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청난은 술잔을 돌리다가 끝내 마시지 않고 탁상에 내려놓았다.
“상처를 보아하니 몇 년은 된 것 같네요.”
“열 살 때 입은 상이지요.”
“어린아이가 다쳐서 얻은 것인데 어찌 좋은 셈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정도 상처로 차후 목숨을 보전할 수 있다면 좋은 셈이지요.”
“몸의 상처만이 상처는 아닙니다.”
청난은 그리 말하고는 술잔을 집어 들어 단숨에 넘겼다. 술잔을 다시 내려놓자 탁, 하는 짧고 강렬한 소리가 은연중에 퍼져 나갔다.
연화문주는 불쾌한 척했던 낯을 벗어던지고 서글서글 웃음 지었다.
“소각주, 어찌 그리 화나셨습니까.”
“화나지 않았습니다. 그저… 저 홀로 슬퍼할 뿐이지요.”
“저희 문파의 일입니다. 이리 감정적으로 나오시니 문주로서 불편하군요.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싫지 않습니다.”
청난이 그를 마주 보았다.
“당신은 참 다정하시네요. 어째서 양민들이 그리 칭송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제겐 과분한 칭찬입니다.”
“그래서 이제야 당신을 만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아니었더라면 저 또한 당신에게 푹 빠졌을지도 모르지요. 당신의 제자처럼 말이죠.”
청난은 그가 말한 것이 자신과 함께 온 사제를 포함한 수야각의 제자들이라고 생각했다. 수선자가 천영근을 존경하는 것은 으레 있는 일이었기에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아 형식적으로 대답하였다.
“부족한 저를 잘 따라 주니 고마울 뿐이죠.”
“다들 소각주께서는 거짓 없이 선하다고 합니다.”
“그 또한 과찬이죠.”
“당신께선 선의는 보답받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청난이 그의 표정을 살폈다.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연화문주는 홀로 말을 이었다.
“저는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일어나 자신의 자리로 떠나갔다.
만약 그가 조금만 더 참을성이 있었더라면 같은 대답을 들었을 것이다. 선의는 보답받지 못한다. 그저 또 다른 선의가 있을 뿐이다. 다친 제비를 돌봐 주어 씨앗을 받았다면, 그저 선의가 두 번 일어난 것뿐이다. 청난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는 궤변이라 할 수 있었다.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는 법이니. 제비를 돌봐 주지 않았다면 씨앗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보답을 받을 것이라 믿으면 그 또한 족쇄가 된다. 그것은 스스로를 좀먹을 것이다.
저 어린 연화문주는 어떤 선의에 배신당한 것일까. 수선계에 이런 배신은 흔하다. 양민은 수선자들을 구세주로 여기기도 했다. 구원하지 않는 구세주는 악신으로 여겨져 돌팔매질당하는 일도 흔했다.
‘다음에 또 찾아와야겠다.’
그때는 연회 따위가 아닌 그저 친분을 나누고자 말이다.
연화문주는 방금처럼 다른 고가 인사들의 옆으로 가 사담을 나누기를 반복하였다. 그가 찾아간 사람은 대개 청난처럼 자리를 지키며 술 한잔 마시지 않은 자들이었다. 주최자의 세심한 친절 덕분에 결국 그들은 술 한 잔씩은 마실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아무래도 오늘 밤 연화산 아래는 인산인해를 이룰 모양이었다.
어느새 연회의 끝물이 되었다. 늦게 도착한 이들까지 합류하여 이제는 시끌벅적을 넘어 복작복작하기까지 하였다. 청난은 서둘러 돌아가고 싶어졌기에 연화문주가 다시 일어나 술잔을 들었을 때는 내심 환호했다.
어린 연화문주는 또다시 말에 영기를 불어넣었다.
“이제 슬슬 끝을 내야겠네요. 사실 저는 제 아버지이신 전 문주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이렇게 다양한 인재분들을 뵐 기회 또한 없었지요. 아버지께서 이루신 것에 둘러싸여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란 것이 바로 저입니다.”
연화문주의 예상치 못했던 발언에 반응은 극과 극이었다. 대부분의 수사들은 이렇게 호탕하게 과거를 밝힌 것을 극찬하였고, 이어질 포부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일부 수사들, 정확하게 말하면 연화문 장로들은 당황하였다. 사전에 계획하지 않았던, 어린 문주의 치기 어린 발언인 모양이었다.
연화문주는 장로들의 손짓 발짓에도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제게 아버지란 다양한 감정을 갖게 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의 기대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지만 때로는 원망스러웠죠. 그분께 칭찬을 기대하다가도 너무나 역겨워 몸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시시각각 변하는 제 감정이 당혹스럽기만 하였죠.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제 아비 때문이라고.”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몇 명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졌다. 그중에는 청난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곧 회장의 모든 이를 경악하게 만드는 발언이 이어졌다.
“그래서 결국 원인을 없앴는데, 성에 차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너… 너……! 이 패륜적인……! 언제부터 연화문이 이리 야만적으로 바뀌었습니까!”
“아닙니다. 문주께서 부친을 잃은 충격으로 정신이 온전치 못하십니다.”
혼란이었다. 수선계에서 효는 목숨보다 중한 것이었으니 당연한 반발이었다. 연화문의 장로들은 뒤늦게 자신들의 문주를 변호하러 나섰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문주를 달래러 간 이들이 순식간에 불에 타올랐기 때문이었다.
불은 검붉었다. 불이라기보단 피처럼 보였다.
협의에 찬 이들이 연화문주에게 달려들었지만, 곧 불의 장벽이 길을 막아섰다. 그 너머에서 태연한 연화문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생각해 보니 제가 아직도 아비의 것들에 둘러싸여 있어 그런 것 같습니다. 그가 이어 온 문파, 그 문파의 명성. 이것들은 제 것이 아니니까요. 부디 이로써 악몽이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제정신이오? 문주 혼자 여기 있는 사람들을 상대할 생각이오?”
“제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상대할 건 불길이지요. 제 아비는 절 보면 쓰레기라는 말만 반복했지요. 쓰레기가 여러분들을 모실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래서 명계의 불을 빌려 왔습니다. 잘 쓰고 돌려줘야 하니 반항하지 말아 주십시오.”
“명계의 불……!”
여기저기에서 괴로운 탄성이 흘러나왔다.
삼계는 신선계, 인계, 명계를 지칭하는 말이다. 고로 명계의 존재는 분명하나, 그 누구도 가 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였다. 당연했다. 명계의 주민은 망자이니, 어떻게 말을 전하겠는가.
하지만 명계의 것들은 종종 세상에 나오곤 하였으니, 그것이 요마귀괴의 시초다. 그곳에서 나온 것 중에서 삿되지 아니한 건 없었다. 연화문주가 이토록 자신만만하니, 이 불은 삿되며, 또한 강력한 게 분명했다.
불길은 순식간에 번져 출구를 막고 말았다. 그 때문에 도망치려던 수사들 또한 순식간에 재가 되어 사라졌다.
“크아아아아악!”
“크아아악! 사, 살려 줘! 오지 마!”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그리고 이 속에서 연화문주의 기척은 점점 옅어졌다.
‘뒷문이 있었나.’
청난의 발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명계의 불? 그래 봤자 불이었다.
청난은 오만한 면모가 있었다. 그만한 실력이 있었기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청난이 손가락을 엮으며 수인을 맺자 그를 중심으로 기온이 낮아졌다. 그의 손동작이 한 번 더 바뀌자 체감이 될 정도로 열기가 약해졌다. 불은 꺼지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열기로 인한 혼란은 잠재울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양 손바닥을 마주 대자 허공에 물줄기가 생기더니 사람들 머리 위로 쏟아졌다.
“뭐 이 XX!”
곳곳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하나 찬물을 뒤집어쓴 이들은 금세 태도를 바꾸었다. 어린 제자들을 보호하고 한곳에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청난은 불기둥 뒤에 숨은 연화문주를 발견할 수 있었다.
청난은 곧장 그를 덮쳤다. 그 순간 그는 알 수 없는 기시감을 느꼈다. 이 익숙한 느낌에 신경을 쏟기엔 지금의 현실이 매우 급박했다.
청난의 두 손이 연화문주의 손목을 바닥으로 짓눌렀다.
“불을 거두세요.”
“하하. 소각주, 연화문엔 언제 진법을 설치하신 겁니까?”
“방금.”
“하… 정말 천재십니다.”
“당신은 악인이고.”
청난은 보기와 달리 손힘이 강했으며, 덮치는 순간 그의 영맥을 짓눌렀다. 연화문주는 버둥거렸으나 빠져나올 순 없었다.
“이 정도로 날 해칠 수 있다 생각했나요? 지금 불을 거둔다면 당신의 사정을 생각해 구명 길은 열어 드리겠습니다.”
“소각주께는 소용없을 줄 알았습니다. 가장 뛰어난 수사, 반선이시니까요.”
“그럼 왜…….”
“허나 당신에게만 소용없을 테죠. 다른 사람들은 반선이 아니잖아?”
연화문주의 입꼬리가 기이하게 올라갔다. 그 순간 청난의 등 뒤쪽에서 불길이 솟구치며 천장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사방이 불로 가득 찼다.
“사존!”
어느 젊은 수사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모르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청난은 이미 불기둥 따위는 무시한 채 달려가고 있었다. 그의 뒤편에서 연화문주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다 죽을 거예요. 저도, 다른 이들도. 오직 당신만이 남을 거예요! 하하하하!”
청난은 누구를 불러야 할지, 무어라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딨느냐!”
그저 불 한가운데에서 누군지도 모를 이를 애타게 찾았다. 아무리 눈동자를 굴린들 무엇 할까, 그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그럼에도 청난은 멈추지 않았다.
누군가 기둥에 깔려 있으면 제 손이 화상 입는 한이 있어도 구해 내었다. 깔렸던 이가 누군지 확인하면 안심과 실망이 동시에 찾아왔다. 몸에 불이 붙은 소년을 향해 뛰어가 자신의 옷으로 불을 꺼 주었다. 다행히 명계의 불이 아닌 높은 기온으로 생긴 평범한 불인 덕분에 소년을 구할 수 있었다. 그 또한 청난이 찾는 이는 아니었다.
청난은 그렇게 사람을 구했다. 그의 값진 옷은 너덜너덜해졌고, 화려한 장신구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곱게 손질된 머리카락은 엉망이 되었다. 그럼에도 청난은 한시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상처 입고 쓰러진 이를 뒤집었을 때, 드디어 그가 아는 얼굴을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