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청난은 알 수 없는 감정을 품은 채 고민하였다. 그 모습이 퍽 심각해 보이자 주국이 걱정스레 물었다.
“왜, 신경 쓰이는 게 있어?”
“아니, 그건 아니에요. 저 아이는 훌륭해요. 다만… 음, 제가 준비가 안 된 것 같네요.”
“아? 오늘을 고대하지 않았느냐?”
“그래, 이럴 때 임무가 있다며 이 스승을 탓하기도 했잖느냐.”
회평이 투덜댈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마디 거들었다. 주국은 차마 스승의 말을 끊을 수 없어 묵묵히 끝까지 기다렸다.
“긴장했구나. 아이들을 좋아하는 만큼 긴장하였겠지. 그래, 너답구나.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네가 힘들다면 내가 있고, 또 각의 다른 사형제들도 많잖으냐.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될 사안이나, 너무 부담 갖지 않아도 된다. 그러기 위한 문파가 아니냐. 이번을 놓치면 다음은 꽤나 오래 기다려야 할 것이야.”
주국이 이렇게 사근사근 달래니 회평은 더 이상 투덜댈 수 없었고, 청난 또한 거절하기 어려웠다. 결국 청난은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 말이 맞습니다. 청난이 걱정이 과했네요.”
이제는 무를 수도 없었으니 더 이상 미룰 이유가 있겠는가. 청난은 내친김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존, 형님, 제가 어여쁜 제자를 들이고자 하는데 부디 거절당하지 않도록 빌어 주십시오.”
“누가 널 거절하겠어? 놀러 온 게 아닌 이상 그럴 리 없다.”
청난은 주국의 덕담을 안고 정자를 내려갔다. 청난의 발이 땅에 닿자 마치 조명을 켠 것처럼 온 시선이 집중되었다. 청난의 등 뒤에서는 참았던 사형제의 한숨 소리와 함께 다음 산문이 열릴 날을 기약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청난은 오직 한 사람만 보이는 것처럼 거침없이 나아갔다. 그리고 여자아이에게서 한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에서 멈추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직 스승이 없다면 내게 기회를 주겠니?”
아이는 청난의 기세에도 아랑곳 않고 또랑또랑 대답했다.
“소녀가 견문이 좁습니다. 부디 선사의 성명을 알 영광을 주시겠어요?”
“하하, 좋아. 좋아. 내가 실수했구나. 내 성은 진, 이름은 청난이다. 본각에서 소각주의 위치에 있지.”
소녀는 조금 놀란 듯해 보였다.
청난은 이어서 ‘내가 널 보살펴 줄 테니 네 이름을 알려 내 위상을 높여 주어라.’라고 말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예상치도 못하게 어린 소녀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말았다.
“소녀가 기상을 펼쳐 사존의 이름을 드높이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당당하여 패기로웠다. 청난은 그녀의 반응이 예상했던 것과 정반대의 것이라 순간적으로 당황하고 말았다.
‘왜 이 아이가 수줍어할 거라 생각한 거지?’
처음 만난 아이가 분명한데 어쩐지 이 장면이 잘못된 것 같은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하나 아이에게 티를 낼 수 없는 법. 청난은 얼떨떨한 감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마음 한구석에 몰아넣었다.
“사존, 제자를 안내해 주세요.”
이 똑똑한 아이는 스승을 섬기게 된 아이들이 이동한 것까지 눈여겨봐 온 모양이었다. 청난이 멍하니 있자 그를 재촉하는 대범함까지 가지고 있었다.
“아, 그래. 가면서 내가 설명해 주마.”
청난은 움직이는 동안 아이에게 간단한 사항들을 알려 주었다. 수야각은 네 집이 될 테고, 네 가족이 생길 것이란 그런 말들. 그러면서 또 다른 생각을 하였다.
‘내가 사매를 데려온다고 했던 것 같은데……. 누구에게 그랬지. 초하였던가.’
청난은 스승들이 있는 정자를 힐끗 보았다. 몇 번을 세어 봐도 그곳에는 있어야 할 사람이 모두 있었다. 그것이 의아했다.
“외문 제자가 본각에 들어온다니, 예의 그 아이인가요?”
“맞다, 그 아이야.”
수야각주의 집무실. 이곳에는 늦은 업무를 하고 있는 유회평, 그리고 그의 탁상 맞은편에는 진청난, 진주국 두 제자가 앉아 있었다.
한 외문 제자가 본각에 들어와 수련하게 되었다는 소식은 현재 수야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주원인이었다. 그가 누군지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않았기에 제자들은 삼삼오오 모여 그의 정체를 추론하곤 하였다. 하나 대부분은 그가 누군지 짐작하고 있었다.
외문 제자가 내각에 들어오는 것은 이례적이었다. 그럼에도 왈가왈부하기 어려운 것은 그 당사자가 이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그가 수선대가에 알려지지 못하고 외문 제자가 된 것이냐며 통곡할 뿐이었다.
이 사실은 산 아래에도 흘러 들어가 종종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안줏거리가 되곤 하였다. 주국은 그 가벼운 입들이 지껄이는 말이 맘에 안 들었다.
“본각에서 재능에 차별을 두어 제자를 가로챈다며 악담을 퍼붓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거야 어쩔 수 없지. 따지자면 사실 아니더냐.”
회평이 가볍게 대꾸하자 주국은 더욱 심통스럽게 대답했다.
“외문 각주가 먼저 청한 일인데 마치 저희가 뺏은 모양새가 되지 않았습니까.”
“소문이란 게 그렇지. 누가 천영근인 제자를 포기하겠느냐? 누구나 할 수 있는 결정이 아니니 의심하는 것이지. 들어 보니 스승보다는 아비에 가까운 관계라 하더구나.”
“맞아요. 참 효심 깊은 아이죠. 그래서 의외라 생각했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청난이 대꾸했다.
“잘 알고 있구나. 아는 아이냐?”
“어…….”
주국의 물음에 청난은 말문이 막혔다.
‘난 그 아이를 만나 본 적도 없는데 왜 그렇게 말했지?’
요즘 들어 종종 이런다. 올 사람도 없는데 아침에 멍하니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본 적 없는 것을 아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했다.
‘내가 뭐에 씐 건 아니겠지?’
수선자를 노리는 요마귀괴가 많다고는 하나 이곳은 수야각이고 자신은 소각주였다. 어느 간 큰 것이 저를 노릴까.
결국 피곤한 것이라 결론지은 청난은 두 사람이 걱정하지 않도록 변명하였다.
“생각해 보니 다른 아이와 헷갈린 것 같네요. 모르는 아이입니다.”
“그렇구나. 그럼 내가 알려 주마. 곧 올 텐데 너희는 알고 있어야지.”
회평이 설명을 이었다.
그는 부모가 없는 고아로, 외문의 각주가 길거리를 떠돌던 그를 제자로 삼았다고 한다. 동네 문파 수준의 작은 곳으로 마을과의 교류가 잦았는데, 마을 주민들이 그 아이를 외문각주의 수양아들이라 알고 있을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그 각주는 어린아이에게 혹독한 수련을 시킬 수 없어 간단한 것들만 알려 주었다. 그러다 어느 날, 그 아이는 우연히 지나가던 고명한 수선자의 술법을 보았고, 그것만으로 깨달음을 얻어 일취월장하였다. 그는 천재 중의 천재였다.
고명한 신선은 즉시 아이의 영근을 살펴보았고, 귀한 천영근임이 그렇게 밝혀졌다.
“그 아이의 이름은 ……이라고 한다.”
“그렇군요.”
“사존, 방금 뭐라고 하셨죠?”
“그 아이의 이름이……. 아니, 청난아. 어디 안 좋은 게야?”
청난이 이마를 짚었던 손을 놓았다. 애써 웃는 낯에는 찡그렸던 흔적이 얼핏 엿보였다. 방금 전 청난은 강한 두통을 느꼈다. 귓가는 솨아아, 솨아아, 마치 태풍을 생각나게 하는 이질적인 소음으로 가득 찼었다. 잔병치레조차 겪은 적이 없는 그이건만 이것은 무슨 현상인 걸까.
“아, 아니에요. 제가 요즘 무리했나 봐요.”
“사존, 저와 난이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혼자 갈 수 있어요. 어차피 수야각 안인데 위험할 게 있겠나요. 제 걱정은 마시고 사존의 고역을 덜어 주세요.”
“그리 말해 주니 고맙구나. 네 형마저 없다면 내 분명 골머리가 썩어 문드러져 버릴 게야.”
“…….”
이렇게 동생과 사존이 합의를 보았으니 주국은 반대하기가 어려워졌다. 주국은 살짝 떼었던 엉덩이를 도로 내려놓아야 했다. 그 모습까지 본 청난은 그제야 포권을 하며 물러났다.
집무실에서 보낸 시간이 긴 것 같진 않았는데, 어느새 밖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밤하늘에 우뚝 솟아오른 달은 선명하게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가다 넘어질 걱정은 없겠네.’
청난이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코끝을 간지럽히던 매화 향은 점차 짙어졌다. 청난의 거처에는 오래된 백매화나무가 있었으니 제 방에 거의 다 왔다는 증거였다. 이 향을 맡고 있으니 어쩐지 두통도 점차 옅어지는 것 같았다. 평소에도 매화 향을 좋아하였으니 청난은 이 향을 만끽하기로 했다.
청난이 눈을 감았다. 늘 다녔던 곳이었기에 굳이 보지 않아도 헤맬 걱정은 없었다. 시야가 사라지니 향은 더욱 짙어졌다. 청난은 매화 향에 취해 마냥 걸었다.
퍽!
청난은 무언가와 부딪쳐 중심을 잃고 말았다.
“아, 죄송합니다. 사람이 오는 줄 몰랐습니다.”
청난은 자신이 누군가의 손에 받쳐지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번쩍 몸을 일으켰다. 눈 깜박할 사이에 소각주로서의 위엄을 되찾은 청난은 이런 곳까지 들어온 이가 누구인지 살펴보았다.
마침 달빛을 가리던 구름이 떠내려간 것인지 다시금 내려앉은 빛이 그의 이목구비를 비추었다.
그는 대충 열다섯 정도 되어 보였다. 날카로운 눈매는 고아했으나, 턱선에는 여린 앳됨이 남아 있었다. 또한 키가 컸으며 어깨가 넓었고, 옷 위로 드러나는 선이 다부진 몸매를 가지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청난은 이런 미소년을 알지 못했다.
그는 청난을 걱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들킨 자신의 처지를 걱정하는 것인지 어쩔 줄 모른 채 안절부절못하였다. 청난의 손이 천천히 다가갈수록 그는 눈에 띄게 굳어졌다. 이윽고 청난의 손이 얼굴에 닿자 그는 석상처럼 굳어져 버렸다.
청난은 그의 볼을 지나 머리 위에서 장식되고 있던 것을 집었다.
“꽃잎이 묻어 있네요.”
“그, 그랬… 습니까. 감사합니다.”
“뭘요. 그나저나 본각의 제자는 아니고, 이 시간에 외부인이 올 리도 없고…….”
청난이 말끝을 흐렸다. 어쩐지 그에게는 완강하게 말하기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