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이렇게 보니 전생에 저를 찌른 자는 이토록 흉한 미소를 지었는데, 어째서 백매라고 착각했을까. 전생의 자신은 적어도 보는 눈이 없던 모양이었다.
연화가 자랑하듯 손을 쫙 펼치더니 손가락을 꼬아 수인을 맺었다. 그러자 그를 중심으로 하여 주변의 땅이 빠르게 메마르며 그의 머리 위로 둥근 원반 모양의 물 덩어리가 생겨났다. 물 덩어리가 커질수록 주변의 생명체들은 픽픽 죽어 나갔다. 사람, 식물, 하늘을 날던 새까지, 그 모든 것이.
비죽이며 올라간 입꼬리는 더욱 괴이해져 갔다. 미소를 짓는 게 아니라 길쭉한 상처가 난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이젠 뜨거울 걱정이 없어요. 와아- 정말 기나긴 여정이었네요. 이 모든 게 사존의 덕이니, 성대한 잔치를 준비해야겠습니다.”
“헛소리! 네가 사도를 걷는 데 감히 누굴 끌어들여?”
백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화백매야, 그리 속이 좁아 어떻게 사존의 제자라 할 수 있겠어? 너의 하늘 같은 사존께서도 사술을 쓰시던 걸 벌써 잊은 거야? 오늘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몰라요. 당신께서 말씀하셨죠. 차라리 제가 쌍영근이었으면 제자로 삼을 수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아 힘들 거라고. 자, 준비물은 이 제자가 챙겨 왔습니다. 술을 준비해 놨어요. 저와 사제의 연을 나누시죠.”
“헛소리. 날 스승으로 삼고 싶은 적이 정녕 있더냐? 내 배를 찔러 놓고 잘도 그런 말을 하는구나.”
“하! 그러실 것 같았어요. 당신이야말로 날 제자로 들일 생각 따윈 없었잖아! 입만 번지르르한 위선자! 날 구원했으면 책임을 져야지! 네가, 당신이 날 저버렸기 때문이야. 다 당신이 자초한 일이라고요!”
연화는 울상을 짓다가 버럭 화를 내더니 이번에는 비웃는 양 비죽여 댔다. 그 모습은 도무지 제정신이라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청난을 노려보더니, 하, 헛웃음을 내뱉으며 읊조리듯 말했다.
“그러게 오만하지 말았어야지.”
그가 몸을 돌려 점점 사라졌다. 그가 있던 자리는 어느새 다시 가동을 시작한 괴뢰들로 메꾸어졌다.
“기다려! 한연화!”
“사존!”
청난이 그를 붙잡으려 느린 뜀박질로 쫓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사라졌고, 대신 시체 같은 자 한 명이 청난을 향해 달려왔다. 청난은 순간 고민했다. 그를 다시 쫓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하지만 제 스승을 걱정하는 제자의 은빛 검날이 눈앞에서 선홍빛을 띠면서 그 고민은 짧게 끝나고 말았다.
툭. 청난은 방금 전 제게 달려왔던 이의 팔이 땅 위에 떨어진 것을 보았다. 제자는 그런 것 따윈 보이지 않는 양 울먹울먹한 눈빛으로 저를 안아 왔다.
그래, 그와의 약속이 있었다.
청난이 그의 품에서 일어나 섰다. 그 순간 한연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실, 당신이 되살아나서 정말 기뻐요. 그땐 제가 잘못했습니다. 당신이 죽고 나서 어째서인지 당신만 한 수계 수사는 태어나지 않았거든요.”
청난은 그 소리를 더 듣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리는 탓에 어디서 나오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고, 다시금 밀려오는 자들에게 스스로를 지키느라 다른 생각을 할 여력이 없었다.
“십 년 전 당신을 다시 만난 후로는 제 하나뿐인 친우가 당신을 주시하는 탓에 늘 기회가 없었죠. 그런데 이렇게 몸소 와 주셨으니, 제가 당신을 이어받는 것이 마땅한 도리 아니겠습니까.”
“네깟 게 어깨너머로 배운 걸로 감히 사존을 희롱해?”
백매가 이를 부득 가는 소리가 청난에게까지 들렸다. 청난은 그가 홧김에 이 장애물들을 베어 버리진 않을까 염려했지만 다행히 발길질이 거칠어지는 데에서 그쳤다. 백매는 연화의 위치를 감지한 모양인지 막연히 주변을 정리할 때와 달리 길을 트며 점점 자리를 이동했다. 그 와중에도 간간이 힐끗거리며 청난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서너 살배기 애가 된 것 같네.’
그 나이쯤 되면 걷고 뛰는 데다가 호기심도 많아 주시하지 않으면 어디론가 사라지기 일쑤라고 한다. 그 때문에 이웃집 동재는 줄을 매고 다녔었다. 그 줄 끝은 주모 아주머니가 쥐고 계셨지.
잔뜩 화가 난 백매에 비해 청난은 그의 도발에도 무덤덤하기만 했다. 다시 태어났을 땐 그리도 고통스러웠는데, 그새 초연해지기라도 한 걸까. 지금은 그저 저자의 만행으로 민생이 피해를 입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백매가 길을 뚫으면 청난이 뒤따라갔다. 그들의 뒤로 괴뢰가 쫓아오려 하자 청난은 지형물을 이용해 왔던 길을 닫았다. 괴뢰들은 나무 기둥이나 바위에 몸이 걸려 그 자리에서 버둥거리는 것 외엔 무엇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신선들 싸움에 등 터지지 말고 그저 그리 버둥거리고만 있어 주세요.’
청난은 마음으로 그들에게 부탁했다. 당연히 그들은 알아듣지 못했고 여전히 크르릉 짐승 소리를 내며 발버둥 쳤다.
백매가 손가락으로 길 끝을 가리켰다.
“사존, 저쪽입니다.”
“쯧, 취향 하고는.”
그곳에는 초옥실이라고 불리는 건물이 들어서 있다. 그곳은 청난의 제자들이 숙박을 하는 곳으로 백매 또한 잠시 생활한 적이 있었다.
푸스스, 푸스스.
관리되지 않아 사람 키를 넘을 정도로 높게 올라온 풀길이 끝나니 황량한 넓은 광장이 펼쳐졌다. 아직도 기이한 소리가 울려 대는 등 뒤의 광경과 달리 이곳은 그 무엇도 오가지 않고 고요하기만 해 마치 딴 세계에 온 것 같았다.
그리고는 그 가운데에는 한연화가 서 있었다.
팟-!
백매가 튀어 나가며 청난의 시야 끝에 잔상이 남았다. 그는 어느새 뽑아 든 검으로 한연화를 찔렀다.
챙-!
빠르게 뽑은 연화의 검이 백매의 검과 부딪쳐 금속음을 내었다.
무예로 인정받은 두 신선답게 그들의 검은 매 합이 초인적이었다. 연화가 한 번 휘두르자 그 압력에 멀리 있던 나무가 베어졌고, 백매가 막자 땅이 패었다. 청난은 차마 다가갈 수 없었다.
백매의 검은 청난에게 해를 끼칠까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한연화는 이제껏 버티지 못했으리라. 본인은 불편해하지만 어찌 되었든 그는 무예로 주목을 받는 신선이었다.
한연화의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기에 얼핏 보면 여유로워 보였으나 실상은 전혀 아니었다. 백매의 공격은 매 합이 강력했기에 단 한 번이라도 방어에 실패했다간 치명상을 입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이윽고, 연화의 목에 얕은 선이 그어졌다. 그저 긁힌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급소를 허용했다는 것만으로도 연화는 본능적인 위협을 느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대는데, 신선이라고 안 그럴까. 연화의 손끝에서 터져 나온 빛줄기가 청난의 머리 위를 노렸다.
“사존!”
우드드득- 파악!
청난이 몸을 수그리자 연화의 공격은 나무를 타격해 부러트렸다. 청난은 무사했다. 하지만 그 순간 백매는 빈틈을 허용하고 말았다!
연화의 날카로운 손끝이 백매의 복부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손끝은 복부에 닿지 못했다.
챙!
어디선가 날아온 금속 조각이 연화의 진로를 방해했다. 그 작은 틈 덕분에 백매는 무사히 회피할 수 있었다.
“범인의 몸으로 날 방해해? 사존, 참 너무하다. 못 가진 게 뭐야? 왜 그 지경이 되었는데도 날 가로막을 수 있는 거야?”
청난은 금속을 날렸던 자세를 풀어 그가 공격할 것을 대비하였다. 그가 날린 공격은 큰 것은 못 되었다. 비유하자면 새총으로 돌멩이를 쏜 정도에 불과했다. 만약 한연화가 의심이 많은 성격이 아니었더라면 소용이 없을뿐더러 자신에게 되돌아왔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청난은 한연화를 알았고, 또 그 틈을 놓치지 않을 제 제자를 알았기에 거침없이 수를 두었다.
백매는 한연화가 청난에게 달려들지 못하도록 쉼 없이 공격을 쏘아 냈다. 청난 또한 지켜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의 시선을 흩트리고 경로를 방해하며 백매를 보조했다.
“이 대 일은 비겁해.”
“비겁? 네가 입에 올릴 말이냐?”
“넌 예로부터 너보다 못난 것은 취급하지 않았지. 어째 본주가 네게 고마워해야겠구나. 감히 날 인원수에 넣어 줬으니 말이야.”
“이것 봐, 이 대 일이잖아. 너희 사제는 참 호흡이 잘 맞는구나? 하긴, 그럴 수밖에 없겠다.”
채앵-!
백매의 검에 보다 힘이 들어갔지만 연화의 말을 끊어 낼 순 없었다.
“화백매, 네가 사존의 모든 걸 따라 해 대는데 어떻게 안 맞겠어?”
“네가 무슨 상관이야?”
“상관있지. 왜 얘가 따라 하는 건 되고 내가 하는 건, 윽!”
“집중해야지, 아가.”
얇은 연검이 한연화의 손을 베고 지나갔다. 그의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메마른 땅은 그런 약간의 수분 따위로는 조금도 물기를 머금은 티가 나지 않았다. 그의 상처가 곧 아물었기 때문이다.
평범한 검이 신선에게 상처를 낸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우연으로라도 인간에게 상처를 입는다면 어찌 신이라 할 수 있을까. 그의 영에 손댈 수 없다면 신체 따위는 몇 번을 갈라도 금방 돌아올 터였다.
하지만 연화는 비웃지 않았다. 대신 이미 아문 상처를 부여잡고 등을 돌려 달아났다.
“어, 어?”
청난은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하여 그를 쫓았다.
그래선 안 되는 줄도 모르고.
연화의 가까이에 있던 것은 백매였지만, 그가 도망친 곳은 청난과 더욱 가까웠다. 보통은 눈치채지 못했을 터였다. 수야각을 총관리하던 청난이기에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청난의 몸은 머리보다 빠르게 행동했다. 청난이 온 힘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튀어나온 나뭇가지들이 피부를 붉게 그어도 멈추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있던 광장을 벗어나니, 괴뢰의 울음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그 덕분에 청난의 발소리는 그 안에 묻힐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풀숲이 끝나고, 연화를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