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124화 (124/146)

#124

이야기는 금세 일과 관련된 것으로 넘어갔다. 연회에 선물을 챙겨 갈 것인지, 누구와 동행할 것인지. 그런 이야기는 수야각의 어느 건물이 낡았다더라는 이야기로 발전했고, 어떤 장인을 고용할 것인지로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하지 못했던 말이 짐이 되어 청난의 마음을 짓눌렀다.

‘신선이 되면 외로울 테니까요.’

모두가 저를 보며 신선이 될 것이라 추앙했다. 청난 또한 제 의지로 수선자가 되었다. 하지만 청난이 되고 싶은 게 신선이었나. 회평의 손을 잡았을 때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이제는 기억나지 않았다.

수선자가 먼 길을 갈 때는 대체로 검을 타고 날아간다. 막 입문하여 배움이 짧은 게 아니라면 십중팔구 그러했다. 하지만 수야각의 짧은 행렬은 하늘이 아닌 땅을 타고 나아갔다. 디그닥 디그닥 말발굽 소리만이 이어졌다. 며칠째 산행이 거듭되고 있어 지친 탓이었다.

“새 연화문주는 미친놈이랍니까?”

청난의 사제가 정적을 깨고 투덜거렸다. 이 사제는 수선 성과가 깊지 못했으나 대신 상업적 기질이 뛰어나 수야각의 자금을 맡아 사시사철 장부를 들여다보는 게 제 업무였다. 그 때문에 움직임이 둔해졌고 이렇게 말을 타고 이동하는 것은 그에게 큰 고역이었다.

“부임 초기이니 기선 제압을 하고 싶은 거겠지.”

“아무리 그래도 연화산 상공을 날지 말라니. 그럼 그렇게 산중에 처박혀 있지나 말든가!”

“사제,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들으라고 해요, 해! 아이고 나 죽네. 제가 죽으면 우리 애들 누가 먹여 살린답니까. 다들 돈 펑펑 쓰다가 쫄딱 망해 버릴 게 분명할 텐데.”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돌아가면 사형이 좋은 보약을 지어 줄 테니 그걸로 마음 풀어. 응?”

“약속했습니다? 이랴차!”

그는 그리 말하고는 말의 엉덩이를 차며 힘껏 내달렸다. 그는 청난의 항렬 중 가장 막내였다. 어릴 때부터 어리광을 받아 주었더니 사질들이 없을 때면 예전 버릇이 나오곤 했다.

다만 오늘은 사질이 없지 않았다. 청난은 말의 속도를 늦추어 행렬의 끝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천영근인 그 아이가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고 묵묵히 말을 타고 있었다. 청난은 그에게 물주머니를 건넸다.

“사질이 고생이 많아.”

“아닙니다.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인걸요.”

이번 행렬은 인원수가 별로 많지 않았다. 소각주 진청난이 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체면을 살려 준 것이니, 과한 것은 되레 얕보일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같은 이유로 처음에는 이 아이도 일행에 포함되지 않았다. 하지만 출발하기 직전에 그가 찾아와 요청했다.

“또래의 고수를 만나 보는 건 좋은 경험이지. 좋은 선택이었다.”

“감사합니다.”

아이가 고개를 숙였다. 청난은 그와 대화를 이어 갈 심산으로 행렬의 뒤로 온 것이었는데, 아이가 고개를 다시 들지 않았다.

‘내가 불편한가 보네…….’

청난의 손끝이 싸늘해졌다. 그를 질투하는 사람은 있어도 이렇게 피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토록 답답한 것이겠지. 청난은 그리 마음을 정리하고는 죄 없는 후배를 괴롭히지 않고 다시금 앞쪽으로 이동했다.

청난은 이동하는 간간이 그 아이가 신경 쓰였다. 하나 그는 청난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니 아무리 청난이라도 마음에 생채기 하나 안 나긴 어려웠다. 결국 청난은 죄 없는 사제를 붙잡아 종일 이야기꽃을 피웠다.

연화문에는 생각보다 많은 유명 인사들이 모여 있었다. 심지어 이 중 몇 명은 관아의 관리로 보였다. 수선계라 불리고는 있으나 어쨌든 나라에 속한 대지 위에 자리한 문파이니 어느 정도 관아와 엮이는 것은 새삼스러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공개적인 자리에 초대를 하다니. 새 연화문주의 생각을 좀처럼 예측하기 어려웠다.

화려함의 대가인 연화문답게 연회는 시끌벅적하였으며, 식사며 술이며 오가는 선물까지 모든 것이 호화스러웠다. 청난은 시끌벅적한 것은 좋아하지만 아첨꾼은 싫어했다.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다가오는 인사들을 모조리 사제에게 넘기자 눈치 빠른 이들은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눈치 없으면 이 자리에 못 있겠지.’

각 계통의 문파들은 수장 격인 문파의 특성을 닮는 경향이 있었다. 연화문의 연회인 만큼 대부분이 화 계통의 문파들이었고, 당연하게도 대부분이 정치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런 정치가 같은 수선자들의 수장인 연화문주는 시작할 때 받아 둔 술잔이 식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것이 당연한 양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허수아비 문주인가.’

재능과 혈통을 핑계로 어린애를 문주 자리에 앉혀 놓고 그의 친인척이 손안에서 주무를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그 작자도 이곳에 있을 터. 청난이 연회장을 흘겨보던 때에 북소리가 들렸다.

둥, 둥, 둥.

“연화문주께서 들어오십니다.”

문지기의 우렁찬 목소리에 회장의 시선들이 한데 모였다. 육중한 문이 활짝 열리고 그 사이에서 걸어 들어오는 것은 예상한 대로 앳된 얼굴.

그는 연화문의 수장 자리와는 어울리지 않게 아무런 장신구도 하지 않은 단조로운 복장을 하였다. 그의 분위기가 음침한 것은 길게 풀어 헤친 머리카락 탓만은 아니었다. 아무런 표정도 담지 않은 무심한 낯. 그가 턱을 살짝 들어 주변을 흘겨보았다. 그는 정적을 즐기듯 타박타박 곧장 걸어가 회장의 가장 높은 곳에 털썩 앉았다.

“오만하군…….”

누군가가 말했다. 그에 긍정하듯 웅성거림이 생겨났고, 그것은 얘깃거리가 되어 또다시 연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연회의 주인공임에도 어린 연화문주의 존재감은 잠시 반짝하였다가 사라졌다. 그럼에도 본인은 전혀 개의치 않아 보였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의 가장 가까이에 있던 중년 남성이 얼굴을 구긴 채 속닥거리자 그가 고개를 까딱였다. 곧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흩어졌던 시선이 다시금 모여들었다.

“이 못난 후배를 위해 한달음에 와 주신 수선자 여러분께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영력이 담긴 목소리가 회장 안을 가득 메우자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그는 형식적인 말을 몇 줄 읊어 갔다. 그것을 들으며 청난은 생각했다.

‘사존께서 오셨으면 엄청 놀리셨겠어.’

너보다 더한 늙은이가 생겼다면서.

어떤 어른이 대본을 써 주기라도 한 것일까. 그의 말투는 어린 나이에 비해 성숙했다. 좋게 말하면 연륜이 느껴지는 것이고, 속되게 말하자면 세상 다 산 노인장 같았다. 마치 세상에 아무런 한도 없는 사람 같았다. 그래서인지 청난은 그가 신경 쓰였다.

‘천영근들은 서로 끌리는 게 있나.’

한 세대에 여럿의 천영근이 태어난 적은 몇 없었고, 대체로 문파에서 끼고 사는 탓에 서로 만나는 일도 드물었기에 청난의 의문은 어디서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하나 상관없었다. 가끔씩 찾아오는 심병처럼 이것 또한 그러려니 하면 되었다.

연회가 어느 정도 무르익었을 무렵, 어린 연화문주가 청난을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술병이 들려 있었다.

“소각주께서 와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문주께서 절 알고 계시다니 영광입니다.”

“사실 뵌 적이 없어 한눈에 알아보진 못했습니다. 다른 이들과 달리 자리를 지키시길래 시비에게 물어보고서야 그 유명하신 초무검이신 걸 알게 되었죠. 이렇게 후배의 견문이 좁습니다. 선배께선 부디 노하지 마십시오. 대신 술 한잔 올리겠습니다.”

“인사 한 번 드리지 않아 부끄러울 뿐입니다.”

청난의 술잔은 처음 받은 그대로였다. 연회의 주인공이 주는 술을 거절하는 행위는 적절치 않을 듯하여 청난은 원래 담겨 있던 술을 단숨에 마시고 그에게 새로운 잔을 받았다. 어린 연화문주는 앉아도 되냐는 청도 없이 자연스레 청난의 옆에 앉았다.

생각하면 이곳 전부가 그의 것이니 딱히 묻지 않아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연화문주가 품위가 느껴지는 몸짓으로 상 위의 다과를 집었다. 그러자 그의 손목과 손등을 덮은 화상 자국이 드러났다.

“어릴 때 화상을 입었습니다.”

그는 청난이 묻지 않았는데도 그의 의문을 풀어 주었다. 그는 머쓱하게 소매로 손등을 덮었다.

“연화문 사람이 화상이라니, 조금 우습지요.”

“저희 제자들 중에서도 물에 빠지는 이들이 종종 나옵니다. 어쨌건 사람 아닙니까.”

“그렇지요. 사람이었죠…….”

그가 억지로 올린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그는 힘없이 말끝을 흐리는가 싶더니, 느닷없이 새 장난감이 생긴 아이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참, 소각주님, 그거 아십니까? 제가 이 화상을 얻은 날 제 영력이 눈에 띄게 상승했습니다. 하하하, 화상으로 영력을 얻었으니 좋은 거래를 한 셈이 아닙니까.”

그는 꽤 신이 나 보였다. 이렇게 상대가 기분이 좋다면, 심지어 그의 직위가 높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기분에 맞추려 신난 체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청난은 그러지 않았다. 청난은 되레 차갑게 식어 갔다.

“아니지요.”

“흠, 아니란 건가요? 연화문의 모든 장로가 그렇게 말합니다. 아주 잘되었다고. 그런데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청난이 거침없이 대답하였다. 연화문에 객으로 와 연화문을 욕하는 자가 몇이나 될까. 청난은 이것이 좋은 행보가 아님은 알았다. 하지만 어쩌랴. 아닌 건 아닌 것이다. 그가 묻지 않았다면 모를까 청난은 거짓된 답을 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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