이윽고 두 사람의 발이 지면에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