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백매가 청난을 보듯, 청난 또한 백매를 보았다.
빛을 반사하던 장신구가 사라진 그는 마치 오래전 소각주였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였다. 단정해진 모습은 조금도 초라하지 않았다. 꽃을 감싼 장식이 사라졌다 하여도 꽃이 아니게 되지 않는 것처럼. 그는 예나 지금이나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스승은 화려해졌고, 제자는 간소해졌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특출 나게 귀태 나지 않았고, 서로 잘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가자꾸나.”
“네.”
청난이 손을 들어 보이자 그 위로 백매의 것이 겹쳐졌다. 그리고 그들은 한 발 내딛음으로써 적의 소굴로 들어갔다.
무형의 막을 지나자마자 오감이 요동치며 이곳은 심상치 않은 곳임을 알려 주었다. 시체 썩는 냄새가 코를 자극하고 뿌연 안개가 시야를 방해했다. 기온마저 서늘하니 청난은 고요한 사이로 괴이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도 일었다.
“사기가 낙낙하게 퍼져 있으니 조심하세요.”
“나는 아직 모르겠구나.”
“아마 가까이 갈수록 진해질 거예요. 사존께서도 아시다시피 사기는 자신도 모르게 사람을 꾀어내니, 음… 제 손을…….”
“그래, 그래. 손을 잡으라는 것이지.”
청난이 그의 손을 끌어다 잡았다.
“되었느냐? 아까는 잘만 말하더니, 왜 다시 어린아이가 되었누?”
“사조온… 제자를 놀리지 말아 주세요.”
“내가 언제 놀렸어?”
청난은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웃었다. 그의 말대로 사기는 정신을 혼탁하게 만든다. 영기가 강한 이라면 면역이 있어 걱정할 것 없었지만 청난과 같이 일반인에 가까운 사람은 조심해야 했다.
청난은 마치 무수히 많은 가시로 된 길을 걷는 것 같았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백매는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데다 이미 등선하였으니 이런 감각을 느끼지 못할 거라는 점, 그리고 사기에 버티는 건 신체 건강의 여부와 상관없다는 점 정도. 정신력이라면 지금의 청난도 무시할 게 못 되었다.
‘정신력으로 이겨 내려다 몸이 탈 나고 걱정 끼쳤지만.’
또 쓰러질 것 같으니 변명이라도 생각해야겠다.
수야각까지는 아무도 없었기에 청난은 마음 놓고 백매에게 몸을 맡겼다. 누군가 있었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이 안에 들어온 순간 그는 이미 우리의 방문을 눈치챘을 테니.
성큼 목적지로 온 백매는 대문 앞에서 청난을 내려 주었다.
두 다리를 땅에 붙인 청난은 높디높은 문을 올려다보았다. 먼 세월이 지난 후에도 이것은 여전히 웅장했고, 깊은 친숙함을 안겨 주었다. 오래된 현판은 여태 달려 있었다. 잘 관리되었던 문과 담은 그 현판만큼이나 오래되어 보였다. 여기서 새로운 것은 오직 청난의 몸뿐이었다.
아니다, 대문 앞을 지키는 저 시체도 청난의 비슷한 연배로 보였다.
그것이 앉아 있는 탁상은 본디 방문객을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진 자리였다. 과거의 수야각은 늘 방문객이 많았기 때문에 그 앞은 언제나 인산인해를 이루곤 하였는데, 지금은 오직 옛 제자 둘뿐이 되었다.
이 소년은 현재의 수야각 제자인 걸까, 아니면 그가 구색을 맞추고자 가져다 둔 것일까. 청난은 이미 사체가 된 자에게 관심을 끊었다.
“이 고약한 신선께서는 본각이 참으로 우습나 보구나.”
힐끗 본 청난의 표정이 퍽 싸늘했다. 백매는 그가 ‘신선’을 불쾌하게 생각할까 걱정되어 급하게 수백 신선들을 대표해 변호하였다.
“그 녀석의 천성은 아비에게 비롯된 것일 테죠. 고약한 자가 성령함을 얻어 하늘에 오른들 지독한 냄새가 사라지겠나요?”
사용한 단어는 뒷골목 왈패를 떠올리게 하였는데, 그 말투는 처연하기 그지없었다. 눈썹 앞머리를 들어 올리며 똘망똘망 바라보는 것이 마치 ‘전 안 그래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청난은 있는 분노 없는 분노가 모두 사그라들었다. 그는 헛헛하게 웃었다.
“그래, 그래. 너는 안 그러겠지.”
“물론이에요. 사존이 키우셨잖아요. 당신이 싫어할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거예요.”
“…….”
백매는 자신의 무해함을 피력한 것일 테지만, 그것은 청난의 양심을 콕콕 찌르는 바늘이 되어 버렸다.
청난은 이 대화를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사기 등등한 적진의 문 앞에서 하기에 마땅한 대화도 아니었다.
수야각의 양 문을 굳게 닫혀 있었다. 법진이 걸려 있는가 싶었으나 딱히 그런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물리적인 잠금이면 좋을 텐데.’
청난이 문에 바짝 다가가던 때, 무언가 느낀 백매가 소리쳤다.
“사존, 잠시-.”
끼이이이익.
청난의 행동은 저 자신의 생각보다 빠르니, 백매가 소리치는 것보다 빠른 건 당연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손은 문에 닿지 못했다. 닿지도 않았는데 두 문이 활짝 열리며 옛 주인을 맞이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부 광경을 보게 된 청난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이 장소는 그의 전생 대부분을 보냈던 친근하고도 낯익은 곳이 분명했다. 하나, 이곳을 가득 메운 저 영혼 없이 돌아다니는 죽은 것들은 너무나 괴이하고 낯선 모습이었다.
-끄어어억…….
-끄으어억…….
무엇이 걸린 듯 목을 긁는 비틀린 소리를 내는 저들은, 움직이고 있었으나 살아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손발을 휘두르며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었고,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그 어떤 언어도 아니었다. 심지어 인지 능력도 없는 것인지 서로 부딪치기까지 했는데, 그저 튕길 뿐 별다른 반응 없이 다시 휘적이기 시작했다. 괴뢰였다.
“사…….”
백매의 목소리가 나온 순간, 그저 광장을 채울 뿐이던 괴뢰들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가 백매를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백매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비척거렸던 것과 달리 그 속도는 사냥감을 눈앞에 둔 짐승처럼 매우 빨랐다.
“……!”
괴뢰를 보던 청난은 곧이어 제 옆에 있는 자의 기척을 눈치챘다. 청난이 적절하게 몸을 숙이자, 곧 그의 등 위로 은빛의 칼날이 수평으로 그어졌다.
촤아아악-!
백매가 벤 ‘것’에서 붉은 선혈이 쏟아져 바닥을 적셨다. 청난이 곧장 일어났다. 어느새 백매는 검을 뽑아 그들에게 휘두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기다려 보거라!”
“예, 예?”
“이들은 아직 산 자일지도 몰라.”
“살아 있다고 한들 지금은 사존을 위협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알고 있었구나.”
“사존, 모든 사람이 살 수 없는 법입니다. 제 발로 선택해 이곳에 온 자들입니다. 그 결과 또한 온전히 그들의 책임이지요. 어째서 사존께서 지고 가시려 합니까.”
백매의 목소리가 애원에 가까워졌다. 마치 십 년 전 그날처럼. 그가 자신에게 맞춰 주고 있었기에 평소에는 눈치채지 못했던 골이 다시금 눈앞에 드리워졌다.
“그게 죽을 정도의 죄는 아니지 않으냐.”
청난은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침울해졌다. 그와 함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그를 슬프게 만들었다.
그때, 백매가 훌쩍 다가와 청난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저, 저는 사존과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요.”
“백매야.”
“그럼 이렇게 해요. 사존께서 무사하시다면 저도 이들을 해치지 않겠습니다. 어, 어때요?”
청난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괴뢰는 이미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어깨 너머로 그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더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청난은 자신의 손목을 잡은 백매의 손등 위에 반대쪽 손을 턱 올렸다.
“좋아!”
“좋습니다.”
백매는 대답과 동시에 몸을 돌렸다. 그의 검은 이미 검집에 들어가 있었다.
그들의 몸이 얼마나 연약한지 알 수 없었기에 영기를 쓰는 것도 위험했다. 고로 백매는 검집으로 그들을 후려 패기 시작했다.
퍼퍽! 퍽!
백매는 정확하게 급소를 노려 두들겼다. 다행히 이들은 숨 쉬는 시체에 불과한 건 아닌 것인지 고통을 느꼈고, 또 정신을 잃기도 했다. 덕분에 주변은 조금씩 정리되어 갔다.
청난도 마냥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최고의 방어는 선공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없다면 지금부터는 있다.
채애애애앵!
검집에서 나온 얇은 검날이 가늘게 진동했다. 이 검은 가벼워 청난의 빼빼 마른 손으로도 휘두르기 버겁지 않았고, 잘 관리되어 있던 덕택에 적은 힘으로 큰 효과를 낼 수 있었다.
한 괴뢰가 청난에게 달려들자 청난의 검이 포물선을 그리며 옆에 있던 나뭇가지를 서걱 잘라 내었다. 가지가 시선을 막는 그 순간에 청난이 발끝에 있던 돌을 걷어차 연못에 빠트렸다. 풍덩. 소리가 나자 그는 목표물을 잃은 사람처럼 제자리에서 헤매다가 격렬히 움직이는 백매를 향해 몸을 틀어 달려갔다.
자연물을 이용한 간단한 진법이었다.
청난에게 있어 시시각각 주변을 파악하고 그에 맞게 진법을 구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청난은 갖가지 진법을 섞어 가며 그들의 시선을 흐트러트리는 그만의 방식으로 전투를 펼쳤다.
“소란스럽구나.”
괴이한 울음소리 사이로 낮은 목소리가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청난과 백매에게 달려들던 이들은 시간이 멈춘 듯 그 자리에서 멈추어 버렸고, 둘은 익숙한 목소리에 시선을 한데 모았다.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가 점차 커졌다. 그리고 이내, 한연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이곳의 주인인 양 그 걸음이 당당했고, 그가 손을 휘젓자 사람들이 물러났다.
“사존, 오셨군요.”
“누가 네 사존이냐?”
“와- 사제지간은 닮는다더니, 백매가 하던 말을 이젠 사존께서 하십니다. 이 제자도 분발해야겠네요.”
“여기서 더 분발하겠다고? 기어코 천지를 뒤집을 작정이구나.”
“아닙니다. 연이는 그렇게 욕심쟁이가 아니랍니다. 이미 원하는 것을 이루었는데 하늘과 땅은 건드려서 무어가 좋겠어요?”
“원하는 걸 얻었다고?”
연화가 씨익 웃었다.