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그의 표정이 어리숙한 탓일까. 경계심은커녕 되레 걱정이 되었다. 정황을 따지면 그는 자객일 확률이 높았다. 적어도 자신에게 선물을 주러 온 것은 아니겠지. 하나 청난은 그가 어떤 암기를 숨기고 있을지보다는 길이 정리되지 않아 울퉁불퉁하다는 것만이 신경 쓰였다.
청난은 정리에 소질이 없었고 그의 대제자는 성별이 달라 처소에 들이기 불편하였다. 때문에 그의 처소에는 경공이 자유로운 청난 자신과 종종 찾아오는 주국만이 오갔다. 예전에는 주기적으로 정리하였는데, 최근 바빠진 사이에 풀이 무성하게 자라 버렸다. 그 탓에 현재에는 어린 제자들의 출입을 금지하기까지 했다.
청난의 말속에서 의도를 깨우친 그가 다급하게 대답했다.
“저는… 내일 입산하기로 한 제자이온데, 어쩌다 보니 이르게 도착해 버렸습니다. 객방을 안내받기는 하였는데, 잠이 오지 않아서… 한데, 길에 어두워 헤매다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대문에 계신 분이 제 신분을 증명해 주실 수 있을 거예요. 저는 수상하거나 이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또박또박 잘 말하다가 말끝에 힘이 빠지기 일쑤였다.
“아, 혹시 온다던 외문 제자가 아가였니?”
“어, 아… 음…….”
“아.”
청난은 자기도 모르게 그를 습관대로 부르고 말았다. 그는 낯부끄러운 호칭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쭈뼛거렸다. 청난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지만 이제 와 정정한다면 분위기가 더욱 이상해질 것 같았다.
그렇게 정적이 흐르고, 잠시 후 ‘아가’가 눈동자를 굴리며 간신히 대답했다.
“네, 맞아요. 이번에 아버지와 함께 본산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실수를 모른 척해 주니, 아니 모른 척이라기엔 이미 많은 반응이 있었지만… 어쨌든 이렇게 넘어가 주었으니 청난 또한 그렇게 부른 적이 없는 척하기로 했다.
“공자의 방은 저쪽입니다. 이쪽은 제 처소뿐이죠. 다시 헤매실지도 모르니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아이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심지어 그는 땅에 심어진 양, 양어깨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청난은 그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으나 그의 고개가 영영 사라져 버릴 때 소리 내어 웃지 않도록 입을 꽉 다물었다.
다음 날, 청난은 눈을 뜨자마자 그 아이가 떠올랐다. 청난은 아침잠이 많았는데 오늘만큼은 눈이 번쩍 뜨였다. 오늘 그 아이가 정식으로 입문할 터였다.
새로운 제자를 맞이할 때에는 모든 제자가 모이는 것이 전통이었지만, 그는 새 제자라 칭하기엔 애매하기도 하였고, 뭣보다 이미 다양한 시선을 받고 있었기에 아이를 위해서 그런 절차는 생략하기로 하였다. 대신 그를 가르치게 될 스승들과 인사하는 소모임이 열릴 예정이었다.
청난이 강당에 들어섰을 땐 이미 다른 사형제들이 모두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아이를 신경 쓰던 청난만큼이나 다른 이들도 천영근의 새 제자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청난은 간단히 목경례하며 먼저 온 스승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앞에 놓인 탁상에 소소한 요깃거리가 채워질 즘에 마지막으로 강당의 문이 활짝 열렸다.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것은 두 사람이었다. 한 명은 지난밤의 그 미소년이었고, 다른 한 명은 청난과 비슷한 연배의 수사였다. 그들의 외형은 조금도 닮지 않았는데, 저벅저벅 들어오는 걸음걸이는 거울에 비친 것처럼 닮아 있었다.
“…….”
청난은 그 아이에게 손 인사를 하려고 들어 올렸던 오른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어쩐지 자신은 그럴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국이 그런 청난을 흘겨보았다. 평소와 다른 모습이 신경 쓰였으나 그것은 주국이기에 알아차릴 수 있던 미세한 변화였다. 지금 일어나면 불필요한 주목을 받게 될 뿐만 아니라 이 모임의 주인공들에게도 실례였다. 주국은 어쩔 수 없이 욕구를 참고 다음을 기약하였다.
이후로 형식적인 모임이 진행되었다. 식사를 나누고 형제의 잔을 나누었다. 그렇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모임이 끝났다.
그 아이는 전처럼 제 스승과 수련에 임하지만 다른 수사들이 간간이 돌봐 주기로 하였다. 그 아이에게 붙은 청난의 시선은 모임 내내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요즘 자주 멍하구나. 누굴 그렇게 봐?”
주국이 청난의 시야를 따라 창밖을 보았다. 그곳에는 막내 사제와 가르침을 받는 어린 제자들이 있었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광경. 그나마 특이점을 찾는다면 몇 달 전 들어온 천영근의 제자일 터이다. 지금은 휴식 시간인지 그는 제 스승이자 아버지인 자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청난이 시선을 돌려 주국을 보자 주국 또한 재미없는 광경에서 시선을 떼고 청난을 마주 보았다.
“그냥 눈길이 가서 보았습니다. 저들은 늘 함께 있네요.”
“듣기론 스승이 병약하다는구나. 그러니 제자 된 도리로서 알뜰히 살필 수밖에.”
“그렇군요.”
청난의 대답은 덤덤하였지만, 그가 일부러 그런 척하고 있음을 모를 주국이 아니었다. 주국은 다시금 재미없는 광경을 흘겨보았다. 그가 무엇을 신경 쓰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같은 천영근으로서 동지애라도 느끼는 걸까.
“그나저나 연화문에 가 보겠다고?”
“네. 새로운 문주를 위한 환영 연회를 한다고 하네요.”
“그깟 문주가 바뀌었을 뿐인데 굳이 네가 가야 하느냐?”
“하하……. 형님, 다른 사람이 들으면 큰일 날 소리는 말아 주세요.”
“나는 상관없다.”
“저는 상관있는걸요.”
청난은 허허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그는 천천히 차를 음미하며 남몰래 전음을 날렸다.
-석연치 않아요. 연화문주가 불에 타 죽었다니.
주국 또한 다과를 집어 먹으며 답했다.
-가소롭지. 하지만 연화문은 예로부터 그랬지 않았느냐. 외인인 우리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야. 아니면 새 문주가 어려서 마음이 쓰이는 게냐?
-…….
-난아, 그러다 네가 하산하고 보육원을 하겠다고 하는 건 아닐지 이 형은 염려스럽구나.
“하, 하, 하…….”
청난이 시선을 회피하며 책을 읽듯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는 주국의 눈치를 살피다가 이내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제 가족을 두고 어디 가겠어요? 그저 알 수 없는 의무감이 들어요.”
“의무감이라니?”
“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해야 할 걸 하지 않아 벌어진 일 같습니다. 하하하, 형님. 그리 굳어지지 마세요. 그저 꿈자리가 안 좋아 뒤숭숭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새 연화문주는 이제 열넷이에요. 문주가 그토록 어리니 연화문은 혼란기일 테죠.”
“흠, 그럼 감히 널 해코지할 수도 없긴 하겠구나.”
“하하하, 형님께서 언제나 과하게 평가해 주시니 청난은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무어가 과하단 말이냐? 넌 신선도 될 터인데.”
“결국 못 되었잖아요.”
“응? 뭐가 말이냐.”
“아… 아닙니다. 헛꿈을 꿨더니 여태 이러네요.”
오 년간 이런 기이함이 꼬리를 물고 따라다녔다. 첫 한두 해는 원인을 알기 위해 고군분투하였지만, 의원을 찾아가도, 저주에 능통한 사형을 찾아가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포기하고 체질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어디 크게 아픈 것도 아니고, 종종 헛말을 뱉을 뿐이니까.’
가끔 찾아오는 가슴 통증도 위협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더구나 지난 오 년을 돌이켜 보면, 통증이 올 때는 주로 차를 마시거나 경관을 보는 것처럼 편안할 때이지 삿된 것을 상대할 때는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생활에 지장은 없었으나 이것을 누군가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사 년 전 찾아간 사형에게도 착각이었다고 말해 두었다. 수야각 소각주가 이런 심병이 있는 걸 안다면 본각의 위상이 떨어질 테고, 다른 이들에게 알려 봤자 해결 방안이 생기는 것도 아니니 굳이 말해 걱정을 늘릴 필요도 없었다.
청난은 반쯤 변명으로 헛꿈을 지어냈다. 비승한 순간 누군가 발목을 잡았다고. 광경을 떠올리면 다소 우스운 장면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진청난의 창의력은 술법을 창조할 때만 튀어나왔다.
주국은 진지하게 듣더니, 진지하게 물어 왔다.
“그래, 신이 되지 못해 억울하더냐?”
“음…….”
생각지 못한 물음에 청난은 말문이 막혔다. 애초에 그런 꿈을 꾼 적도 없었고, 그런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어렴풋한 기분은 느꼈다.
“그렇진 않았어요. 대신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 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누군가?”
“네. 누군가 제 곁에 있었는데…….”
헛꿈은 분명 지어낸 것인데, 청난은 어떤 장면이 어슴푸레 떠올랐다. 아니, 장면이라 부르기에는 ‘누군가’밖에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뿌옇게 보인 탓에 누군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그가 울고 있구나, 우는 것을 넘어 울부짖고 있구나, 그런 것만 알 수 있었다.
그 울음소리는 귀를 찢을 듯한 비명에 가까웠다. 청난은 그 소리가 멈추길 바랐다. 듣기 싫어서가 아니었다. 파도처럼 강렬한 슬픔이 목구멍을 가득 메웠기 때문이었다. 그 탓에 하고자 했던 말도 채 다 하지 못했다.
“전 그 사람은 신선이 안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자가 네 발목을 잡은 자냐?”
“아니요. 그자는 떨어진 절 보고 속상해했어요.”
“그럼 왜 그렇게 생각했느냐?”
“그건…….”
청난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태어났을 때부터 말보다 행동이 빨랐고, 생각하는 것보다 말이 더 빨랐다. 그렇기에 지금도 생각을 거쳤다기보단 감정이 시키는 대로 입에서 뱉어 낼 뿐이었다. 그 탓에 이것이 말해선 안 될 벽 너머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하하, 잘 기억이 안 나네요.”
청난은 찻잔을 돌리며 딴청을 부렸다. 주국은 제 동생이 정말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지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렇구나. 그럼 잊어버려라.”
“네, 그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