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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121화 (121/146)

#121

“……!”

뒤늦게 청난을 발견한 한연화의 눈이 크게 떠졌다. 청난은 그에게 몸을 날렸다. 검을 두고 와서일까 아니면 그가 자신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서일까. 아마 백매가 본다면 소스라치게 놀랐을 광경이었다.

그리고 한연화는 저를 덮쳐 오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음에도 아무런 반격을 하지 않았다.

청난은 이로써 모든 걸 끝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은 그가 온 생애 동안 운 좋게도 선의와 호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기에 가질 수 있던 오만이었다.

청난의 양손이 한연화의 어깨를 짓누르며 넘어졌다. 한연화의 머리카락이 메마른 땅 위에 흩어졌다.

“그만하자.”

“내가 원한 건 사소한 것이었어요.”

“알아. 하지만 과해졌구나.”

“당신은 몰라요. 그러니 알려 드리려고 합니다.”

“뭐……?”

청난은 그를 놓고 멀어졌다. 언제든 뛸 수 있도록 자세를 낮추었고, 눈동자가 사방을 훑었다. 주변에 보이는 것은 오래된 건물뿐. 설치된 함정은 보이지 않는다. 다른 영기 또한 느껴지지 않았다. 애초에 이곳까지 뛰어오면서 그것도 확인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백매와의 약속이 있었다. 자신의 숨이 이곳에 걸려든 수사들의 숨과 같았으니, 이를 가볍게 여길 청난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놓친 게 있을까 한껏 긴장하였다.

어느새 일어난 한연화의 손이 움직이자 청난이 움찔거렸다.

그의 손이 점점 올라가더니, 가슴 앞에서 양손을 모아 공수하였다. 그저 평범한 인사였다.

“……?”

“긴장하지 마세요. 그저 인사드릴 뿐이니까요.”

그 순간 청난의 시야 아래에서 짙은 안개가 솟아올랐다. 청난이 몸을 뒤로 뺐지만 그것은 저를 따라왔다. 청난은 그제서야 그 안개가 자신의 목걸이에서 피어난 것임을 깨달았다. 진영이 준 목걸이였다.

“안녕히 주무세요, 사존.”

“너……!”

뒤늦게 숨을 참았지만 이미 늦었다. 청난의 시야는 빠르게 점멸하였다. 털썩, 이윽고 그의 몸이 쓰러지며 모래가 흩날렸다.

청난이 아주 어릴 때, 그런 기억이 있었다. 그에겐 갓 난 시절부터 돌봐 주었던 유모가 있었다. 진가의 아이들 중 그 유모의 손을 거치지 않은 아이는 없었다. 청난은 본가 내에서 막내였기에 유독 유모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다.

청난은 그녀가 다른 아이들의 이야기를 해 주는 것을 좋아했다. 언제는 한 아이가 장난치다가 우스꽝스럽게 넘어졌던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알고 보니 그 아이가 청난의 숙부였었다. 그 시절의 청난은 숙부 같은 어른도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게 너무나 신기했다. 그래서 온갖 재밌는 이야기책보다 유모의 이야기를 더욱 좋아했다.

그러다 한번은 이렇게 물었었다.

“유모, 가장 대단한 아이는 누구였어? 그 아이 얘기 좀 해 줘. 내가 아는 사람일까?”

“그럼요. 도련님께서 아주 잘 아는 분이시죠.”

“정말?”

청난은 기쁘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 때문에 손질하던 머리가 엉망이 되었다. 그럼에도 유모는 인자하게 웃을 뿐 조금도 탓하지 않았다.

청난은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게 누굴지 속으로 추리하기도 하였다.

아버지이실까 형님이실까. 아버지껜 죄송하지만 형님은 모든 면에서 뛰어난 분이시니 분명 형님일 거야.

하지만 유모는 의외의 말을 하였다.

“당연히 도련님이지요. 자, 머리 묶으셔야 하니 다시 뒤돌아 보세요.”

청난은 의아했지만 그녀의 말에 착실하게 뒤돌아 앉았다. 두 눈동자엔 여전히 총기가 가득했다. 청난은 돌리지 못하는 고개 대신 눈동자가 뒤로 넘어갈 지경으로 뒤쪽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럼요. 도련님 칭찬이 장내에 허다한걸요. 그 덕분에 이 유모의 걸음이 얼마나 당당해졌는지 몰라요. 다들 부러워한다니까요.”

“내가 잘하면 유모한테 좋은 거야?”

“세가의 온 사람들에게 좋은 일이죠. 단순히 장작을 나르는 일꾼도 도련님을 모신다 하면 부러움의 대상이 된답니다.”

“흐음… 그렇구나. 좋아. 알겠어!”

청난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유모는 그저 ‘오늘도 도련님이 귀여우시구나’ 하고 잠시 생각하며 가볍게 여겼다. 이런 대화를 했었다는 걸 기억하지도 못할 것이다. 하지만 청난은 아니었다.

“뭘 그렇게 생각하느냐?”

유회평이 입가를 부채로 가리며 물었다.

그의 뒤편으로 펼쳐진 넓은 광장에는 열댓 살 즈음의 아이들이 제각기 다른 옷을 입고 모여 있었다. 그들은 누군가 자신에게 찾아올까 한껏 긴장되어 있었고, 마침 청난의 옆에 앉아 있던 사제가 한 아이를 향해 성큼 나아갔다.

오늘은 수야각의 산문이 열린 날. 즉, 새로운 제자를 맞이하는 날이다.

수야각주의 애제자이자 천영근인 진청난이 제자를 찾는다는 말에 많은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그 덕분에 정자에 앉은 스승들은 아이들의 재능을 살펴보느라 여력이 없었다.

“아, 사존. 잠시 옛 생각이 났습니다. 사존께서 저희 집에 찾아오셨을 때 말이에요.”

“아아, 널 선점했을 때 말이구나.”

청난은 제 스승의 단어 선택에 하하, 어색한 웃음만 지을 뿐 못 들은 체하였다. 청난은 익숙하게 말을 이었다.

“절 그렇게 부른 사람은 처음이었죠. ‘아가’라니.”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렇게 부르지 않았을 게다. 그것이 네 입에 안착할 줄이야. 이립도 되지 않은 제자가 완전 애늙은이가 따로 없어. 손주도 없는 놈이 ‘아가야’, ‘아가야’. 누굴 그리 귀여워하는 거야?”

“어린아이들은 전부 귀엽지요.”

청난이 푸흐흐 웃음을 흘리며 시선을 무대의 주인공들에게 옮겼다. 유회평은 집중하는 제자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불만을 토로하는 것을 멈추어 주었다.

청난이 여덟 살이 되던 날, 청난의 아버지는 오랜 지기인 유회평을 집으로 초대했다. 이미 제 아들의 재능을 눈치챈 연유였다. 그렇게 청난과 마주한 유회평은 놀라서 얼이 나갈 뻔했다. 어리다고 듣긴 했지만, 어려도 너무 어리지 않은가. 심지어 청난은 발육도 느린 편이었다.

유회평은 ‘아이고 아가야.’라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불렀다. 하지만 청난이 천영근임을 알게 된 후로는 그를 제자로 삼고 다시는 그 호칭으로 부르지 않았다. 그런데 청난이 그걸 쏙 배울 줄이야. 심지어 점점 심화되어 애늙은이 같아져 버렸다.

“나도 이제 안 쓰는데 너도 그만하지 그러느냐. 네 형도 그런 말은 안 쓴다.”

“이제 습관이 되어 버린 걸 어떡한답니까. 그리고 형님께선 이름으로 부르시는 걸 더 좋아하십니다. 그렇죠?”

갑자기 호명된 주국은 그 목소리의 주인이 동생임을 깨닫자 얼음장 같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는 슬며시 웃었다. 방금 전과 같은 사람이라 보기 어려운 표정 변화에 그의 반대편에 앉아 있던 한 제자는 마시던 물을 뱉을 뻔했다.

주국은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맞아. 특히 네 이름을 부르는 걸 좋아하지.”

“허허, 난아. 네 형은 이름을 부르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니라 널 좋아하는 거란다. 저 아이가 너 말고 다른 이름을 부른 경우가 몇이나 있더냐? 잘해 봐야 초하나 불러 대었지.”

“그거야 사존께서 일을 넘겨 그런 게 아닙니까. 형님께서 너무나 바빠지셨습니다.”

“국이는 자리를 지켜도 되는데 굳이 널 따라다니느라 그런 게 아니냐? 그렇다고 민생이 널 찾는데 안 보낼 수도 없고. 스승을 탓하지 말거라. 탓할 거라면 잘난 동생을 탓해야지.”

“우리 난이를 왜 탓합니까.”

“하이고. 제자 키워 봐야 다 소용없다, 소용없어.”

“저는 동생과 함께하는 게 좋습니다. 난아, 난 너와 지내서 좋다. 내 제자들은 명석하여 잘 크니 걱정 마라. 그나저나 눈여겨본 아이는 있더냐? 너만큼 뛰어난 아이는 없을 테지만, 훌륭한 재능을 가진 아이들도 필히 있을 게다.”

“흐으음…….”

청난은 광장을 흩었다. 몇 명의 아이들이 유독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무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잘 모르겠습니다.”

“첫 제자라 고민이 많은가 보구나. 그럼 이 스승이 도와주마. 저 아이는 어떻더냐?”

청난이 회평의 부채 끝을 따라 한 여자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청난이 입문했을 때처럼 유독 어린 편이었는데 특별히 기운이 강하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를 선택한 수사 또한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둥근 젖살 가운데 박혀 있는 두 눈망울에선 총기가 느껴졌다. 청난은 그 눈망울 속에서 옅은 청량함을 느낄 수 있었다.

“좋네요. 아직 어려서 영기가 새어 나오지 못하고 있을 뿐, 자라면 재능이 있을 것 같아요.”

“그렇지. 물론 너만큼은 아니겠지만 저 아이도 뛰어날 테지.”

인간이 막 태어났을 때는 자연물에 가까운 영기를 가진다. 그러다 성장함으로써 점차 변모하는 것이다.

수사는 인간이다. 수사의 그릇을 본다는 것은 인간의 그릇을 보는 것이니 충분히 자라지 않은 아이들은 재능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그녀는 놀랍게도 걸어 다니는 것은 물론이고 혼자 장도 볼 만큼 자랐음에도 여전히 자연 친화적인 기운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만큼 영기의 순수성 또한 기대해 볼 만한 것이다. 이것은 일부 눈썰미 좋은 수사들이나 겨우 알아낼 수 있는 것이었다. 아마 이곳에 모인 이들 중에서는 회평과 청난, 주국 정도나 눈치챘을 터이고, 회평이 말하지 않았더라면 청난과 주국 또한 눈치채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너무 어려서 챙겨 줘야 할 게 많아 보이긴 하다만, 넌 그것을 더 좋아하잖느냐.”

“그건 그렇죠. 하지만…….”

청난이 답지 않게 말끝을 흐렸다.

분명 저 아이는 그가 꿈꾸던 사제 관계를 이루어 줄 게 자명했다. 하지만 청난은 무언가가 마음에 걸렸다. 문제는 그것이 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무언가 놓치고 있는 듯한 불안함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무엇을 두고 온 것 같기도 하고, 들러야 할 곳을 들르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이 큰 실수를 한 것 같았고, 몸의 반쪽을 버리고 온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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